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모래만 가득한 사막 한복판에 상준과 지지는 쓰러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건, 사막에 서식하는 마수들에겐 차려놓은 밥상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세상만사 병가지상사라 해야 할까.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던 모래 폭풍이 주변을 싹 쓸어버린 덕에 아직까진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연에 기댄 평화는 우연으로 끝나는 법이다.
“누님, 저~기에 웬 인간이 쓰러져 있는데요?”
이마에 큼직한 흉터가 있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누님이라 불린 여성은 쓰고 있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뭐? 그쪽은 폭풍이 지나간 곳이잖아, 네가 잘못봤겠지.”
“저는 누님처럼 눈에 하자 없거든요?”
“이 놈 말하는 싸가지 보게? 그래, 어디 보자. 아니면 너 오늘 허리 접힐 줄 알아라.”
못마땅하다는 듯 거체를 일으키는 여성.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키와 근육질 몸은 운동 좀 한다는 수준으론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그녀는 설렁설렁 걸어오더니 망원경 너머를 살폈다.
“쯧.”
상준과 지지를 확인한 그녀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거 너무 노골적으로 아쉬워 하는 거 아닙니까?”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운 좋은 줄 알아라.”
“좋은 건 운이 아니라 눈이죠. 누님처럼 하나 없었으면….”
-퍽!
“팀, 너는 항상 그 입이 문제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수리에 꽂힌 주먹. 모래에 얼굴을 처박은 팀을 뒤로한 채 여성은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또 꿈인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꿈이라는 걸 상준은 단박에 알아챘다. 그도 그럴 것이 본 적 없는 장소, 본 적 없는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리오나의 기억이다. 가구며 식탁, 찻잔까지 뭐 하나 값싸보이는 게 없다. 세상의 반을 지배하고 있다든가 하는 허풍 같은 이야기도 휘황찬란한 방을 보고 있으니 믿음이 생긴다.
“오, 이게 이세계 디저트인가?”
식탁 위에 찻잔과 함께 놓여 있는 마카롱 비슷한 과자를 집으려던 그때였다.
-철컥
손을 뻗을 수가 없다. 몸을 구속당한 경험, 그때 그 지하 감옥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긴 어디야?’
천막 안인가? 당연하지만 모르는 곳이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살려고 얼음 벽을 세운 이후로 기억이 모호하다. 심장 근육이 굳었는데도 살아있는 것 보면 지지가 돌아온 건가?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손발이 전부 묶여 있는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 한데….
“이 세계를 떠도는 이방인이 바라노니, 자유를 억압하는 틈새를 매워라.”
‘좋아! 마법은 써진다.’
믿져야 본전으로 주문을 읊었는데 다행히 마법이 써졌다. 열쇠 구멍에 딱 맞는 얼음을 만들어 수갑, 족쇄를 풀었다. 손목 발목 스트레칭을 하다 문뜩 그 녀석 생각이 났다.
‘야, 너 왜 가만히 있었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습도 안 보인다. 평소엔 보란듯이 둥둥 떠다니면서 시야 한켠에 꼭 있던 녀석이 없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내 안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는 건가?
-저벅저벅
상준은 이 이상 깊게 생각하는 걸 멈췄다. 누군가가가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보단,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진해지는 비릿한 피 냄새가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 !@^@#$%?”
얼굴과 가슴 부근에 피가 묻은 남자가 천막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준이 사라진 것에 의문을 가진 것이리라. 아리오나의 통역이 없으니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뚝… 뚝….
왼손에 쥔 단검에서 신선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 오른손에 들려 있는 건 어떻게 봐도 인간의 팔이었다. 기절한 사람을 데려다 구속해 놓은 것도 소름 끼치는데, 피투성이로 사람 팔을 들고 다닌다라…. 더 생각할 것 없다 판단한 상준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적을 움켜쥐는 숨 쉬지 않는 덩굴을.”
얼음이 지면을 타고 나아갔다. 나아간 끝에 남자의 발에 닿을 것이고, 그 순간 얼음 덩굴이 터져나와 대상을 꽁꽁 묶어놓을 것이다. 상준의 주문을 듣고 반응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물살을 탄 물고기 같은 속도로 나아간 마법은 이미 발동했을 테니까. 빈틈 없는 계획이다. 그럴 터였다.
-촤락!
채찍을 휘두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냉기로 만들어진 덩굴이 펼쳐졌다. 하지만 타겟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이 자식이 어떻게?’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정확히 상준을 향해 달려든 남자.
“약자를 지키는 한기의 갑옷을…!”
-퍽!
급하게 방어 주문을 외웠지만, 발차기 한 방에 산산조각 났다. 직접 타격이 아니었던 만큼 한 방에 뻗는 일만큼은 모면 했지만, 그뿐이었다. 한 번 턴을 잡은 남자의 공격은 매서웠다.
“이런 미친!”
발로 밟고, 단검을 던져대는 남자. 상준은 인간 밀대가 된 것처럼 바닥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러다니는 게 최선이었다.
“적의 몸을 꿰버릴 냉기의 송곳.”
간간이 반격도 시도 했지만, 모조리 막거나 피해버리는 터라 상준은 그저 구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같은 방법엔 한계가 있는 법, 천막 구석으로 유도 당한 그를 향해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
“뭐라는 거야.”
통역이 없으니 알아들을 수가 없네. 뭐 대충 이제 죽여주마~ 목숨 구걸이나 해봐라~ 같은 소리겠지. 남자가 면상처럼 흉악한 인성을 가졌다 짐작한 상준. 저 손에 있는 단검이 몸에 박히기 전에 수를 써야만 했다.
‘나도 무작정 도망만 친 건 아니거든.’
“턱밑을 노리는 냉기의 창.”
남자의 발치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얼음 창. 사각을 노린 완벽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기예를 보이는 남자. 그는 우측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뛰어올랐다.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상준은 절망하지 않았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도 피하나 보자고.’
“나의 적을 조각낼 냉혹한 칼날.”
주문을 외자 전후좌우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중식도 모양의 칼날이 남자를 노렸다.
‘어디 이번엔 공중부양이라도 할거냐?’
소년의 빈곤한 상상력을 비웃듯 남자는 한층 더 놀라운 신기를 보였다.
‘저 미친….’
손발에 입까지 사용해 칼날을 모두 잡아낸 그는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쯤되니 정말 답이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나 싶지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법을 너무 썼는지 떨리기 시작한 왼팔을 부여잡고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쳤다.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들아, 모든 걸 바쳐 맡은 바를 다해라.”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얼음 칼날이 빛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즉시 그것들을 집어던졌다.
-펑!
아니나 다를까 칼날은 폭발하여 냉기와 조각을 흩뿌렸다. 오른 다리마저 저려와 무릎 꿇은 상준의 모습에 방심한 걸까. 남자는 놓치고 만 것이다. 무위로 돌아간 공격이, 산산조각난 얼음 쪼가리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
사방에서 터져나온 냉기의 폭발이 남자를 덮쳤다.
“그래, 이쯤 했으면 좀 맞아줄 때도 됐지… 윽!”
희뿌연 냉기 속에서 날아온 단검이 상준의 팔뚝을 스쳤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끝냈다고?!’
자욱한 냉기가 남자의 모습은 감추었지만 발소리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저벅저벅
상준은 초조해졌다. 이미 팔다리가 한 짝씩 저려오는데, 도망은 물론이고 이 이상 마법을 쓰는 것도 위험하다. 저번처럼 심장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소년. 뚜렷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데 실루엣은 점점 또렷해졌다.
‘야, 아리오나! 너 다 보고 있지? 지금 급해! 나 죽으면 너도 죽는 거 알지? 야 이 아줌마야! 좀 도와달라고!’
결국 최후의 수단에게 기대는 상준. 하지만 태도가 글러먹은 탓일까 아니면 정말 못 나오는 이유가 있는 걸까. 다급한 부름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소년의 바로 앞까지 와버렸다. 자살 공격이 될지도 모를 마법을 시전하려던 그때였다.
-쿵
남자가 쓰러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하던 상준이었지만, 얼어붙어 뭉텅이가 된 머리카락하며 동상 자국과 딱딱해진 몸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했다.
“에이,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한숨을 푹 내쉰 소년은 낑낑대며 일어서더니 절뚝절뚝 나아갔다.
“아, 죽겠다… 응?”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커다란 벽 같은 게 입구를 막고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시선을 올렸지만….
-퍽!
정수리에 꽂히는 강렬한 충격. 소년의 정신은 다시 한 번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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