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캉!
피로 만들어진 무구가 맞부딪쳤다. 내지른 공격이 족족 막히는데, 되려 즐거워 보이는 소녀.
“신이 났구나. 이렇게 막고만 있어도 제 풀에 지쳐 쓰러지는 게 먼저일지도.”
나름의 대답인 걸까. 해머의 크기가 무색하게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자신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기 위해 휘둘러지는 흉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남자. 돌연 나타나 소녀의 취미를 방해한 그의 이름은 요제프 포르가리츠. 포르가리츠가의 차남이자, 자신을 죽이려 드는 소녀의 오빠다.
-쾅!
지하에서 하도 난리를 친 통에 천장에 난 벽이 더욱 커졌다. 요리조리 피하다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달빛 아래까지 온 요제프. 힐끔 달을 쳐다본 그는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처럼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내 동생 마리나는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처음엔 그저 귀여운 여자애였다. 여느 아이들들과 다를 바 없이 호기심 많고 장난끼가 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우리 집안의 사랑스러운 막내.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마리나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용서해라.”
“히히히히히….”
마리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광기 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을 뿐. 의회에서 마리나의 인격을 봉인하기로 정했다. 잔인한 결정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족을 다섯이나 살해한 흉악범에게 남은 길은 사형뿐이었다. 자비로운 판결이었지만, 당연히 조건이 붙어있었다. 만에 하나 봉인이 깨지는 일이 생길 시 가족의 손으로 처리하고 수급을 증거로 제출하는 것.
“어째서 나온거냐.”
자신에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침을 모조리 쳐내며 한탄했다.
“어째서 숨지 않은거냐.”
채찍처럼 휘둘러진 기다란 꼬리를 피하며 탄식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은거냐.”
자신의 목을 노리는 마리나의 오른손을 베어버린 후 개탄했다. 요제프는 동생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칼날이 닿아 마리나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마리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싱글벙글 웃던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끼이익~
“아.”
처음부터 있었지만, 이야기의 지분을 배정 받지 못한 인물. 아리오나는 몇 초간 멀뚱멀뚱 서있다 돌연 부자연스럽게 감옥 문턱을 넘었다. 아무 일 없는 척 장소를 벗어나려나려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어떻게 나온 거지…?”
족쇄와 수갑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시선을 감옥으로 돌리자 마리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갑과 족쇄의 열쇠 구멍에 가느다란 꼬챙이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저 인종은 뭐지?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시체인 줄 알았는데…. 뭐, 나중에 심문하면 불겠지.”
말을 마친 요제프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발치에서 무언가가 솟아났다. 피로 만들어진 커다란 말뚝이었다. 간신히 치명상은 면한 요제프였지만, 그것은 애초에 그를 노린 게 아니었을 뿐더러 한두 개도 아니었다.
-쾅!
가시가 마구잡이로 박힌 천장과 벽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산 채로 파묻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다. 계단으로 향하는 자, 날아오르는 자, 땅 파는 자까지. 서로 다른 길을 택했지만, 그들은 지상에서 딱 마주쳤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이 묘한 분위기를 깬 것은 아리오나였다.
“둘은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 관련 없는 사람은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어딜 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날개를 꺼내 도망치는 아리오나와 뒤쫓는 마리나, 그리고 그녀를 쫓는 요제프. 추격전이 시작됐다.
‘젠장, 몸이 엉망이라 속도가 안 나.’
포션 덕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몸과 정신에 쌓인 피로 때문에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두 뱀파이어를 따돌리지 못하는 게 그 증거였다. 뱀파이어종은 피를 빤 생물을 베낄 수 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원본의 열화판 정도다. 날개를 배껴도 나는 건 새만 못하고, 지느러미를 달아본들 헤엄으로 물고기를 이기진 못한다.
-쨍그랑!
아리오나는 창문을 깨고 대저택 안에 진입했다. 그녀를 따라 두 사람도 망설임 없이 따라 들어왔다.
‘속도로 안 된다면 테크닉이다!’
장애물이 많은 공간에서 부딪히지 않고 나는 건, 비행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지. 처음부터 날개를 갖고 태어난 자와 아닌 자의 경험 차이를 무기로 삼은 아리오나.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남매가 여기저기 부딪치고 쓸리면서 그들은 아리오나와 점점 멀어졌다.
세 사람이 다시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아리오나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좋아, 이 상태로 아주 도망쳐주지!’
성공적인 도주 계획을 그리는 아리오나.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방해받기 전까진.
-파지직!
전신에 격통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어… 결계인가?!”
전기 파리채에 부딪힌 파리처럼 연기와 함께 추락하는 아리오나. 다행히 정신은 잃지 않았고 그 덕에 지면에 꼬라박는 건 면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추락사를 피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마지막 비행은 마음껏 즐겼나?”
“내 뒤에 있는 망할 결계만 없었다면 그랬겠지.”
“그런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도 그럴 게… 이녀석 마리나!”
“읍!읍!”
“버릇이 고약한 동생 때문에 실례했군. 그럼 우리 사이의 일도 마저 끝내볼까?”
구속된 채 발버둥치는 여동생을 적당히 던져놓은 요제프. 일상 회화를 나누듯 가벼웠던 분위기는 어디가고 그는 명백한 적의를 표출했다.
“백주 대낮에 백작령에 침입해 난동. 누가 무슨 목적으로 보낸 건지 붙잡아서 낱낱히 밝혀주마. 비열한 악마야.”
“하, 악마라. 들을 때마다 참 잘 만든 선동 문구란 말이지. 따로따로 덤벼서는 이길 수 없는 거대한 상대를 자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둔갑시키기 위해 너희 겁쟁이 연합이 얼마나 머릴 굴렸을 지… 참~ 못났다.”
“그래, 부디 심문실에서도 그렇게 나불나불 네가 아는 모든 걸 자백하길 바라겠다.”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붉은 검을 쥔 채 요제프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위대한 일족의 자손이 바라노니 바위보다도 무쇠보다도 단단한 갑옷을 주소서.”
주문을 마치자 아리오나의 몸에서 반딧불이 같은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방어 마법인가. 이런 상황에서 너희 종족의 너절한 마법 실력을 믿다니, 어지간히도 방법이 없었나보군!”
“너절한지 어떤지는 주먹에 맞아보고 생각하지 그래!”
호기롭게 달려드는 아리오나. 그것은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함이자 불안을 숨기기 위한 허세였다. 그녀의 걱정거리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방어 마법은 특기가 아니라는 것과 이쪽 몸 상태는 최악보다 살짝 나은데 반해 상대는 쌩쌩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싸움을 이긴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캉!
“뭐가 바위보다도 무쇠보다도 단단한 갑옷이냐. 요란한 주문이 부끄럽지도 않나?”
“생채기 하나 겨우 내놓고 큰소리 치는 건 안 부끄럽고?”
“그래, 피투성이가 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보겠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오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방어 마법이 깨져버린 것이다. 상처는 얕았지만, 몇 합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벌써 깨지기 시작하면 완파되는 건 시간 문제다. 막다른 골목이나 다름 없는 상황. 해결사가 절실한 이때 그녀의 피부에 익숙한 마력이 스쳤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만 들린 목소리.
“숙여.”
-탕!
쓰러지듯 몸을 낮추는 아리오나, 그와 동시에 그녀의 등 뒤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컥!”
사각에서의 공격은 유효했다. 요제프의 쇄골 근처에서 흘러나오는 혈액과 꿇어버린 한쪽 무릎이 증거였다. 하지만 유효타일지언정 결정타가 되진 못했다.
-탕!
끝장을 내기 위해 발사된 두 번째 총알이 요제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급소를 노리는 총알을 연달아 쳐낸 그가 말했다.
“동료가 있었나? 감옥 생활도 혼자 보단 여럿이 낫겠지.”
“하, 골골대는 게 뻔히 보이는데 허세는….”
맞도발을 던지는 아리오나였지만, 곧바로 그 말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제프의 몸이 점점 변했기 때문이다. 꼬리가 자라나고 근육이 부풀었으며 몸 여기저기에 가시가 자라났다. 당연히 그것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쇳전갈에 산미치광이, 만티코어… 짐작도 안 가는 것까지 합치면 열 종쯤 되려나?’
전갈 같은 꼬리로 자신을 향한 저격을 모조리 튕겨내는 요제프. 시선이야 다소 분산되겠지만, 양팔이 자유로워진 그가 무엇을 할 지는 뻔할 뻔 자 아니겠는가.
“자, 이제 정말 끝내도록 하지.”
다시금 성큼성큼 아리오나에게 다가오는 요제프. 온갖 짐승들을 섞은 듯한 모습은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아리오나는 당당히 맞섰다. 오른손에서 일렁이는 마력. 그것은 진검승부를 하려는 의지 표명이나 다름 없었다.
“마냥 도망만 다닌 건 아니라는 거군. 마력을 마지막 한 줌까지 쥐어짜내려는 것 같은데… 그걸 마냥 보고만 있을 것 같나!”
기다릴 것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요제프.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요격 준비 만반인 적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무방비 상태인 적을 노리면 되는 것이다.
“맞닿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맹화를!”
“갑자기 눈이라도 멀어버린거냐! 어딜 노리는… 설마?!”
이상한 방향으로 발사된 마법. 아리오나를 비웃던 요제프였지만, 그녀가 노리는 게 자신이 아님을 깨닫고 급히 방향을 돌렸다. 관성을 무시하는 경로와 단지 빠르게 움직이기 위한 무모한 신체 변형.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뒤틀리는 고통도 불사한 덕에 그는 늦지 않았다.
“크아아악!”
피부가 타오르는 고통에 비명 지를 지 언정, 여동생이 무사하단 사실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럴 것 같았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요제프는 바싹 구워졌다. 너덜너덜해진 채 잔디밭에 쓰러진 그는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어, 떻게?”
“동생을 보는 네 눈엔 살기가 없었거든. 확실하게 한 방 더… 윽!”
아리오나는 마력 고갈로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꼭 쥐었다. 그녀는 구속을 풀고자 발버둥치는 마리나에게 말했다.
“입장이 반대가 됐네?”
멍하니 자신을 보는 마리나에게 아리오나는 말했다.
“아~ 이걸 어떻게 요리해줄까. 지하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줘?”
마리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던져본 말이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울고 불고 난리가 치는 걸 보고 싶었지만, 역시나 이 계집애 제정신이 아니군.’
그저 공허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마리나에게 다가가 아리오나는 말했다.
“너는 나한테 굉장히 몹쓸 짓을 했지만, 나는 깔끔하게 끝내줄게.”
목격자만 정리하고 도주하려는 간단한 계획이건만, 이런 간단한 일조차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어이, 아가씨. 빨리 나와!”
위기의 순간 도와주었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응? 왜 그러는데?”
“사방에서 마력이 그쪽으로 모여들고 있어, 아마 백작령 병사들이겠지. 포위 당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나와!”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 직접 확인하고자 눈에 힘을 주는 아리오나. 결계 탓에 제대로 보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숫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빨리 끝내야겠네. 잘 가, 백작가 아가씨.”
아리오나가 쏜 불꽃이 마리나에게 닿으려던 그때, 마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상함을 느낀 아리오나는 위아래로 마리나를 훑었고, 눈에 익은 물건을 포착했다.
“또 이놈의 수갑, 족쇄가 문제네!”
‘이러면 마법으론 무리고, 맨손으로 죽이자니 몸 상태가 이래서 힘들고….’
결계를 뚫는 시간도 있으니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 결국 아리오나는 결단을 내렸다.
“너, 운이 좋구나.”
그녀는 마리나의 턱을 걷어찼다. 정확하고 강력한 타격. 맞자마자 마리나의 눈이 풀렸다. 기절한 걸 확인한 아리오나는 결계로 다가가 주문을 외웠고, 이내 그녀의 손은 보이지 않는 장갑을 낀 것처럼 마력으로 코팅됐다.
“자, 한 번 찾아보자~”
결계를 몇 번 더듬어보던 그녀는 씩 웃더니 어느 한 부분에 손을 집어넣어 결계를 찢었다. 찢어진 옷에 손가락을 넣으면 구멍이 커지는 것처럼, 결계의 약한 부분을 공략한 것이다. 다만, 백작 저택을 덮을 만큼 대규모 결계라 그런지 단단함이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한다는 선택지따윈 없다. 아리오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냈고 결국….
“나왔다!”
이어코 결계를 돌파한 아리오나.
“꼼짝 마라!”
결계 밖의 공기를 만끽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목에 겨눠지는 수많은 칼. 자신을 에워싼 뱀파이어들을 본 그녀는 생각했다.
‘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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