후금 건국사) 프리퀄 1편 : 1574~75년 아구의 난
(삽화 출처 : 네이버 웹툰 칼부림)
명나라 가정시기~ 만력초기의 여진족 수장중 한 명이던 히타라 씨족의 아구는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명나라로부터 건주의 우위도지휘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위도지휘로 임명되었다고 하여 명나라에 언제나 충성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구는 명나라와 싸우는 경우가 더 많았던 인물이었다.
아구와 명나라간의 충돌을 한 편의 글에서 모두 다루기에는 힘든데, 아구가 1557년부터 시작하여 요동을 수십번이나 내침하여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과 병사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557년 무순쪽을 공략하여 수비 팽문수를 살해했으며 이듬해에는 제조 왕삼접과 이송, 파총 왕수렴, 수보 추국진등을 살해했다. 1562년에는 요동부총병 흑춘까지 살해할 정도로 그 기세가 높았다.1
객관적으로 평하여, 아구의 군사적 역량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명나라는 아구를 회유하는 동시에 친명 여진 세력인 하다와 그 수장 '완 한'을 이용하여 아구를 견제했다. 그러한 정책은 1570년대에는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1572년에 아구가 명나라의 수비 가여익이 여진족을 업신여기며 포악히 행동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다시금 봉기를 일으켰을 때에 완 한이 직접 나서서 아구를 압박하고 붙잡은 포로들을 돌려보내게 한 사례가 특기할 만 하다.
1572년의 합의에서 아구는 명나라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기로 하고 명나라에 충성키로 했으며 동시에 명나라는 아구의 산하에서 도망친 여진족들을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내기로 협의를 했다. 그것으로 아구의 명나라 침입은 얼마간 존재치 않았으며, 아구는 약탈을 하는 대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호시에서 거래를 하며 수익을 확보했다.
그러나 1574년의 마찰은 아구에게 최후의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1574년 7월 아구의 산하에 있던 내력홍(만주어 이름 불명, 來力紅)이라는 인물의 부하인 나이아투(奈兒禿)라는 자를 포함한 4명이 자신의 주인인 내력홍을 배신하고 명나라의 수비 배승조에 투항하였는데 내력홍은 그들을 잡기 위해 배승조의 진영에 와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배승조는 투항한 이들을 내주지 않았는데 이는 1572년에 맺어진 합의를 어기는 것이었다. 내력홍은 배승조를 원망하며 돌아가는가 싶더니 야간에 대군 2명과 타초군 3명, 총 5명의 명군을 습격하여 그들을 포로로 잡아 도주했다.
배승조는 내력홍에게 포로들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내력홍이 이를 무시하자 19일 2백명의 군대를 이끌고2 내력홍을 직접 압박하기 위해 그의 영채로 진격했다. 이 때 내력홍의 주군이었던 아구는 명나라에 조공하기 위해 말 5백필과 30여 바리의 방물을 가지고 와서는 명나라의 역사에 대기하고 있었는데3 배승조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군대를 끌고 자신 산하의 부락으로 향하자 크게 놀라 바친 공물들을 회수하지도 않고 복귀했다.
배승조는 내력홍을 포위한 찰나에 아구가 지원을 오자 역으로 포위되는 상황에 놓였다. 아구와 내력홍은 배승조와 당장 충돌하지는 않고 협상을 시도하였는데 배승조는 이를 믿지 않고 아구와 내력홍을 꾸짖은 뒤 선공을 가했다. 이로 말미암아 수십명의 여진인들이 살해당하자 아구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명군을 공격케 했고 그로 인해 배승조가 이끌고 온 군대는 궤멸되었다.
아구로서는 협약도 지켜지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쳐들어와서는 자신의 말을 믿지도 않고 먼저 선공을 당한참인지라 배승조에 대한 화가 극에 달했다. 그는 배승조의 배를 갈라 죽임으로서 분풀이를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명나라 쪽에 강화협상을 제시한 정황도 포착되는데 아구의 동생 왕태4가 포로로 잡힌 명군 3명을 돌려보냄으로서 강화를 제의한 것이다.
명측은 이 사태의 경과를 보고서 배승조가 경솔하게 대처했다고 평하긴 했으나, 동시에 관원과 병사들이 아구에게 궤멸된 것을 정치외교적 타격으로 여겼다. 그들은 자칫 잘못하면 이 문제가 아구만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 하다와 차하르5까지 개입하는 문제로 커질 것으로 여겼다. 명나라의 위신이 떨어지고 국경통제에 헛점이 보인 틈을 타 그들이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실 하다가 개입하리라 판단한 것은 지나친 생각이었으나 차하르등의 몽골 세력의 경우 확실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기에 명측의 요동순무 장학안은 아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아구와의 공시관계를 끊은 뒤 요동총병 이성량을 중심으로 한 토벌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시에 아구에게 저항치 말고 이번 사건과 관련된 관계자들을 보내고 붙잡고 있는 명군 포로들을 석방, 이후 처분을 기다리라는 포고를 전했다. 토벌이 시작되기 전에 항복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하다의 완 한에게는 명조에 충성하여 아구에 대한 압박을 지원, 그를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완 한이 혹여라도 아구와 연계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코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아구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자신이 먼저 공격을 가하기로 했다. 9월 한달동안 아구는 종횡무진하며 요동 각처를 약탈했다. 그러한 공세에 청하, 동주, 무순 인근이 약탈을 당했으나 명나라는 당장 대응치 못했다. 아직 군대가 집결하는 중이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10월 7일, 아구는 3천여 기병을 몰고서 다시 요동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는 이미 이성량의 대군이 각지에서 집결한 상태였다. 10일, 아구는 오미자충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오히려 이성량이 이끄는 명나라의 대군의 급습을 받고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후퇴, 본인의 성채로 복귀하였다.
이성량은 아구가 후퇴하자 그대로 진격, 대군으로 그의 성을 포위한 뒤 군율을 엄히 정하고 적에 대한 궤멸을 목표로 삼은 대공세를 개시했다.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의 명군6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아구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 성에서 몸을 빼내어 간신히 도주했다. 그 전투에서 확인된 아구군 수급만 1,104급이었으니 필시 더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을 것이다.7
아구의 난이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으나 아구는 여전히 명나라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 그는 1575년 2월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다시 요동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이 때 부총병 조보가 나서서 아구를 격파했다. 아구는 자신의 옷을 부하 아하나8에게 주어 명군을 유인케 한뒤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아구는 차하르의 투먼 칸과 바린부의 수부하이 다르한9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으나 명군의 추격망에 갇혀 당장 탈출치 못하고 결국 하다의 완 한에게 먼저 투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 했다. 그와 다소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하다의 완 한은 아구와 친분이 있는 사이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는 공시에 참여했던 여진인들을 구류하고서 그들을 인질로 여진 군주들에게 아구를 찾아내어 바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기에 완 한으로서는 아구를 숨겨줄 수가 없었다. 완 한은 결국 아구를 결박하여 명나라의 개원병비부사 하진에게 양도했고 하진은 그를 데리고 광녕으로 향했다. 1575년 음력 7월의 일이었다.
아구의 처형은 1575년 음력 8월 북경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책형을 당하여 죽었고, 사후 참수되어 그 목이 무순으로 보내져 효시되었다. 그것으로 1574년에서 1575년까지 이어졌던 아구의 난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아구의 복수를 벼르며 칼날을 갈고 있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아구의 장남 아타이, 차남 아하이였다.10
전체적으로 볼 때에 아구의 난은 배승조의 절망적인 대처가 불러온 참극이었다. 협의를 어긴 것,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본인 휘하 군대만 데리고 간 것,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온 아구와 미리 상의를 하지 않은 것, 선공을 가한 것이 모두 배승조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아구라는 인물의 호전성을 보건대 이 사건은 언젠가 터질 일이 터졌다는 인상도 풍긴다.
1.청사고 권 222 열전 9 왕고 열전, 무요부초건주이추왕고소략
2.청사고 왕고 열전에는 3백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당대 사료로서 요동순무 장학안이 만력제에게 상주한 상주문을 기준으로 병력을 기술한다.
3.이 역시 청사고에서는 말 2백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장학안의 상주문을 참고하여 실제로는 5백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이로 기술한다.
4.王太, 하다의 완 한을 지칭하는 왕태王台와는 철자가 틀리다. 기록이 미비하여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1574년 음력 10월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5.몽골 좌익 세력, 대칸 계승권을 보유. 당시 대칸은 자삭투 투먼 칸
6.정확한 병력수는 확인되지 않으나 병거와 기마를 합쳐 6만이라 하였으니 요동의 야전군 대부분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7.장학안의 상주문, 청사고 왕고 열전 참조
8.이 아하나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닝구타 버일러 세력'에 속한 보오시의 아들 아하나 라는 추정이 있다.
9.수부하이 다르한은 명측의 기록에 흔히 속파해速把亥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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