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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2024.03.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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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한없이 넓고 어두운 공간이 있다. 별이 전부 사라진 우주가 이런 모습일까 상상하게 만드는 칠흑. 그 한복판을 분필로 선을 긋는 것처럼 가느다란 빛이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별똥별의 중심에 운석이 있듯, 막힘 없이 나아가는 빛 속엔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얼마나 걸릴까?”

 

  [글쎄,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니까 대충 감으로 아는 수밖에.]

 

  대자로 누운 채 고개만 까딱거리던 상준은 지루하다는 투로 물었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좀 느긋한 거 아니야?”

 

  그의 물음에 아리오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네가 마법에 대해 무슨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게 너네 집 안마당 산책하듯 쉬운 게 아니라고.]

 

  “난 집 없는 노숙자라 마당이니 뭐니 해도 잘 모르겠는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빈정대는 모습에 배알이 꼴린 아리오나.

 

  [말이나 못하면. 차원 이동 마법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성공 사례가 없어서 나도 실패하면 죽는다 생각하고 한 거··· 아.]

 

  “어이.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릴 한 것 같은데.”

 

  너무나도 열 받는 표정에 몰라도 될 진실을 뱉어버린 아리오나.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어떻게든 발뺌 해보려 하지만 소년은 물고 늘어졌다.

 

  “그러니까 종족 단위로 디버프가 걸려 있으면서, 성공 사례가 없는 마법을 쓰셨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너네 세계로 갈 땐 성공 했으니까, 1번이지만 성공 사례는 있는 거지.]

 

  상준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이쿠 그러시구나. 그러면 평소 댁네 종족이 마법 성공률이 얼마나 되는데?”

 

  아리오나는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세 개 폈다.

 

  “3프로?! 이런 미친···!”

 

  [30 퍼센트라고!]

 

  “그게 그거지! 반도 안되는 확률에 남의 목숨을 걸어?!”

 

  이 뒤로 성공 했으니 그만인 거 아니냐는 아리오나와 그래봤자 도박이나 마찬가지라며 따지는 상준의 실랑이가 얼마간 이어졌다.

 

  [느껴진다. 미약하지만 마나가 느껴져. 몇 분 정도 있으면 도착할거야.]

 

  “드디어 이 우중충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건가.”

 

  기지개를 켜는 상준에게 아리오나는 말했다.

 

  [상처 벌어지니까 막 움직이지마. 전문도 아니고 도착 전까지 완치는 못하겠지만, 일단 치유 마법 걸어줄게.]

 

  “그거 괜찮은거지? 막 실패하거나 하면 폭발하는 거 아니지?”

 

  [이게 자꾸 그러네? 싫으면 관두던가!]

 

  빠르게 사과하는 상준을 보고 못 마땅한 척 치료를 시작한 아리오나는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도착 전에 앞으로 네가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너 귀한 집 아가씨라며, 대충 살아도 되는 거 아냐?”

 

  [말했잖아. 형제들한테 뒤통수 맞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고. 언젠가 반드시 모든 걸 되찾을 거지만, 당장에는 무일푼으로 지내야 할 수도 있어.]

 

  ‘그랬었지···. 새 인생 산다는 생각에 깜빡했네.’

 

  [그렇지 않아도 넌 아예 다른 세상에 가는 셈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아는 편이 낫잖아?]

 

  그렇게 운은 뗀 아리오나는 자신의 종족부터 시작해, 타 종족들의 특징, 규모 등등 자신이 아는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충분치 못한 탓에 알고 있는 모든 걸 설명하진 못했지만, 대강의 사정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세계엔 13종의 다수종과 그외 소수종이 있고, 그 중 아리오나가 속한 포타스족 제국과 11 종족 연합이 전쟁 중이라···.’

 

  일단 전쟁 중이라는 것 자체가 느낌이 안 좋아. 불안한 마음에 소년은 찢어진 옆구리를 치유 중인 아리오나에게 물었다.

 

  “야, 우리 목적지가 어디야? 설마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지는 건 아니지?”

 

  [응? 당연히 모르지. 네 말대로 운 좋게 성공한 마법인데 그런 세밀 조정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아니나 다를까 대책따윈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고막 이상을 의심해보았지만, 아리오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세상의 절반이 우리나라고, 적국에 떨어진다 해도 외견만 보면 넌 평범한 인간종인데 무슨 상관이야. 전쟁터에 떨어져도 네 몸 하나 정돈 지켜줄 수 있고, 굳이 위험한 곳을 찾자면···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다던가?]

 

  그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신뢰감이 생긴 상준은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근데 너네는 바다가 별로 안 넓나보다? 지구는 바다가 70 퍼센트나 되는데.”

 

  [······ 그것 참 큰일이겠네.]

 

  몇 초간의 공백. 그걸 놓칠 상준이 아니었다.

 

  “야, 너 뭐 캥기는 거 있지?”

 

  [에이, 그런 거 없어~]

 

  “없는데 왜 그리 눈을 피해?”

 

  그야 너네나 우리나 바다가 땅보다 훨씬 넓은 건 마찬가지니까. 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리오나는 의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준의 눈초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야, 너 역시··· 잌!?”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캄캄한 어둠이 걷히고 눈앞이 확 밝아졌다. 본능적으로 눈을 찡그리는 소년에게 그녀는 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다! 너의 새 인생이 시작될 이 땅의 이름은 파라니아. 다소 험난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자신의 세계를 소개하는 붉은 머리의 미인과 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풍경이란, 달에서 지구를 보는 것 같은 장관이었다.

 

  [어때? 엄청 예쁘지? 저런 곳에서 살 생각하니 두근두근하지?]

 

  “이, 이···.”

 

  [이?]

 

  “이 거짓말쟁이야아아악!”

 

  행성의 대부분을 채운 푸른 부분을 가리키며 소리치는 상준이었지만, 그의 외침은 추락하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비명과 괴성 사이의 무언가가 되었다.

 

 

 

  두 사람이 대기권에서부터 화끈하게 낙하하고 있는 그때, 파라니아 어딘가에 있는 숨겨진 유적에선 긴급 회의가 열린 참이었다.

 

  -끼익

 

  오래된 문 특유의 여닫는 소리. 시끄럽다거나 크다고 표현할만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공간에선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잘 들렸다. 이로 인해 물꼬가 트인 것인지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나타나셨구만. 불러낸 사람이 제일 늦게 나타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동왕나리.”

 

  소와 인간을 섞어놓은 듯한 외모의 남자가 말했다. 그 말에 찬성하듯 귀가 길고 요염한 몸매의 여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비상이라길래 피부 관리 받던 것도 내팽개치고 왔는데!”

 

  '방구석에서 편하게 화상 마법이나 켰으면서 아주 그냥 생색은···.'

 

  회의의 주최자인 동왕의 욱하는 기질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찰나, 선수를 치는 이가 있었다.

 

  "미노타우르스 족장, 엘프 장로. 그대들의 큰 귀는 장식 입니까? 문 밖에서부터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요. 일정이 어긋나 심사가 뒤틀리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마음을 좀 더 너그럽게 가져주시지요."

 

  목소리의 주인은 푹신해보이는 귀를 가진 기품 있는 여성이었다.

 

  "허허, 요호들의 호령자여 배려에 감사하오."

 

  '저 늙은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 편을 드는거지?'

 

  자신을 두둔하는 말을 하고 있건만, 그녀의 아홉 꼬리가 일렁일렁 거릴 때마다 좀체 진정되질 않았다. 무언가 꿍꿍이 속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본질이 건방지고 남 골리기 좋아하는 여우라는 게 드러났다.

 

  "여기저기 솟은 머리칼이며, 단정치 못한 옷차림에 비뚤어진 왕관 좀 보시지요. 얼마나 서둘렀으면 이런 꼴이 되었겠습니까. 우스운 꼴로 우리에게 웃음을 주었으니 약간 늦은 정도는 우리가 참아주는 게 도리겠지요."

 

  '그럼 그렇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동왕을 폄하하기 시작하는 구미호 여왕. 동왕은 짜증이 치솟았지만, 오늘의 그는 평소와는 달랐다. 상대가 격분하는 걸 보고 즐기는 변태 늙은이의 꾀에 넘어가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정확히는 하려 했다. 회의장을 싹 훑어본 동왕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모두 와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저 빈자리는 누굽니까?"

 

  질문에 답한 건 낯빛이 창백한 은발의 남성이었다.

 

  "··· 오늘은 유독 회의장이 조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급한 일이라고 그리 말을 했는데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동왕은 이마를 탁 치며 탄식을 내뱉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은 채 물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로 빠졌답니까?"

  "그에 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림자가 져있던 벽 귀퉁이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통과 머리는 인간과 흡사하지만,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리고 팔 대신 날개가 달린 종족. 세이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보다 큰 날개를 공손히 모아 예를 차렸고,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눈을 비비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의심했다.

 

  '새대가리 중에서 저런 자가 있을 줄이야···.'

 

  자유롭지만 방종하고 예의 없는 종족. 그것이 세이렌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그것을 뒤엎을만한 증거가 떡하니 존재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패러다임을 부서지는 걸 보고 있자니, 두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자네, 이름은?”

 

  조용히 듣고 있던 흉터 투성이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질문에 여인은 또박또박 답했다.

 

  “에티모티피아, 라고 합니다. 북왕이시여.”

  “예의라…. 자신의 가장 큰 업적 그 자체를 이름으로 삼는 세이렌 답군.”

 

  저 과묵한 양반이 먼저 입을 열다니. 하긴, 나도 머리털 나고 저런 건 처음 보니 말이야. 동왕은 내심 북왕의 심정에 공감하며 다시금 본래의 화두로 돌아왔다.

 

  "··· 어디 그럼 자네의 왕, 이카루스가 어째서 회의에 불참했는지 말해주겠나?"

 

  상상도 못한 것을 보아 기분이 좋아진 그였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낚시입니다."

  "뭐라···?"

  "이카루스께선 낚시에 가시느라 회의에 불참하셨습니다."

  "지금 장난하나!"

 

  결국 폭발한 동왕.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를 중심으로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예상하고 있는 왕들 사이에서는 제각각의 반응이 나왔다.

 

  “어이! 자네 미쳤어?!”

 

  말리는 자.

 

  “후후. 예정에 없던 진귀한 볼거리를 둘이나 보다니, 오늘은 운수가 대통이군요.”

 

  재미있어 하는 자.

 

  “이번 회의는 이걸로 끝난 것 같군. 난 돌아가 보겠다.”

 

  무관심한 자.

 

  당장 폭발할 것처럼 일렁이는 마력 앞이건만, 에티모티피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카루스께선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는 있는 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꿋꿋이 왕의 전언을 되뇌었다.

 

  “약속도 없이 갑자기 회의따윌 잡은 네가 나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응축된 마나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위를 산산히 부숴나가던 충격파가 여인에게 닿기 직전,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디선가 연기가 일더니 그 안에서 등장한 거구의 남자. 그는 잠수라도 할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청소기에 먼지가 빨려들어가듯 주변의 마나가 모조리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뿌웅!

 

  “이거이거 빈 속으로 오지 않았으면 다 삼키지 못할 뻔 했구만!”

 

  연신 방귀를 뿡뿡 뀌어대며 남자는 씩씩대고 있는 동왕을 향해 나아갔다.

 

  “허허. 그놈의 성격은 여전하구만, 하마터면 사람이고 건물이고 다 날아갈 뻔 했어.”

  “중요한 회의라고 불렀더니 너무 비협조적이라서 말이지요.”

  “이 사람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디 뭐 동네 백수들인가? 다 나름대로 일정이라는 게 있고, 계획이라는 게 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불러들이면 기분이 좋을리가 있나.”

 

  박살난 테이블과 구멍이 나 떠다니는 구름이 훤히 보이는 천장. 동왕도 찔리는 구석이 없진 않은지라,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

 

  “다들 미안합니다. 특히 이카루스 대신 온 자네, 자네 신변에 문제가 생겼으면 외교 문제로 커졌겠지. 다시 한 번 미안하네.”

  “그나저나 두령은 무얼하다 이제 나타난 거지? 지각까지 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중요한 일이었을 듯한데.”

 

  늑대와 사람을 섞은 듯한 남자의 말에 두령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중요하고 말고! 도깨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이지. 오늘이 달에 한 번 개최하는 씨름 대회 예선이라서 말이야. 젊은 친구들이 땀 흘리는 걸 구경하다 달아올라서 나도 참가해 버렸지 뭔가.”

  “그래서 재미있으셨겠습니다?”

  “아무렴, 젊은 친구들하고 어울리면 나도 같이 젊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네.”

 

  요약하면 놀다가 늦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소리. 다시금 동왕에 주변에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의장이 두 번 망가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촌극은 거기까지만 하지.”

 

  단 한마디로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가 있었다. 굵직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 그 이상의 카리스마.

 

  “이러다가 죽을 것 같아….”

 

  훌륭한 연설가의 자질을 가진 이는 지금 건어물이 되어 생을 마감할 듯한 꼴이었다.

 

  “아난타! 자네 또 맨몸으로 지상까지 올라왔나? 야단났군, 당장 안건을 말하도록 하지.”

 

  실시간으로 말라가는 나가의 왕을 본 동왕은 급히 회의를 시작했다. 처음엔 건성으로 듣던 왕들도 점점 눈빛이 진지해졌고, 그의 말이 끝났을 땐 반쯤 놀자 판이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거 정말 제대로 본 거 맞나?”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 틀림없습니다.”

 

  확신에 찬 동왕의 대답. 다른 이들은 그럼에도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차원 이동 마법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실질적으론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거잖나.”

  “선홍의 마녀가 사라진 후로 1년이 지났고, 수많은 자객을 보냈지만 누구 하나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녀만 살아돌아오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악마들 쪽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지….”

  “나도 어지간하면 착오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보고서는 지금으로부터 1시간 전쯤 첨성대에서 들어온 겁니다.”

 

  첨성대. 동인들이 자랑하는 최첨단 마력 탐지 장치다. 아주 짧은 순간, 매우 미약한 반응이라도 범위 내에서라면 100퍼센트에 가까운 탐지율을 보여주는 장치. 다른 왕들 또한 그 성능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진위 여부를 따질 수 없었다.

 

  “그 마녀가 돌아왔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미간을 찌푸리는 엘프 장로에게 잠자코 있던 검은 피부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 후로 1년이야. 1년이나 꾸준한 선전과 정보 조작으로 우리 연합 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제국 쪽에서도 아리오나 황녀의 이미지는 완전히 더럽혀진 걸로 아는데? 듣자하니 권력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일으키려한 패륜아로 불린다더군.”

 

  그에게 호응하듯 아홉 꼬리를 살랑거리며 여우들의 여왕은 말했다.

 

  “저도 남왕과 같은 소식을 들었답니다. 그녀를 추종하던 이들도 갑작스런 주인의 실종과 선동에 맥을 못 추고 무너졌다면서요?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국으로 밀고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네요.”

 

  미노타우르스 족장이 콧김을 내뿜으며 아쉽다는 듯 답했다.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자기 형제의 뒤통수나 치는 놈이라 그런지 남과 한 약속따윈 애초에 믿지도 않는 놈 같더군. 그 상황에서도 국경은 단단히 지키고 있었어.”

  “지지 세력은 와해되고 위상조차 땅에 떨어졌다면, 설령 그녀가 완전히 회복해서 돌아온들 이빨, 발톱 모두 빠진 짐승에 불과한데 왜 이런 회의를 연거지?”

 

  그 질문을 기다린 것처럼 동왕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만에 하나를 방지하기 위함이지요.”

  “만에 하나라고 하면?”

  “1년은 적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선홍의 마녀 아리오나. 그녀를 향한 지지는 기세가 확 죽었지만, 완전히 꺼지진 않았지요. 그녀의 추종자들 또한 대부분이 다른 세력에 회유 되거나 축출 됐지만, 적게나마 아직 존재하는 걸로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돌아오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거나….”

 

  목구멍과 폐마저 말라가는지, 거북이처럼 느릿하게 말하는 나가의 왕에게 미노타우르스 족장이 소리쳤다.

 

  “어휴 속 터져! 아난타 자네는 좀 물 속으로 들어가! 그러다 숨 넘어가겠어!”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아랑곳 않고 세이렌 아가씨는 담담히 생각을 말했다.

 

  “그녀의 생존 자체가 문제시 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는 게 최선이겠군요.”

  “지금 중요한 건 마녀가 어디 있냐는 건데… 첨성대에서 발견 했다고 했으니 동왕, 당신의 나라에 있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그는 안타까운 표정은 지으며 답했다.

 

  “알다시피 첨성대는 그 특성상 공중이 전문이라 일정 고도 이하로 떨어지면 관측할 수 없고, 또한 국제 조약으로 인해 남의 나라 영공을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유성처럼 빠르게 날아가던 속도와 각도를 계산해서 대충 어디쯤에 떨어질지 계산해 봤더니….”

 

  여기까지 말한 동왕은 시선을 돌려 낯빛이 창백한 은발의 남자, 뱀파이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편, 상공 80km 언저리에서 시작된 상준과 아리오나의 스카이 다이빙은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한 높이에서 자유 낙하라니, 이건 세이렌들도 못 해봤을거야! 어때? 너도 신나지?!]

 

  원래부터 하늘을 날 수 있는 종족답게 짜릿함을 즐기는 아리오나였지만, 몸의 주인인 소년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기절했네.]

 

  평범한 지구 출신 17세 소년은 하늘을 날 수도 없거니와, 낮은 온도로 인한 동사, 기압 차로 인한 질식사, 유성처럼 불타 잿가루 되는 걸 마법으로 방지한다 해도 지구로 치면 중간권에 해당할 높이에서 최소한의 안전 장비 없이 이뤄지는 추락은 그 자체만으로 의식을 잃을만한 일이었다.

 

  “어쩐지 갑자기 조용해지더라니….”

 

  적어도 이젠 온몸을 뒤틀면서 쌍욕하는 건 안 들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지. 그녀는 당장 깨워봤자 도움이 안 될 상준은 내버려두고, 코앞까지 다가온 문제를 우선하기로 했다.

 

  “이대로면 1분도 안돼서 저 건물 지붕을 들이받고 고깃덩이가 될거야.”

 

  아리오나는 날개를 꺼냈고, 마력을 역분사함과 동시에 주문을 읊었다. 이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확실히 이 이상은 없다 봐도 될 만큼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모고르의 딸 아리오나가 바라노니 그 어떤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방패를!”

 

  가장 큰 변수는 아리오나의 혈통이었다. 아무리 성공률이 높다한들 그녀 또한 포타스족이고, 포타스족의 마법은 항상 불발과 오작동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펑!

 

  강렬한 폭발이 지붕 위에서 작렬했고, 두 사람은 지붕에 난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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