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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지구엔 재밌는 말이 있더라.”

 

  조용히 비행하던 아리오나는 불쑥 대화의 물꼬를 텄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익숙한 속담이 나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갑자기 그건 왜?’

 

  “거기서라면 가른도 자신이 살아왔다는 흔적을 잔뜩 남길 수 있을까 해서.”

 

  ‘이름을 남긴다는 건 이름 수만큼 기록을 남긴다는 뜻이 아니야.’

 

  “그래? 아쉽네.”

 

  짧은 한마디였지만, 아리오나의 말투에선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레프리콘. 별별 특이한 것들이 있는 파라니아에서도 눈에 띄는 점을 가진 소수 종족이다. 그들은 매일 이름이 바뀐다는 것 외에도 특이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무색무취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서 흔히 무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쓰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렇진 않다.

 

  건축가일 경우 자기가 설계한 건축물이 남을 수도 있고, 예술가라면 작품이 남는다. 만약 존경받는 위인이었다면 그 명성은 역사에 기록된다. 하지만 레프리콘만은 이런 예시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을 만들어 내든 다음 날이면 무명 작가의 것이 되는 셈이니까. 소수 종족인 그들이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나는 그 짜증나는 난쟁이에게 애도를 표하지 않았을 것이다. 레프리콘은 시신이 남지 않는다. 그들은 죽으면 빛의 조각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피 한 방울,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 세상에 신이 존재 한다면 이들은 신에게 미움을 산 게 아닐까.

 

  ‘너, 나중에 왕 될 거라며. 그럼 그때 기록을 남기면 되지. 이름은 남기지 못해도 네 일대기에 그 녀석의 족적이 남을 거 아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침울해 하는 거 같아서 한마디 한 건데 아리오나는 묵묵부답. 괜히 말했나 부끄러워질 때쯤이 돼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어라~ 지금 위로해 주는거야? 어린앤줄 알았는데… 알았어, 누나 힘낼게!”

 

  뭔가 열 받는 말투. 신경써 주는 게 아니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상준과 아리오나가 남쪽으로 향한 지 이틀째. 뱀파이어들의 나라 루아마에서는 차츰차츰 백작가 습격범에 대한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도 빨리 들었으며 가장 흥분한 이들이 어느 회의장에 모여 있었다.

 

  “정말 이를 어찌해야 할지….”

 

  원탁에 앉은 인원 중 9시 방향에 위치한 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여간 백작놈들은 목에 힘만 주고 다니지 쓸모가 없어!”

 

  3시 방향에 위치한 이가 성을 냈다.

 

  “얼마 안 있으면 또 연합 회의가 있을텐데, 거기서 무슨 말을 들을 지 걱정이군요.”

 

  6시 방향에 위치한 이가 걱정을 내비쳤다.

 

  컴컴한 회의장처럼 회의 분위기도 칙칙해져만 가는 와중 의견을 내는 이가 나왔다.

 

  “책임 소재를 돌리면 될 일 아닙니까?”

 

  앞선 목소리들보단 제법 젊은 목소리. 그는 대답이 없는 걸 마저 이야기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마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선홍의 마녀를 놓친 걸로 연합에서 입지가 난처해 지는 게 문제인 거잖습니까? 우리 탓이 아닌 걸로 만들면 됩니다.”

  “우리가 이 나라의 정상인데 누구한테 책임을 돌린단 말인가?”

  “그렇죠. 원로원이야 말로 이 루아마의 최고 권력이죠, 수도권에서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날카로워졌다는 걸 피부로 느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안았다.

 

  “에이, 백작들하고 권력 싸움하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왜들 그러십니까.”

  “자네, 그따위 소리나 할 거면…!”

  “실책을 만회하는 건 물론이고, 백작의 영지를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그의 당찬 포부에 대다수가 어처구니 없어하는 중 12시 방향에 위치한 이가 말했다.

 

  “들어나 보지.”

  “이번 일에 직접 엮인 포르가리츠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울 겁니다.”

 

 

 

  저 멀리 떨어진 수도 부레티까지 소문이 들릴 정도이니 만큼, 포르가리츠 백작령엔 뒤숭숭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봐, 저 마차 좀 봐. 때깔 죽이는구만.”

 

  부티가 줄줄 흐르는 마차를 보며 눈이 빠져라 쳐다보는 남자. 옆에서 같이 걷던 일행이 옆구리를 찔렀다.

 

  “자네는 저 문장이 안 보이나? 신경 끄고 가던 길이나 가자고.”

 

  여덟 송이의 목련을 감싼 쌍두사. 그것은 원로원 직속 친위대인 타부라의 상징이었다. 마차의 소유주를 알게 된 남자는 인상을 구기며 자리를 떴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하나같이 마차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그 모습을 근처 찻집에서 지켜보던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스푸르크, 차 맛이 떨어진다.”

 

  찻잔을 내려놓은 남자는 동료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러든 말든 스푸르크는 탁자에 턱을 얹은 채 푸념을 뱉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수근거린다고요. 개중에는 상욕하는 사람도 있고.”

  “듣기 싫으면 변신을 풀어. 왜 굳이 청각을 강화하면서까지 욕하는 걸 듣고 있는건데.”

 

  스푸르크는 자기 몫의 디저트를 입에 넣은 채 중얼거렸다.

 

  “우린 정당한 공무 집행을 하는 건데 매번 저런 시선 받는 거 싫다구요….”

  “백작령에 갈 때마다 늘 겪는 일이잖아.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늘 이런 취급인 게 싫은 거라구요! 원로원이랑 백작가가 사이 나쁜 게 우리탓도 아니고. 므라이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다다른 선배의 손이 올라가려는 찰나, 한 발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쨍!

 

  찻잔과 스푼이 부딪히는 소리에 이목이 집중됐고, 초로의 남성은 느긋하게 차를 저으며 운을 뗐다.

 

  “스푸르크, 억울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만, 자네가 말했다시피 이건 백작가와 원로원 사이의 문제야.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우린 명령이나 따르면서 맡은 바를 다하면 될 뿐이라네.”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부드럽지만 힘 있는 언변에 이렇다 할 대꾸도 못하고, 미지근해진 차를 홀짝거리는 스푸르크. 한쪽이 정리되자 이번엔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는 남성.

 

  “므라이. 자네가 언제나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은 보기 좋네만, 조금 더 여유를 갖는 게 좋겠네.”

  “… 죄송합니다. 알비트룬 씨.”

 

  ‘같은 계급이니까 씨 같은 건 안 붙여도 되는데.’

 

  과열될 뻔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다시금 느긋한 티타임을 가지려는 그때였다.

 

  -딸랑딸랑

 

  손님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아, 백작님 오셨습니까. 오늘은 좋은 허브가 들어왔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받은 플리데는 마찬가지로 인사를 건넨 후 말했다.

 

  “아하하. 저는 대리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빈자리를 잠시 채우고 있는 게 고작이지요.”

  “하지만 백작으로서의 권한은 전부 쥐고 계시죠.”

 

  갑작스레 대화에 끼어드는 누군가. 플리데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는 원로원의 친위대인….”

  “원로원의 독사들이 무슨 일로 이런 변경까지 행차한 거지?”

 

  므라이의 말을 자른 여성은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밀리, 먼저 모질게 대하면 우리 가문의 품격이 의심 받는단다.”

 

  오빠의 제지에 한 발 물러선 밀리였지만, 그녀는 므라이와 스파크가 튈 것 같은 뜨거운 시선을 주고 받았다. 좋지 않은 첫만남이었지만, 일은 일이기에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알비트룬이 나섰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저는 원로원 친위대 타부라 소속 알비트룬 타부라, 이 둘은 스푸르크, 므라이입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합석해서 한 잔 하시겠습니까? 이 찻집의 투즐링, 향이 아주 좋습니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플리데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

 

  “오늘은 일하러 나온 거라서 말이죠. 권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다음 기회에…. 그나저나 수도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어쩌다 이 먼 변경까지 오셨습니까? 혹시 관광이시라면 때가 좋지 않네요. 요근래 뒤숭숭한 일이 많아서 영지민들도 긴장하고 있거든요.”

  “차라리 관광이었으면 마음이 좀 편했겠습니다만, 출장을 온거라서요.”

  “지방 관리청에서는 저희쪽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비트룬은 뭔가 잘못 됐음을 짐작했다. 그는 조심스레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낸 뒤 입을 열었다.

 

  ”첫 대면에 대뜸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만, 일은 일인지라…. 플리데 백작 대리, 현 시간부로 당신을 구속하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수도 부레티로 가주셔야 겠습니다.”

 

  불쑥 쳐들어온 침입자가 가족을 끌고가려 한다. 그렇잖아도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는데, 아예 임계치를 넘어버렸다.

 

  -팅!

 

  머리카락을 고정하던 핀이 튕겨나갔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이 가닥가닥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듣자듣자 하니 이 자식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밀리의 일갈에 타부라들은 긴장했다. 구속 영장이 나왔으니 백작이든 누구든간에 무력 제압이 허용 된 셈이지만, 대대로 국경을 수호하는 백작가의 핏줄이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거기다 이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 병사들도 있고 영지민까지 달려들기 시작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상부 놈들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거야! 돌아가면 두고보자.’

 

  사지 멀쩡히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알비트룬이 결전 태세를 갖추려는 그때, 예상치 못한 동앗줄이 내려왔다.

 

  “영장에 적힌 죄명은 뭡니까?”

 

  플리데의 질문에 므라이가 답했다.

 

  “특별 관찰 대상 관리 소홀 입니다.”

  “다른 건 없습니까?”

  “예, 이것 뿐입니다.”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플리데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여러분의 계급은 어떻게 되십니까?”

  “저희 셋 다 7급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가도록하죠.”

  “오빠?!”

 

  화들짝 놀라는 동생은 아랑곳 않고 플리데는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다만, 얼마나 걸리지 모를 일이니 여동생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 갑작스레 자리를 비우시는 거니 할 말이 많으시겠지요. 충분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백작님. 다만, 입장이 있는지라 수갑만 미리 채우겠습니다.”

  “백작 대리입니다.”

 

  수갑을 찬 그는 동생과 마주 앉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째려보는 동생에게 플리데는 말했다.

 

  “이건 원로원에서 일부러 도발하는 거야.”

  “나도 보면 알아. 혐의도 별 같잖은 거던데, 7급짜리 몇 명한테 백작을 체포해 오라는 건 멍청한 척이라 하기에도 성의가 없잖아.”

  “내가 봤을 때 이건 빌미를 만들기 위함인 것 같아.”

  “무슨 빌미?”

  “혐의를 부정하거나 타부라와 충돌한다면 전면전을 벌인다든가.”

  “그건 또 무슨…!”

 

  플리데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는 걸 깨달은 밀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우리도 원로원이랑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서릿가처럼 험악한 것까진 아니잖아. 그건 너무 간 거 아니야?”

  “최악의 가능성을 말해본거야. 다만 지금 상황을 봤을 때 가능성이 없진 않아. 네가 말했듯이 명목만 체포일 뿐 원로원이 먼저 쳐보라는 식으로 시비를 걸고 있잖아. 여기서 빌미를 주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겠어.”

  “그래. 수상한 건 인정해. 그렇다고 단신으로 수도에 가는 건 제 발로 그것들 주둥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거잖아. 너무 위험해.”

  “그래서 지원요청을 할거야.”

 

  그런 게 있었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밀리에게 플리데는 말했다.

 

  “백작가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 다른 세 가문에 연락 돌려.”

 

  이후 동생에게 영지 경영에 관한 조언 몇 마디를 덧붙이고 나서 플리데는 마차에 올랐다. 멀어져가는 고향을 눈에 새기며 그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랐다.

 

 

 

  시간은 막힘없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콰득!

 

  “으아아악!”

 

  바위도 씹어버리는 무지막지한 턱을 가진 마수에게 쫓기는 소년이 있었다.

 

  [달려라 달려~ 그러다 잡힌다~]

 

  그런 소년을 놀리듯 응원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이런…!”

 

  절벽에 몰린 상준. 눈 뒤집힌 채 달려오는 짐승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물질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게 느껴졌다. 심장에서 시작된 흐름이 손끝에 닿은 순간 그는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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