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그는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이대로 도망치기만 하면 끝이라는 생각에 너무 마음을 놓은 결과가 이 꼴이다.
“공주님!”
몸을 날려 보았지만 손은 허공을 가를 뿐…. 그는 오늘만큼 자신의 땅딸막한 몸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에게 부족한 건 길쭉한 팔다리만이 아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걸 막아줄 날개 또한 없었다.
-퍽!
낙법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레프리콘의 이마는 돌부리와 격한 만남을 가졌다. 정신이 혼미해졌고, 주마등처럼 자신의 삶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갓난아기일 때 버려진 그는 고아원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문제는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였다. 매일 다른 이름을 대는 걸 보고 레프리콘이라는 걸 알게 된 고아원은 그를 쫓아냈다. 레프리콘이 뭔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옛다, 오늘 삯이다.”
해가 뉘엇뉘엇 져갈 때쯤 찾아온 농장주는 소작농들에게 일당을 나누어줬다. 남들에 비해 확연히 적은 일당을 받은 나는 따져 물었다.
“아저씨, 저만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농장주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여기 토박이니까 상관 없지만, 넌 언제 내팽개치고 도망갈지 모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루 종일 중노동하고 이건 좀….”
“싫으면 내일부터 오지마!”
“아아! 알았어요!”
획 돌아서는 농장주를 붙잡으며 나는 내일도 잘 부탁한다며 굽신거렸다.
‘에이, 남은 머리도 싹 다 빠져버려라.’
신용이 없는 종족, 재주 부리는 난쟁이, 열에 아홉은 사기꾼. 레프리콘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다. 뭐 하나 좋은 소리가 없다. 종족 차별적인 과장이 섞여 있는 말이지만,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또 아니라는 게 문제다.
“에휴~ 머리털이라도 싹 다 밀어버릴까?”
레프리콘의 특징 중 하나가 붉은 체모이기 때문이다. 괜히 머리를 벅벅 긁다 나는 마저 발길을 옮겼다.
파라니아에 13종의 지성체가 있다는 건 상식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건 교묘한 거짓말이다. 나라를 이룰만큼 쪽수가 많은 종족이 13종인 것이다. 레프리콘 같은 소수 종족을 전부 합하면… 모르긴 몰라도 손가락 발가락 다 써도 부족할 것이다. 생김새도 전혀 다르고 별 다른 접점도 없지만, 소수 종족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먹고 살기 팍팍하다는 거다.
“으~ 힘들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우리 집. 낡디 낡은 폐가에 해먹 하나만 덜렁 있는 게 끝이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인구가 적다는 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힘이 부족하면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지 못한다. 그건 곧 이 넓은 세상에서 영원히 외지인이라는 뜻이다. 무리지어서 또는 홀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생활. 어딜 가도 눈치를 봐야하고, 같은 일을 해도 적은 보수를 받으며, 사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의심 받는다.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기댈 곳이 없다.
-짤랑짤랑
배개를 흔들자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리.
‘조금만 더 여비가 모이면 여기도 떠야지. 이번엔 북쪽으로 가볼까?’
떠날 생각에 들뜬 것도 잠시, 고된 노동으로 지친 탓에 순식간에 잠들었다.
소수 종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가해지는 부조리. 억울하다는 말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은 돌발 행동의 방아쇠가 되기 충분했다. 착하게 살든 나쁘게 살든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당장 배부를 수 있는 선택을 하는 이가 생기는 것도 당연할지도. 다만, 행동의 결과는 저 멀리 동쪽 끝, 서쪽 끝의 이름 모를 동포에게까지 닿는다.
-끼익
오래된 폐가의 문은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큰 소리가 났다.
“타오 형님,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되요?”
겁 먹은 듯한 동생의 목소리에 타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아이씨! 여기까지 와서 징징댈래?! 네가 그랬잖아, 저 뻘건 놈이 돈은 따박따박 받아가는데 쓰는 꼴을 못 봤다고. 분명 어디에 감춰놨을거야.”
“감춰놓은 걸 무슨 수로 찾아요.”
“주게 만들면 되지.”
“이거 그, 뭐냐, 도둑질 이잖아요.”
우물쭈물거리는 동생을 보며 타오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도둑질이라니? 그건 사람한테나 적용되는 거고. 저거 소수종이잖아. 걔네들이 얼마나 질이 나쁜지 알아? 강도에 강간, 사기, 살인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다닌다고.”
“근데 쟤는 아직 아무짓도 안 했는….”
소리 지르고 싶어 안달난 표정으로 동생의 말을 끊는 타오.
”야, 당하고 나서는 늦잖아! 살인나고 저 놈 잡아봤자 죽은 사람이 돌아오냐? 일 터지기 전에 미리 족쳐야 할 거 아니야. 돈은 그냥 덤이고. 좋은 일 했으면 수고비 정도는 챙겨도 되는 거야.”
말을 마친 타오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며 다가간 그는 레프리콘을 덮쳤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 난쟁이 새끼야.”
“에? 누, 누구… 억! 왜 이러세요!”
-퍽!
예고 없는 폭력에 반항 한 번 못하고 두들겨 맞는 레프리콘. 열 대쯤 때렸을까. 주먹을 거둔 타오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이 좆만한 새끼야. 떠돌아다니는 새끼를 마을에 받아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흉계를 꾸며?!”
레프리콘은 피가 섞인 침을 흘리며 어눌한 투로 말했다.
“자는 사람 덮쳐놓고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무슨 소리? 아, 진짜 이 새끼 안되겠네. 내가 다 듣고 왔는데 발뺌을 해?”
“악!”
복부를 제대로 맞은 레프리콘. 숨 쉬기도 힘든 그에게 타오는 윽박 질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려다 아직 일이 터지지 않았니까 이 정도로 봐준다. 해 뜨기 전까지 마을에서 나가라.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이라도 들리면 넌 나한테 죽는거야.”
“아… 알겠, 습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레프리콘의 목이 칼에 닿았고,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저, 저기 칼을 치, 치워주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는데.”
“어, 그래 칼 치워줄게. 계산 끝나면.”
“예? 무슨 계산을…?”
타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뭐긴 뭐야. 죽어 마땅한 너를 내가 살려줬으니까 목숨 값 내야지.”
동맥 근처를 서성이는 서늘한 날붙이는 반박이나 변명을 받을 맘이 없어 보였다.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하, 이놈보게. 사람 죽이려 했던 놈 아니랄까봐 목숨으로 저울질을 하네?”
“예? 하지만 얼마인지 알아야 돈을….”
“야 이 새끼야! 넌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냐?”
레프리콘의 말을 끊으며 타오는 일갈했다.
“세상 어떤 것도 죽으면 아무 소용 없는데, 비할 데가 있겠냐고.”
뭐라 대꾸하지 못하는 레프리콘에게 그는 본심을 전했다.
“다 내놔. 네가 이 동네에서 번 거, 원래 갖고 있던 거 전부 다.”
레프리콘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텅 빈 눈을 한 그는 폐가의 문턱을 가리켰다.
“… 그 아래에 제 전재산을 묻어놨습니다.”
“야, 파 봐.”
타오의 명령을 듣자마자 동생은 삽질을 시작했다. 파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꾸러미가 나왔다.
“형님, 이거 맞습니다. 와… 이게 다 뭐야. 형님 이런 것도 있어요!”
남자는 보따리 안에서 보석을 꺼내 보였다. 엄지 손가락만한 붉은 보석에 입이 쩍 벌어진 타오는 싱글벙글 이었다.
“햐~ 내가 뭐라 했냐 이 새끼 분명히 뭐 있다고 했잖아.”
그는 칼 옆면으로 레프리콘의 뺨을 툭툭 때리며 말했다.
“야, 너 딴 데서 도둑질 했지? 쥐꼬리만한 일당이나 받는 주제에 어떻게 저런 걸 가지고 있냐고.”
“그거 적당히 만지작거리는 게 좋을텐데.”
“어라 이거 빛나네…?”
“늦었어.”
-뻥!
순식간이었다. 보석이 빛나는가 싶더니 폭발했다.
-풀썩
남자가 쓰러졌다. 보석을 만지던 오른손과 머리의 반이 날아갔으니 즉사일 것이다.
“야, 엄호. 백엄호!”
동생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땅바닥에 흘러내린 뇌수가 식어갈 뿐이었다. 충격적인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오. 그런 그의 귀에 들려오는 차가운 음성.
“애틋한 척 하지마라. 역겨우니까.”
“이새끼가 미쳤나!”
눈에 뵈는 게 없어진 타오가 칼을 치켜들었지만, 레프리콘은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입 안에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이물질이 목젖에 닿자 반사적으로 콜록거리는 타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명운을 가르기엔 충분했다.
-퍽!
호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타오의 안면이 폭발했다. 눈, 코, 입이 사라져 이마부터 아래턱 사이가 휑해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영원히 침묵하는 것뿐.
“에이씨, 일정 당겨야 되잖아.”
타오의 시체를 발로 찬 레프리콘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제 이 마을에 있기는 글렀다. 최대한 빨리 보는 눈이 없을 때 빠져나가야 한다. 누가 가해자인지, 정당방위였는지따윈 중요치 않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대등한 사이일 때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끼익
혹여나 보는 눈이 있을까 주변을 살핀 레프리콘은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처음엔 길로만 가던 그였지만, 점점 험지로 들어갔다. 숲속을 걷기 시작한지 1시간이나 지났을까. 돌연 발걸음을 멈춘 그는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우연히 가는 길이 같았다는 소린 안 하겠지?”
“이야~ 마력도 숨기면서 따라온 건데 감이 좋네. 언제부터 알았어?”
저 뒤쪽에 있는 나무 뒤에서 2인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탓에 키 차이가 제법 난다는 것 외의 인상착의는 알 수 없었다. 큰 쪽과는 달리 작은 쪽은 제법 수다스러웠다.
“너흰 누구냐, 왜 내 뒤를 밟는거지?”
“질문은 이쪽이 먼저였는데.”
“… 이 이상 따라오면 험한 꼴 보게 될 거다.”
“폐가에 있던 두 사람처럼?”
분위기가 식었다. 애초에 썩 좋은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이젠 아예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썰렁해졌다.
“어때~ 대화할 맘이 좀 들었을까나.”
-펑!
대답 대신 돌아온 건 폭발하는 보석이었다.
“공주… 아니, 그, 얘야 괜찮니?”
“예, 괜찮아요. 그나저나 소수 종족의 마법은 처음 봐서 신기하네요.”
남자는 레프리콘이 서있던 자리를 보며 말했다.
“꽤나 잽싼 것이 잡으려면 고생 좀 하겠네요. 아니, 하겠구나.”
“저기요 할아버지. 너무 대놓고 수상해보이잖아요. 적진에 정찰 온 갑첩이라고 동네방네 소문 낼 일 있어요?”
소녀의 지적에 남자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란 말입니다.”
“할아버지랑 손녀인 척 하자고 한 건 에단공이잖아요… 에휴,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고 지금은 아까 그 레프리콘이나 쫓아가죠.”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로브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 난 뿔과 날개는 그들의 정체를 알기 쉽게 드러냈다. 그렇게 시작된 추격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당신, 이름은?”
제압 당해 버둥거리는 나에게 여자는 자신의 선홍빛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레프리콘.”
“종족명 말고 이름 말이야.”
“… 가른.”
“좋아. 가른, 스파이 해볼 생각 없어?”
200년이 넘게 방랑자로 지내던 나에게 처음으로 소속이 생기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두 사람과 함께 모고르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 후 몇 년간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신체 단련은 물론이고, 고문을 견디는 훈련은 한순간이나마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몸만 힘든 것도 아니었다. 경제, 사회, 교양 기타 등등… 글자도 잘 모르는 나에게 온갖 지식을 가르쳤다.
‘아, 도망가고 싶다.’
매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맛있는 식사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꼬박 나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안녕, 가른!”
“그게 언제적 이름인데… 오늘은 토레나야.”
아리오나.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쯤 강제로 제국에 끌려왔을 땐 솔직히 두려웠다. 최전방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여기저기 떠돌며 들은 소문은 끔찍했기 때문이다. 살육을 즐기고 적의 피를 마실 때 희열을 느낀다는 악마들 이야기. 제국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도 안 남을만큼 잔혹하다는 둥…. 혹여나 그 말이 사실일까 겁이 났다.
“오늘도 날씨가 맑네.”
“그러게, 훈련하기 딱 좋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생긴 것도 다르고, 쓰는 말이나 문화도 달랐지만,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렇다. 여기서도 소수종은 소수종일 뿐이었다. 나를 보는 제국인들의 시선은 연합국의 다수종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사람만 빼고. 세계의 반을 영토로 삼고 있는 제국의 공주.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그녀가 나를 그저 나로 봐주었다.
“이놈, 토레나! 공주님께는 항상 경어를 쓰라 하지 않았느냐!”
“단 둘 뿐이었으니 너그럽게 봐주시죠. 에단공.”
“트룹, 자네는 너무 물러. 황궁에선 어디에 귀가 있을지 모르는 법이네.”
한 명이 두 명, 세 명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동료가 생겼다. 근엄하게 이야기하는 노인과 흘려듣는 청년의 모습을 보며 웃는 소녀. 그들과 울고 웃으며 나는 혼자가 아닌 삶의 따뜻함을 알게됐다. 이들이 공주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모였다는 걸 알게 된 후, 나 역시 그 일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기에.
다년간의 가혹한 훈련을 모두 수료한 레프리콘은 마침내 현장으로 파견됐다. 소수 종족의 이점을 살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철저한 일처리 덕에 그의 평가는 날로 올라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신뢰도 높은 요원에게 일감이 몰렸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으로 3년만에 가지는 티타임도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얼마나 걸려?”
“글쎄, 가보기 전엔 모르겠네.”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나지막히 아리오나 중얼거렸다.
“항상 고마워. 내가 좀 더 힘이 있었으면, 첩보부가 내 소관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너도….”
“으으… 소름 돋아. 공주님 안 어울리게 청승을 떠시니 댥살이 돋습니다요~”
상당히 부끄러웠는지 아리오나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흥! 빨리 작전지로 가버려!”
“몇 년 뒤에 볼지 모르겠지만, 그땐 황제가 되어만나면 좋겠네.”
“다음 번에 가른이 날 보는 건 내 대관식 날일거야.”
“그 말도 몇 번째인지~”
“아, 이번엔 진짜라고!”
“아무렴요~ 그리고 오늘 이름은 파랼입니다.”
날아오는 과자를 재주좋게 받아먹으며 레프리콘은 자릴 떠났다. 이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티타임이 될 줄도 모른 채. 소식을 들은 건 두 달 뒤였다. 평소처럼 위장 신분으로 생활하던 중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문구를 본 것이다.
“선홍의 마녀, 사살…?”
레프리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달이다. 단 두 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그는 즉시 방으로 돌아가 비밀 장소에 숨겨둔 물건을 꺼냈다. 낙서가 그려진 남루한 천쪼가리처럼 생겼지만, 사실은 일부러 그렇게 만든 주문서였다. 아리오나가 최측근들에게만 나누어 준 비상 연락망이지만, 지금은 생겨 먹은대로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이 기사 보셨습니까? 가는 곳 마다 이 얘기로 어수선한데 본부에선 무슨 말 없어요?”
하는 수 없이 첩보부 연락책과 접선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그 기사대로다. 정확히는 연합국이 아닌 우리 쪽에서 즉결 처분 했다더군. 반항이 심했다고 들었다.”
“아니, 황제폐하 시해 및 반란 모의라니… 그것도 그건데 즉결 처분이라뇨! 재판은요?”
“반역자는 저항할 경우 현장에서 사살하는 것도 허용되어 있다.”
“증거! 증거는 있답니까?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그건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자네는 본인 걱정을 하는 게 어떤가. 3황녀가 죽고, 그녀와 가까운 인물들이 모조리 수사 받고 있어. 자네는 그쪽 파벌 핵심 인물인 에단경과 안면이 있었지? 당장은 본국에서 호출하지 않은 모양인데, 돌아가면 반역자로 몰리지 않게 처신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대충 감이 왔다. 이건 함정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리오나 공주 세력을 뿌리 뽑으려는 계략이야. 사전에 계획한 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 연락책은 수사라고 했지만, 고문과 회유가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도망치자.’
나는 그날로 잠적했다. 33년간 근속한 직장을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는 게 아쉬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리오나와 만날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테니까. 그렇게 믿으며 나는 다시 떠돌이의 삶으로 돌아왔다. 첩보부의 추격을 피하고, 아리오나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콧속을 채우는 비릿한 흙냄새와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혼미한 정신을 현실로 끌고왔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을 틈이 없다. 공주님의 신변이 위협 받고 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아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비극은 한 번으로 족해!’
“그때 날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해라.”
마리나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끝으로 상준의 심장을 노렸다. 내질러진 손끝이 피부에 닿기 직전이었다.
-탕
날카로운 총성이 울리더니 마리나의 오른손이 찢겨져 나갔다. 고개를 돌려 레프리콘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또 너냐?”
마리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번에도 그랬지.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아무 문제 없었는데. 다 너 때문이야!”
쏜살처럼 튀어나가는 마리나.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사수에게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근거리였지만, 자신을 노릴 것이라 예측 했다는 듯 레프리콘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지만 탄환이 마리나를 꿰뚫는 일은 없었다.
‘이 거리에서 회전을?!’
방향을 바꿔 치솟아 오른 마리나.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다시 한 번 아리오나에게 향했다. 다시 한 번 장전해서 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의 양팔이 축 늘어졌다. 손아귀에 힘이 빠지고 쥐고 있던 총과 소매에 숨겨놨던 보석들이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이번에도 지키지 못하는 건가….’
복수심을 연료 삼아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마리나.
-푹!
감각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꿰뚫은 것이다. 명치를 뚫고 나온 그녀의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주군을 지키고 싶었던 남자는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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