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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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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혹여나 햇빛이 들어올까 꼼꼼하게 커튼을 쳐놓은 어두운 방. 사방팔방에 쌓여있는 책더미로도 가려지지 않는 넓은 공간. 그 구석에 한 남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앉아있어도 숨길 수 없는 큰 키에 깡 마른 체형은 가뭄을 맞은 고목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보자… 이것도 못 쓰겠네.”

 

  작게 중얼거린 그는 손상된 책을 바구니에 담았다. 거의 다 채워져 가는 바구니 옆에는 가득 찬 바구니가 몇 개나 있었다. 다음 책을 펼쳐보려는 그때였다.

 

  “백작 대리! 플리데 백작 대리 계십니까!”

  “예, 문 열려있습니다.”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 플리데는 익숙하다는 듯 책을 펼치며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방문자. 깐깐할 것 같은 인상의 남자는 책더미에도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책을 살펴보고 있는 플리데의 등 뒤에 섰다. 그러고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 산더미 같은 책들은 다 뭡니까? 자고로 귀족이란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원로원의 늙은이들은 자기들 같은 꼰대만 부하로 뽑나? 어떻게 심부름꾼 마저 저러냐.’

 

  늘 그렇듯 은근하게 들려오는 시비조를 무시하며 플리데는 말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심부름꾼도 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 것 보면 원로원은 인원이 넘치나 봅니다.”

  “심부름꾼이라니! 듣기 거북하군요. 저는 4대째 이어지는 후작가의….”

  “예~ 아무렵요. 뭐든지 최고급을 선호하는 원로원에서 개나 소나 일을 맡기진 않을테니까요. 사담은 여기까지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흠, 일전 백작 저택 테러 사건의 범인들이 디제 산림으로 도망친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백작 대리님이 간곡히 부탁하셔서 원로원에서도 발 빠르게 움직였고, 그 덕에 중립지대에 수색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죠.”

  “이야, 그건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평소완 달리 굉장히 빨리 일을 처리해주셔서 저도 깜짝 놀랐지 뭡니까.”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하는 플리데와는 달리 표정이 점점 딱딱해지는 듯한 원로원의 심부름꾼.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백작 대리님도 그에 맞는 성과를 보여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범인이 있는 곳이 특정된 거나 다름 없는데, 일주일째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언성을 높이는 심부름꾼에게 백작 대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답했다.

 

  “누가 뭘 보고 그런 보고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닐 것 같군요.”

 

  반박이 있는 것 같았지만, 플리데는 선수를 쳤다.

 

  “범인들이 디제 산림에 숨어 있는 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디제는 동네 뒷산 올라가듯 별 생각 없이 들어갈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수백년간 중립 지역이었던 탓에 독자적인 생태계가 구축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동식물이 있을지 우리는 물론이고 타국도 모른다는 것이죠. 서두르면 될 일도 망치는 법입니다.”

 

  건조하게 객관적 사실만을 늘어놓는 그를 보며 심부름꾼은 생각했다.

 

  ‘이 자는 정말 나와 같은 종족이 맞나?’

 

  뱀파이어는 다른 종족에 비해 피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단순히 혈액 그 자체만이 아닌 부모나 형제, 혈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오죽하면 나라가 가문 중심의 귀족 사회로 돌아가기까지 할까. 이런 사회 속에서 플리데 포르가리츠라는 남자는 비정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작 대리께선 참으로 냉정하시군요, 귀공이 있는 한 포르가리츠가 흔들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언듯 칭찬 같지만 그 속에 담긴 건 극도의 꺼림칙함 이었다. 가족이 중태에 빠져 있는데도 저 무심한 표정은 뭘까. 일반적인 경우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경거망동을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원로원에서도 지금이야 말로 백작가의 약점을 잡을 타이밍이라 여기고 있을 정도다.

 

  “하하, 과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오늘로 끝입니다.”

  “그 말은?”

  “예, 오늘 밤 놈들을 잡을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고 돌아가려는 심부름꾼에게 플리데는 넌지시 말했다.

 

  “이번 일은 정말 이례적이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단 한 놈한테 백작 저택이 쑥대밭이 되다니 말입니다.”

  “아뇨, 원로원 말입니다.”

  “… 무슨 말이십니까?”

  “평소 같으면 방금처럼 적당히 실없는 말이나 하다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덮으려 했을텐데. 외교 같은 번거로운 일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고, 매일 같이 찾아와 독촉까지…. 누가 보면 변을 당한 건 원로원 쪽인 줄 알겠습니다. 사실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조곤조곤 의견을 말한 플리데에게 돌아온 것은 서슬퍼런 일갈이었다.

 

  “억측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원로원과 백작가의 사이가 나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서주었는데, 보답은커녕 의심이나 받다니! 포르가리츠가의 품격이 언제부터 이렇게 떨어진 건지….”

  “하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대리라곤 하지만 백작 같은 지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한 헛소리로 넘겨주십시오.”

 

  -끼익

 

  창문을 열고 멀어지는 심부름꾼의 마차를 보는 플리데.

 

  “역시 뭔가 있어.”

 

  표면상의 명분은 딱히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심부름꾼에게서도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묘한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캐내고 싶어도 단서가 너무 없다. 잠시 골몰하던 그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뭐, 오늘 밤이면 알게 되겠지.”

 

 

 

  한편 디제 산림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큰 나무가 즐비한 이곳에서도 유독 더 커보이는 이 나무엔 비밀이 있다. 겉보기엔 그냥 나무지만, 그 안은 두셋 정도는 지낼만한 공간으로 개조되어 있다는 것. 아는 자가 거의 없는 이 은신처에서 노골적인 불협화음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있잖아, 벌써 일주일이야.]

 

  아리오나는 자신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에 대고 말했다.

 

  [추적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순 없어.]

 

  묵묵부답. 돌아오는 답은 없고 그녀가 뱉은 말은 공허한 외침이 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쾅쾅!

 

  답답한 심정을 담아 아리오나는 벽을 두들겼다. 진짜 벽은 아니었다. 그녀를 거절하는 상준의 심정이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 너한테 제대로 설명 없이 끌어들인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데 솔직히 그렇잖아.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솔직하게 말해… 아야!]

 

  평평하던 벽에 가시처럼 뾰족한 돌출 부위가 생겼다. 간만에 느끼는 통증에 아리오나는 움찔했고, 벽 너머에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싫으니까 집어치워.”

 

  분노나 배신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이렉트로 느껴졌다. 이래서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실수였다.

 

 

 

  백작 저택을 탈출한 그날, 나는 그리운 얼굴을 만났다.

 

  “어떤 명사수가 날 도와주나 했더니 역시 너였구나.”

  “살아계셨군요! 이 레프리콘 바트가 주군을 맞습니다.”

  “오늘 이름은 바트인가 보구나. 근데 남사스럽게 왜 이러는거야, 너답지 않게.”

 

  답지않게 온갖 예를 갖추는 그에게 놀란 나는 그것보다 더 놀라운 현실을 마주했다.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의 생존을 확인 했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이동하면서 듣도록 하지.”

 

  은신처로 도망치던 중 그의 입에서 나온 정보들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내가 고작 수십 분 가량 지구에 갔다온 사이, 파라니아에서는 1년이 지나있었다.

 

  “저는 연합국에 파견 나와 있었기에 화를 피했지만, 제국 현지에 있던 공주님의 지지자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른 세력에 흡수됐습니다.”

  “그래, 아주 작정하고 날 묻어버리려 했으니 그런 준비도 철저히 하고 있었겠지.”

 

  그것들이 나를 포위했을 때 말했지. 더러운 배신자, 반란 분자라고. 아마도 내가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미리 만들어 놨을거야. 단순 실종이었어도 1년이면 조직은 벌레 먹은 사갸 꼴이 날텐데, 반란을 꾸미다 걸린 조직은 말할 것도 없겠지. 나에게 씌워진 누명은 나를 지지하던 이들한테까지 씌워졌을 게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에단 경이나 트룹, 피피스처럼 공주님의 측근 중에도 목숨은 건진 경우도 있고, 공주님의 영지인 치하야스를 두고 파기디 왕자와 카를린 공주 사이가 험악해졌답니다. 그 사이에 낀 영지민들은 공주님이 다스리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더군요.”

  “준비를 어떻게 잘 하면 영지도 되찾고 역습을 할 수도 있겠네. 일단은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긴 한데….”

  “그렇지요. 거기다 공주님의 형제들이나 연합의 우두머리들은 아직까지도 공주님의 털끝 하나라도 찾으려고 물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계시다는 게 밝혀진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 참 쉽지 않네.”

 

  ‘그러게.’

 

  [너 언제부터 일어나 있었던 거…!]

 

  머릿속에서 들려온 대답에 놀란 아리오나. 상준이 깨어났음을 확인 했을 때는 이미 몸의 제어권을 빼앗긴 뒤였다.

 

  “왜? 꽁꽁 숨겼어야 할 게 드러나니 좀 찔려? 하, 새 인생 새 출발 이딴 소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공주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딴 사람처럼 변한 아리오나에게 말을 걸어보는 바트였지만, 돌아오는 답은 건들면 베일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었다.

 

  “어이, 아저씨. 아무래도 내 안에 있는 사기꾼 부하인 것 같은데, 난 댁들이 뭘 꾸미던 엮이고 싶지 않으니 여기서 서로 갈 길 갑시다.”

 

  애써 성질을 죽이고 발걸음을 옮기는 상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구토감이 찾아왔고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만한 고문을 당하고도 이상하게 멀쩡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금방 극복할 리가 없지.]

 

  눈물 젖은 흰자만 떠있던 안구에 생기가 돌아왔다. 몸의 제어권을 되찾은 아리오나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었지만, 그의 신하는 못 본 척 할 마음이 없는 듯 했다.

 

  -탁

 

  은신처의 문을 닿자마자 바트는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어라~ 갑자기 호칭이 낮아졌네?”

 

  한 번 의심 하기 시작한 이 레프리콘은 멈추지 않았다.

 

  “그 빈약한 인간종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땐 지지리 못하시던 변신 마법이라도 습득하셨나 싶었습니다만, 지금 상황 돌아가는 걸 보아하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네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신겁니까?”

  “그게, 전에 내가 얘기했던 고대 마법 있잖아….”

 

  사정을 들은 바트는 당장이라도 미치고 팔짝 뛸 것처럼 흥분했다.

 

  “기어코 그 정체도 알 수 없는 마법을 자기한테 실험했냐?! 그렇게 말렸는데 독하다 독해!”

  “야, 방법이 없었다고! 그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죽었어야 했냐고!”

 

  자신의 붉은 머리칼만큼이나 얼굴이 빨개진 바트는 용케 이성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후, 검증 안된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단순히 그 자리에서 즉사하면 다행이고, 이성 없는 괴물로 변하거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어. 새 마법 만들겠다고 실험하다 사고난 현장에 가면….”

 

  분노의 설교가 시작될 조짐이 보이자 아리오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알아~ 알아~ 다 아는데! 지금 날 봐. 내가 괴물 같아보여? 아니면 죽지 못해 겨우 살아있는 것 같아? 결과가 좋았으니 괜찮잖아.”

  “아니…!”

 

  욕을 박는 건 전말이 밝혀지고 나도 늦지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달래며 목끝까지 차오른 욕설과 분노를 억누른 바트.

 

  “그래, 팔팔해 보이니 실패는 아니라고 치자. 근데 꼴이 그게 뭐야. 네가 나한테 설명했을 땐 그런 마법이 아니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책에 써있던 바로는 나랑 합쳐지는 존재는 인격이 소멸하거나, 나한테 복종해야 되는 게 맞거든? 이세계인한테 걸어서 그런건지 상준이 이상한 건지… 아, 상준은 이 육체 주인의 이름이야.”

  “그럼 현 상황을 종합해보면 넌 지금 상준이라는 지구인과 합쳐졌는데, 몸 주인의 의식이 없을 때만 나올 수 있게 됐다는 거네?”

  “합의하에 교체할 수도 있어.”

  “에라, 자랑이다!”

 

  결국 폭발한 바트. 한참 이어지던 욕설의 쓰나미를 멈춘 건 하나의 질문이었다.

 

  “야,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진정 좀 해보라고! 이제부터 어떡할 건지 계획은 있어?”

 

  열 받은 야차 같던 그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긴 했지만, 바트는 손가락을 두 개 펴더니 말했다.

 

  “후, 일단 제국으로 돌아가야겠죠. 그래야 세력을 다시 뭉치든 말든 할테니. 그래서 갈만한 곳은 두 곳입니다. 남쪽과 북쪽.”

  “항구를 이용해서 가는거네.”

  “북쪽의 한델항과 남쪽의 뱌파르 항구, 제국과 연합 사이를 무사히 지나다닐 수 있는 곳은 이 두 곳 뿐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배에 타려고? 거기 검문 무지 엄중하잖아. 애초에 여기서 어느쪽으로 가든 엄청 멀기도 하고.”

  “신분을 만들어 내는 거라면 남쪽이 간단하고, 배에 탑승하는 건 북쪽이 더 간단하죠.”

 

  앞으로의 계획을 척척 세워나가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걸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남쪽이고 북쪽이고 누구 맘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거냐?”

 

  두 번째이기도 하고, 아리오나에게 어느정도 사정을 들은 뒤였기에 바트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상준, 이라고 했나? 다같이 살자고 하는 일이니 너도 협력해줬으면 하는데.”

  “다같이 같은 소리하네. 너네 좋은 일이겠지.”

  “그럼 넌 내가 제시한 것보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아니.”

 

  너무나도 당당한 노 플랜 선언에 순간 말문이 막힌 바트. 그는 어이 없는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으면 얌전히 계획에 따라줬으면 한다만.”

  “언제까지?”

  “뭐?”

  “언제까지 너네들의 그 계획이란 거에 따라 움직여야 하냐고. 이 첩첩산중을 벗어날 때까지? 아니면 북쪽이든 남쪽이든 가서 배에 탈 때까지? 그것도 아니면 내 몸에 안에 있는 이 여자가 자기 세력을 모아서 복수까지 싹 마치면 끝인가?”

 

  ‘이 자식 의식 없는 척 전부 듣고 있었나.’

 

  어설픈 거짓말은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거라 판단한 바트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맞다. 언제까지가 될지 기약 같은 건 없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빈 말로도 좋다고 할 순 없다. 복수는커녕 이 디제 산림에서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지.”

 

  기가 막히는지 이마를 부여잡는 상준에게 그는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거지? 얼마 뒤면 추격이 올텐데 병사들한테 잡혀 죽는 운명을 받아들일건가? 아니면 우리의 계획을 따라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쪽으로 가볼건가?”

 

  ‘이 새끼가?’

 

  상준은 울컥했다. 내 말 잘 들으면 살려는 줄테니 얌전히 굴어라. 그런 식의 협박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자기를 털어먹으려는 사기꾼으로만 보이는데, 이젠 아예 목숨을 위협받자 상준의 배알은 제대로 꼴려버렸다.

 

  “배째.”

  “뭐?”

  “배짼다고 인마. 난 너 못 믿어. 죽든 말든 여기 자빠져 있을거야.”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아니면 미친 건가? 한 시가 급하게 흘러가는데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좆까라고.”

 

  다급해 보이는 바트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린 상준. 그는 주먹을 들어올리더니 중지를 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일주일째가 되었다. 7일, 168시간 동안 한 지붕 아래서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동고동락하다 보니 자연스레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 악화됐다.

 

  -쾅!

 

  “아이고~ 문 부숴지겠다. 난쟁이가 성질은….”

 

  심기가 불편한 것을 감추지 않는 레프리콘을 향해 상준이 비아냥거렸다.

 

  “어이, 나한텐 바몬이라는 이름이 있다!”

  “어제는 하눈, 그제는 필소쉬, 그끄저께는 아준이었고 말이지. 아니 무슨 이름이 매일 바뀌냐고. 뭐 이딴 종족이 다 있는지~”

  “이젠 하다하다 종족을 욕보이는 거냐?!”

 

  -철컥

 

  어깨에 매고 있던 총을 장전해 겨누는 바몬. 그 모습을 본 상준은 콧방귀를 뀌더니 눈을 슬며시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건 그가 아니었다.

 

  “바몬 미안해. 내가 꼭 설득할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줘.”

  “공주….”

 

  주군의 간절한 부탁에 차마 더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총을 내리는 바몬.

 

  “화 좀 줄이고 살아~ 네 주인까지 쏴죽이겠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아무렴요~”

 

  엄포를 놔도 들은 척 만 척 다가온 상준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 또 토뀌야? 오늘은 생선이 먹고 싶은데.”

  “산 속에서 물고기를 어떻게 잡겠냐!”

  “없으면 말고~”

 

  -빠드득

 

  대놓고 성질을 긁는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가 갈리는 바몬. 처음 2,3일은 경계할지언정 이렇진 않았다. 문제는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확신한 다음이었다. 그 후부터 상준은 때릴테면 때려보란 식으로 도발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때 결판을 냈어야 했는데.’

 

  5일째, 참다 못한 레프리콘은 상준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다음 짊어지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생존의 위협을 느낀 상준이 마법 재능을 개화 시켜버렸고, 두 사람 사이에 피바람이 불려던 찰나 아리오나의 중재로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그렇지만 이후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다.

 

  “달이 밝구나. 구름이 없는, 밤하늘 보기 좋은 날을 넌 참 좋아했지.”

 

  창가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플리데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침대에 누워있는 동생 요제프를 향했다. 부상 자체도 중상이었지만, 모두가 범인 추적에 정신 팔린 사이 치료가 늦은 게 더 크게 작용했다.

 

  “… 이 녀석이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가족 중에서 널 제일 아꼈다. 항상 네가 속박되어 살아가는 걸 안타까워했지.”

 

  누굴 향해 하는 말일까. 플리데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널 잡지 않겠다. 가족으로서 마지막 정이다. 두 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 시간부로 마리나 포르가리츠라는 이름은 우리 가문에 없는 이름이다.”

 

  한순간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나타났다 금새 사라졌다.

 

 

 

  같은 시각, 디제 산맥 꼭대기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아아악!!”

 

  함정에 발목이 잘린 병사가 소리쳤다. 그의 성량은 제법이었지만, 주변에 자신을 어필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병사들이 한 무더기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탕!

 

  “컥!”

  “한 눈 팔지마! 부상자는 작전이 끝나면 한꺼번에 수습한다. 자기 몸 지키는데 집중해라!”

 

  고지대에서 날아오는 저격은 뒤를 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대장, 준비 끝났습니다.”

  “생포가 힘들면 죽여도 상관 없다는 허가를 받았다. 적을 아주 으깨버려라!”

 

  지휘관에 명령이 떨어지자 우락부락하게 변해있던 뱀파이어들은 일제히 바위를 던졌다.

 

  -쾅!

 

  수많은 바위에 얻어맞은 은신처가 뿌리 뽑힐 것처럼 흔들렸다. 창문가에서 적들을 노리고 있던 바몬이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이제 만족하냐?!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는데, 여기서 다 죽게 생겼다!”

 

  ‘설마 진짜로 올 줄이야.’

 

  상준은 꽤나 당황했다. 며칠이 지나도 적은커녕 비슷한 것도 안 보이니 또 거짓말이겠거니 싶었다. 일주일이면 저 멀리 도망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이제서야 추격해 올줄은…. 달빛 아래서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적들에 위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멍청하게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지 않은 자가 바란다. 나의 적에게 밤바람보다도 서늘한 일격을!”

 

  ‘마법? 어디 지구 촌뜨기 실력 좀 볼까.’

 

  주문을 마친 상준은 부서진 벽 틈새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반 뼘 정도 되는 얼음덩어리가 발사됐다. 크기는 대단찮았지만, 기관총을 쏘듯 무수한 탄환을 갈기는 모습은 그의 앙숙인 바몬마저 놀라게 했다. 한순간이었지만 말이다.

 

  -퍽!

 

  “아얏!”

 

  이마에 얼음이 명중한 뱀파이어가 신음을 흘렸다. 상관으로 보이는 뱀파이어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조심해라. 눈덩이 수준이라 살상력은 없지만, 얼굴에 맞으면 제법 아프니까.”

 

  직선거리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갈아버릴 것 같은 기세로 날아갔지만, 실질적 피해는 한없이 0에 가까웠다. 안구에 맞지 않도록 얼굴을 더 가리면 그만인 수준의 공격은 아군의 얼을 쏙 빼놨다.

 

  ‘여기 온지 이제 일주일 된 놈이 뭘 해줄거라 생각한 내가 등신이지.’

 

  소용도 없는 마법을 꾸역꾸역 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차마 욕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하던대로 저격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그때였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여, 너를 짓밟는 자들의 발걸음을 방해하라.”

 

  -콰직!

 

  “아악!”

 

  발바닥이 관통된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흩어진 얼음 조각들이 날카롭게 변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대장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안되겠다, 비행 가능한 인원은 날개를 꺼내라!”

 

  -탕!

 

  “어딜 쉽게 오려고 날개를 꺼내나 꺼내기는.”

 

  날아오르는 표적을 놓치지 않고 저격하는 바몬. 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중 주문이라니! 상당히 어려운 건데, 제법 하잖아.”

 

  상준을 만나고 나서 처음 하는 칭찬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사자는 듣지 못했다.

 

  -털썩

 

  “뭐야, 왜 그래?!”

 

  돌연 쓰러진 상준을 향해 소리쳐 보지만 대답하는 건 다른 사람이었다.

 

  “마력 중독 같아보이네.”

  “오늘은 자주 뵙네요, 공주님. 그런데 마력 중독이요? 그거 애기들이 마법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나 보이는 증상이잖습니까.”

 

  어떻게든 일어서보려 하지만, 몸 상태가 영 아닌지 아리오나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상준이 살던 곳은 마력이나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어. 그러니까 저쪽 세상에선 마법이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허상 같은거지.”

  “그럼 이 애송이는 대체 어떻게 마법을…?”

  “글쎄. 나도 다른 세상 사람은 처음 봐서 말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 대충이나마 예상해 보자면, 난생 처음 접해보는 마력이라는 불순물을 몸이 거부하는 걸지도.”

  “그러니까. 이세계인이 마력 중독으로 추정되는 증상을 보이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사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죠?”

  “정답.”

 

  눈을 찡긋거리는 아리오나를 보자 관자놀이가 뻐근해지는 걸 느끼는 바몬.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이렇게 된 거 원래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다.

 

  “흔들립니다.”

 

  쓰러져 있는 아리오나를 냉큼 들쳐매는 바몬. 깜짝 놀라 귀여운 비명을 지른 아리오나는 머쓱 했는지 장난식으로 위협했다.

 

  “감히 공주의 엉덩이를 만지다니 이거 원래라면 사형감인 거 알지?”

  “남자 엉덩이를 만진 죄로 사형 당할 바에야 차라리 혀 깨물고 죽겠습니다요.”

  “몸은 남자지만 마음만은 소녀거든~”

 

  차마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바몬. 그는 바위산을 넘나다니는 산양처럼 폴짝폴짝 뛰며 산을 내려갔다.

 

  “저기, 놈들이 도망친다!”

  “놓치지마라!”

 

  대놓고 도망치는 두 사람을 보고 마음이 급해진 뱀파이어들이었지만,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덫에 걸리는 인원만 늘어났다. 이대로 유유히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하지만 세상사 어디서 무슨 방해가 들어올지 모르는 법이다.

 

  -퍽!

 

  쌩 하고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몬의 옆구리가 뜯겨나갔다.

 

  “컥!”

  “괜찮아?!”

 

  예상치 못한 일격에 바몬은 중심을 잃었고, 두 사람은 산비탈을 굴러떨어졌다.

 

  “당신들은 오늘 여기서 죽는 거에요.”

 

  피가 뚝뚝 흐르는 살점을 씹으며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 아름다운 금발과 대조되는 섬뜩한 눈빛은 오로지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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