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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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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으… 아아….”

 

  언어가 되지 못한, 고통만을 담은 소리가 사방에서 나고 있었다. 군복을 처음 받은 순간 그들 모두 각오했을 것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바쳐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걸. 하지만 각오는 각오일 뿐, 지금 몸에서 빠져 나가는 피는 현실이었다. 훈련도, 경험도 부족한 2군에게 있어 이 상황은 너무나 버거웠다.

 

  -부스럭부스럭

 

  부러진 창을 지팡이 삼아 절뚝절뚝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었다. 군계일학인걸까, 아니면 고통이 부족한 걸까. 그는 여느 부상자와는 달랐다. 덜렁거리는 발목을 질질 끌며 동료들의 뒤를 쫓았다. 객기인지 용기인지 모를 의지가 그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허억…!”

 

  범인을 쫓아 앞서간 동료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압도 당했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 것이다.

 

  ‘악마.’

 

  저 자를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가랑이가 축축해졌다. 두 팔, 두 다리를 가졌지만 저런 게 같은 인격체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어떻게 저런 기운을 풍긴단 말인가. 저 산불과 같은 기세에 비하면 자신의 의지따윈 잔불에 불과하다. 거대한 존재감 앞에 나는 버틸 힘을 잃고 말았다.

 

 

 

  시간은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다 죽어가는 놈이… 이거 놔!”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는 마리나였지만, 레프리콘은 자신의 명치를 뚫고 나온 팔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치명상으로 인한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고, 공주… 님.”

 

  목구멍에서 피가 차올라 제대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래도 아직 의심스러워?]

 

  만신창이가 된 신하의 모습을 가리키며 아리오나는 물었다. 벽 너머에서 침묵하고 있는 그를 향해 아리오나는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허벅지 아래가 사라져버린 다리며 명치를 뚫고 나온 저 팔을 봐.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나만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우리가 한 몸인 이상 네 목숨을 구한 것이기도 해. 네가 갖는 불신과 분노는 당연해. 하지만 온통 적뿐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우린 협력해야해.]

 

  그녀의 열변에 마음이 동한 걸까. 상준은 일주일만에 그녀에게 대꾸했다.

 

  ‘아끼는 부하잖아. 미쳐 날뛸 줄 알았는데?’

 

  [분하고 원통해. 당장이라도 저 여자를 찢어죽이고 싶어. 하지만 그가 바라는 건 복수나 애도가 아니야. 내가 살아남아 대의를 이루는 것이지.]

 

  애써 냉정한 척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머리에 찬 열기를 빼내려는 것처럼 한숨을 길게 내쉰 아리오나는 상준에게 질문했다.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상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진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는 삶은 살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론 달라져야해. 여긴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니야. 속여서 데려온 내가 이런 소릴 하는 게 뻔뻔해 보이겠지만, 상황이 그래.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해. 나는 지식이든, 마력이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줄거지만, 네가 독하게 굴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거니까.]

 

  상준은 어이 없다는 듯 물었다.

 

  ‘나한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거야?’

 

  [맞아. 이 몸의 주인은 너고, 나는 세 들어 사는 세입자일 뿐이니까.]

 

  ‘뻔뻔하네. 세입자는 돈이라도 내지, 넌 그냥 객식구야.’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것은 한 사람의 희생이 만들어낸 극적인 타협이었다.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들의 이인삼각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윽?!”

 

  마리나는 소름이 돋았다. 모든 일에는 전조라는 게 있을진데, 이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흉흉한 기운에 굳어버린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손.

 

  -콰득!

 

  손끝이 닿기 직전 스스로 팔을 끊고 거리를 벌린 마리나.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입 밖에 낸 첫마디는 고통에 찬 신음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넌, 도대체 뭐냐?”

  “금방 끝낼테니 쉬고 있어.”

 

  동문서답에 고개를 갸웃하던 마리나는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레프리콘을 눕혀놓고서야 마리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을 재생시킨 그녀는 상대를 살폈다. 한순간 느껴졌던 어마어마한 기백은 어디갔는지, 지금이라면 일격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작 습격범이 저기 있다!”

 

  때마침 함정을 빠져나온 병사들이 달려왔다. 수는 반 이하로 줄어있었지만, 그래도 혼자보단 여럿이 나을 것이라 마리나는 판단했다. 우르르 몰려오던 그들이 고꾸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헉…!”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바들바들 떨다 하나둘 쓰러지더니 결국 모조리 쓰러진 병사들. 그러거나 말거나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아리오나. 마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하하.”

 

  토악질을 하듯 참지 못하고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숲속에 울렸다. 상황에 맞지 않는 광기어린 웃음은 아리오나의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다.

 

  “… 가만 있어도 곧 죽을텐데 왜 명을 재촉하지?”

 

  어렵사리 웃음을 멈춘 마리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종자도 제 사람이 다치니 신경쓰는구나 싶어서요.”

 

  상갓집 같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투쟁의 기운이 들불처럼 번졌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까 상의한 대로 여기서부턴 들어가 있어.’

 

  세 걸음을 내딛기 전 몸의 주도권은 상준에게 돌아갔다.

 

  “지금 이 순간 지엄한 계약에 따라….”

 

  -뿌드득

 

  상준이 계약의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마리나는 골격을 깎아가며 전신을 흉기로 개조 했다. 독이 질질 흐르는 이빨에 타오르는 꼬리, 맹수의 발톱과 온몸에 솟아난 가시까지. 눈동자와 머리카락 말고는 완전히 다른 생물로 변했다.

 

  “꼴이 아주 볼만해졌네.”

  “그 더러운 핏줄을 상징하는 뿔과 날개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죠.”

 

  서로에 대한 조롱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는 끝났다. 선공은 마리나였다. 몸에 난 가시를 바짝 세우더니 세차게 발사했다.

 

  “바위처럼 굳센 방패를!”

 

  지체 없이 방어 마법을 전개한 상준, 대부분의 가시가 튕겨나가고 부러졌다. 즉시 반격에 나서려 했지만, 아리오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한 번 더!]

 

  “어떤 충격에도 깨지지 않는 갑옷을!”

 

  -펑!

 

  주문을 외침과 동시에 방어벽에 박혀 있던 가시가 폭발했다. 겨우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그의 왼팔은 여러 명에게 밟힌 것처럼 얼얼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상준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 여자가 쏜 가시는 아그리야 산미치광이라는 마수의 것인 베낀 것 같아. 아그리야 지역에만 서식하는 마수인데, 너네 세계의 호저라는 생물하고 비슷해. 몸에 난 가시로 자신을 지키지.]

 

  ‘호저의 가시는 폭발하지 않아.’

 

  [그게 바로 호저랑 다른 점이야. 아그리야 산미치광이의 가시는 다른 생물의 마력과 반응하면 폭발하거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허리에 달린 날개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거지. 가시가 닿지만 않으면 그만이라 판단한 상준은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예상대로 지상에서 쏜 가시가 상공 40미터까지 가진 못했다. 이젠 원거리에서 마법만 쏴도 이기겠다 싶었지만, 마리나 역시 닭 쫓던 개가 될 생각은 없었다. 팔을 날개로 바꾼 그녀는 상준을 쫓아 날아올랐다.

 

  “쟤도 날 수 있어?”

 

  상준이 경악하자 아리오나는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반응을 보였다.

 

  [전에 얘기했잖아. 뱀파이어란 종족은 피를 마신 동물을 흉내낼 수 있다고. 쟤가 날짐승 피를 마셨으면 날 수도 있지.]

 

  “설산의 칼바람 같은 일격을.”

 

  뾰족한 얼음 덩어리가 마리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그녀는 대비책을 꺼냈다.

 

  -화르륵!

 

  마리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에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말 그대로 온갖 생물로 변하는 모습에 상준은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또 뭐야. 드래곤으로라도 변한거야?”

 

  [미안하지만, 저건 눈에 띄는 변화도 없어서 뭘로 변한건지 판별하기 어려워.]

 

  “불을 뿜었잖아.”

 

  가시 좀 쏘는 걸로도 원본을 알아차렸으면서 무려 불을 뿜는데 특정이 안된다고? 라는 의도가 담긴 한마디 였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상상 이상이었다.

 

  [파라니아에서 불을 뿜는 생물은 딱히 특별한 것도 아니야. 좀 위협적이다 싶은 생물들은 불이든 독이든 뭔가를 뱉는다고. 오히려 네가 말한 드래곤은 불따윈 뿜지 않아. 더 심한 게 나오지.]

 

  뭘 뿜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폭발하는 가시를 날리고, 입에서는 불을 뿜는대다 하늘을 날 수 있다라… 저런 걸 무슨 수로 이기지?”

 

  [지금이라도 나한테 맡기던가.]

 

  간단한 해결법을 제시하는 아리오나였지만, 상준은 거절했다.

 

  “마법 좀 쓸 때마다 몸 축나는 게 느껴지는데, 네가 직접 나오면 나한테 퍽이나 좋겠다.”

 

  [싫으면 말고~ 뱀파이어들은 보통 한 번에 3, 4가지 동물로 변하는데 쟤는 백작 혈통이니까 몇 개 더 나올 수도 있어.]

 

  불덩어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상준은 물었다.

 

  “저것보다 더한 짬뽕 괴물이 나온다고?”

 

  상준은 앞날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리오나는 거침 없었다.

 

  [거기다 안 쓰는 건지 못 쓰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직까지 블리딩이 안 나왔어.]

 

  “그건 또 뭐야?”

 

  정신 없는 그를 위해 아리오나는 간단하게 요약했다.

 

  [뱀파이어 고유 마법이라 생각하면 돼. 피를 사용해서 별 짓을 다 해.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기도 하고 신체 강화도 하고 피를 응고 시켜서 지혈도 하고.]

 

  안 그래도 벅찬데 여기서 더 나올 게 있다는 말은 상준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맡기라니까? 나 안 그래도 저거한테 유감이 많은데.]

 

  빔이라도 나갈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 상준은 한사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만 그 역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방어에만 급급할 뿐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파리 같은 게 이리저리 내빼기만 하는군요.”

 

  마리나는 등에 날개 한 쌍을 더 만들어내 속도를 올렸다. 원거리 공격이 맞질 않으니 근접전을 시도하려는 심산이었다.

 

  “어?!”

 

  급격하게 빨라진 그녀를 피하지 못한 상준. 맹금류처럼 뾰족한 발톱이 팔뚝에 파고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고 미소 짓는 마리나. 상준은 이런 상황에서도 세 치 혀를 놀렸다.

 

  “입꼬리 올라간 게 귀엽네. 미스 괴물 대회라도 나가보지 그래.”

  “시커멓게 불타고도 나불댈 수 있는 지 보겠어요.”

 

  불을 내뿜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마리나. 상준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이 몸에 닿는 모든 것들은 부스러질 것이니.”

 

  -파사삭

 

  마리나의 피부가 바싹 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졌다. 상준의 몸에 닿은 발톱을 시작으로 마리나의 몸이 살얼음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고통에도 그녀는 상준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머금고 있는 불덩이보다도 뜨거운 증오가 머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죽어!”

 

  결국 상준을 향해 쏘아진 증오의 불길. 사람 하나 불태우기엔 지나칠 정도였다. 숯덩이 정도가 아닌 재로 만들만한 화력. 상준이 혼자였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처음부터 맡겼으면 얼마나 좋아~”

  “컥!”

 

  화염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반응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불길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팔이 마리나의 목을 틀어쥐었다. 나올 구멍이 막히니 자연스레 불은 꺼졌고, 그녀는 자신의 목을 틀어쥔 상대를 볼 수 있었다.

 

  “너, 너…!”

 

  외견에 변화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원수는 이 녀석이다. 다시 한 번 제압하려 했지만, 이미 반쯤 얼음으로 변해버린 다리엔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리오나는 버둥거리는 마리나에게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태워죽이는 거 깔끔하고 좋지. 나도 자주 썼던 방법이야. 근데 넌 사람 잘못 골랐어.”

 

  마리나는 상대가 작은 화상조차 없는 건 모종의 방법으로 불길을 빗겨나가게 했거나, 화염 저항을 올려서 버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피하거나 버틴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불은 좀 다루거든. 나도 맞아줬으니까 이번엔 네 차례야.”

 

  아리오나는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영창을 시작했다.

 

  “모고르의 딸이 바라노니 나의 적을 파괴할 창을 주소서. 당신의 적은 나의 적이며, 나의 적 또한 당신의 적이니 우리의 적을 무찌를 힘을 내려주소서….”

 

  ‘같이 죽자는 건가? 미쳤어.’

 

  악마족의 마법에 대해 책에서 본 적 있다. 그들의 마법은 주문이 장황할수록 위력이 올라가지만, 정작 마법 성공률은 처참해서 자폭이 될 확률이 높다. 저 주문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목숨이 위험하다.

 

  “이, 이거놔!”

 

  어떻게든 도망치려 발버둥쳤지만, 왼손의 불꽃은 점점 심장에 가까워졌다. 그녀는 도망보단 방어가 낫겠다 판단했고, 지금 변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생물을 떠올렸다.

 

  -펑!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이윽고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위력이 너무 셌나? 나름 꽉 잡은 건데.”

 

  아리오나는 오른손에 쥔 살덩이를 주물럭거리다 태워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깎아지른 절벽, 저 아래로 떨어졌으니 살아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아리오나는 마력을 끌어모았다. 절벽 아래를 불바다로 만들 셈이었다. 만에 하나따윈 사실 일어날 일 없는 것이라 치부해도 무방하다. 지금 하려는 건 냉정한 척 이유를 갖다 붙인 화풀이. 무리한 마력 운용 탓에 신체 말단 부위가 저려오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제 몸마저 불살라버릴 것 같은 맹화. 상준이 강제로 멈추게 하려는 그때였다.

 

  “공주님.”

 

  두 번 다시 못 들을 거라 생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가른!”

 

  신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의 곁으로 날아가는 아리오나. 명치가 뚫리고 허벅지 아래가 없는, 중상이란 말로도 부족한 꼴이었지만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발밑을 폭발시켜서 날아오는 멍청이가 어딨어!”

 

  회복 마법을 쓰려는 아리오나를 말리는 레프리콘.

 

  “하, 하지 마십시오. 몸통마저 박살내려고 그러십니까.”

 

  피가 섞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그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으니 괜한데 힘 쓰지 마시고 곧 죽을 놈 유언이나 들어주십시오.”

 

  “남쪽으로 가십시오. 반다르에서 하라카 체첼레라는 남성을 찾으십시오. 오래된 식당을 운영하는 근육질에 얍삽한 인상의 남인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레프리콘은 품 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더니 아리오나에게 쥐어주었다.

 

  “그걸 보여주면서 라피키가 보냈다고 하면 도움을 줄겁니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며 점점 가늘어지는 숨소리는 그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레프리콘의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끝까지 가른이라고 부르네.”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지는 물론이고, 주변에 쏟아진 피까지 빛이 되어 흩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빈딧불이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허공으로 날아간 빛은 얼마 안 가 사라졌고, 이곳엔 나와 아리오나만이 남았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가자.”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리오나였다. 그녀는 날개를 펼치고 남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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