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어우… 머리야….”
과음의 절친인 두통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신음하며 바닥을 더듬던 주리는 머리맡에 있던 컵을 쥐었다. 밤공기에 차가워진 물로 목구멍을 적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너무 많이 마셨나?”
분명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하늘에 떠 있는 게 하나 뿐이었는데, 지금은 큰 거 하나에 작은 게 수없이 떠 있었다.
“잘 자네~”
모닥불을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비샤라를 보고 한 말이었다. 술병을 꼭 껴안은 채 해맑은 표정으로 자는 모습이 처음 봤을 때랑은 딴판이었다. 같이 있던 소년과는 달리 금방 깨어난 그는 이 바닥에서 굴러본 티가 좀 났다. 잠든 척도 능숙했고, 수갑 열쇠를 훔치려다 실패하자 즉시 마차에서 뛰어내리려 한 판단도 그랬다.
“뭐가 문젤까? 역시 팀 그 녀석의 큼지막한 흉터가 원인일 거야.”
이판사판으로 달려들려는 그를 제압한 주리는 자신들이 의적이라 설명했지만, 그딴 건 들어본 적도 없다며 대차게 까였다. 팀이 도적 털어먹는 도적이라 설명하고 나서야 알 것 같다는 반응에 약간 침울해졌다. 그렇다, 주리와 팀은 와딜리 의적단이란 이름의 자칭 의적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 활동한지 1년도 안 됐다지만, 그래도 우리가 잡은 도적이며 도와준 사람이 꽤 있는데 말이야….”
아쉬움 섞인 한숨을 뱉는 주리. 그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도적들을 물리치고 여행자나 상인을 구해준 건 맞지만, 도적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벗겨 먹고 도움 받은 이들에게 약간의 성의를 요구한 것이다.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요구 받는 입장에선 다르게 느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단 둘이서 도적떼를 박살내는 험상궂은 2인조 앞에서 못 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팀 얘는 어디 간거야?”
주리는 보이지 않는 동업자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장작을 넉넉하게 넣은 모닥불이며 자기 전엔 없던 모포를 덮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주변을 챙기는 그가 해놓은 게 분명한데 정작 본인이 안 보인다.
‘볼일 보러갔나?’
대충 납득하고 드러누우려는 그때, 뒷골에 쎄한 느낌이 스쳐갔다.
“이건… 요술?”
요술, 술법, 마법 부르는 법이나 쓰는 법은 다르지만, 마력을 사용한다는 기본은 같다. 이 신묘한 기술은 사용하면 파장이 발생하는데 선천적으로 예민하거나, 감각을 단련하면 이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주리는 지금 그 파장을 느낀 것이다.
‘… 착각인가?’
너무 짧은 순간이기도 하고 숙취 탓에 확신할 수 없었다. 단순히 뒷골이 땡긴거라 생각하고 드러누운 주리였지만, 얼마 못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별일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기적 어기적 마력이 느껴진 곳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걱정이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필 느껴진 방향이 비샤라의 일행이 있는 천막인 쪽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저랑 같이 있던 남자애요? 아, 고객님 말하시는구나. 걔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어린 게 성질도 더럽고 마법도 장난 아니에요!”
술김에 한 이야기니만큼 온전히 믿을 순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으… 추워라.”
사막의 밤은 본래 추운 법이지만, 이 천막 근처는 아예 입김이 나올 정도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닭살이 돋고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것까지 들리면… 이젠 뭐 아니라고 할 수가 없네.”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모래 위를 뛰고, 날붙이가 날아가 꽂힐 때 들리는 소리였다. 거기에 더해 둔탁한 파열음까지… 이건 분명 싸움이 난 것이리라. 마법을 못 쓰게 하는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수갑과 족쇄를 달아놨는데, 어떻게 풀어낸 건지 궁금해하며 천막 입구에 도착한 그때였다.
-펑!
폭발음과 동시에 천막 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리는 박수를 쳤고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화염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닿는 곳 마다 하얗게 얼려버리는 광풍 앞에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휘날리는 불꽃. 하지만 결국 불꽃의 갑옷은 꺼지지 않았고, 주변이 꽁꽁 얼어붙는 와중에 주리만은 무사했다.
-짝짝
두 번의 가벼운 박수로 화염을 꺼뜨린 그녀가 천막 안에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아 죽겠다….”
-퍽!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소년의 머리통을 반사적으로 후려쳤다. 맥없이 쓰러지는 상준. 의식이 없는 걸 확인하고 천막 안을 들여다 본 주리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팀을 본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명줄 한 번 질기네 질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안도감에 젖어있었다.
“으… 머리야….”
최근 들어 너무 자주 정신을 잃는 것 같은데, 맨날 육포 쪼가리 같은 거만 먹으니 기가 허해졌나? 막 일어난 참이라 시야가 희끄무레하다.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움직이자….
-절그럭
“또 이거야?”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지구에서는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이세계에 넘어온 뒤론 벌써 세 번째 착용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쓰다보면 차갑고 딱딱한 착용감에 익숙해져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낯선 땅을 방랑하는 자가 바라노니 틈새를 매꾸고 속박을 없애라.”
‘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의 발동은커녕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상준은 당황했다. 그런 소년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뭐래냐?’
대뜸 눈앞에 나타난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거인. 딱 벌어진 어깨며 근육질 몸은 자연스레 보디빌더가 떠올랐다. 몸과 따로 노는 가녀린 목소리나, 남자는 없는 신체부위가 아니었으면 성별을 헷갈릴 듯한 외모가 압권이었다.
“마법이 안 써져서 놀랐나?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엔 마법을 불발시키는 결계가 쳐져 있다. 라고 하십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근육 덩어리 뒤에서 지지가 나타났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상준은 반쯤 열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꽁꽁 묶인 채 목에 칼이 들어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화 많이 났나보네.’
목에 들이밀고 있는 흉기만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건만,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의 눈을 보니 자신에 향한 유감스러운 감정이 대단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
당장 찌를 것 같은 살기등등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남자는 뒤쪽에 있는 거인에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이니 풀어줍시다~ 같은 말을 해주면 참 고마울텐데.’
“그냥 죽입시다, 누님. 이라고 하십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슬픈 예감은 어째서 빗나가질 않나.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상준은 그가 자신이 쓰러뜨린 칼잡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저 놈이 누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같은 편일텐데…. 하나 잡는 것도 개고생 했는데 2:1로 싸워 이길 자신은 당연히 없었다. 심지어 마법도 못 쓰게 수를 써놓은 상태다.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죽겠지.
‘그 녀석이 나온다면 다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안 보이는 붉은 머리의 그녀를 떠올리는 상준. 하지만 마실이라도 나간건지 님은 감감무소식이다.
‘죽일 거면 굳이 깰 때까지 놔둘 리가 없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라는 게 고문만 아니길 바라는 상준. 이세계인 만큼 상식이 다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납치 고문을 즐기는 미친 변태가 도처에 널려 있진 않겠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을 품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나는 주리고 너한테 화가 많이 난 저 친구는 팀이야. 우린 이 사막에서 의적단을 하고 있어. 라고 하시네요.”
지지의 실시간 통역을 들은 상준은 기대감을 품었다. 의적이라면 나쁜 놈들을 해치우고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를 돕는 사람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내 목을 그어버릴 것 같은 오드 아이 형씨도 그렇고, 우락부락한 거구에 안대까지 끼고 있는 누님도 인상은 무섭지만 마음만큼은 선량할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 얼어죽을 의적이래? 홍길동이냐?! 로빈 후드냐고! 상판대기는 인신매매단 같구만!
‘제발 좀 되라!’
어떻게든 마법을 써보려 안간힘을 짜내보지만, 마력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상준의 마음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주리는 말했다.
“당장 죽이거나 하진 않을테니까 너무 겁먹지마. 라고 하십니다.”
‘퍽이나 그러겠다.’
뛸듯이 기뻐할거라 생각했던 걸까 심심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리. 화끈하게 반응해준 것은 다른 쪽이었다.
“누님! 살려준다뇨? 그건 규칙에 어긋납니다!”
팀의 날선 반응에 주리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 말했다.
“그래그래,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알겠는데, 좀 들어봐. 규칙 5번 말하는 거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은 반드시 되갚아준다는 거.”
알만한 사람이 대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3번은 뭐였지?”
“아니 누님…!”
“3번은 뭐였지?”
득달같이 반박하려는 팀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묻는 주리.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인재는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그래, 맞아. 나는 저 녀석을 우리 의적단에 들어오게 할 생각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뭔데? 알아듣질 못하니 상황 돌아가는 걸 모르겠네.’
뭔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졌다. 의견 충돌이 난 것 같은데 통역이 없으니 이쪽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남자가 아예 뒤돌아 선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라 예측할 뿐. 상준은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은 가축 미만이라고 항상 말하는 건 누님이잖습니까. 대체 저 놈한테만 다른 잣대를 갖다 대는 건 왭니까?”
눈을 시퍼렇게 뜨는 팀에게 주리는 사뭇 냉정하게 말했다.
“쓸만해 보이니까.”
잠시 멍하게 있던 남자는 금새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력을 감추는 거 하나는 제법입니다만, 그거 말고는 전부 어설퍼요. 마법을 어디서 배운건지 마력 흐름이 비효율적이고, 몇 번만 써도 몸에 부담을 주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런 녀석이랑 같이 활동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상준을 가리키며 묻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널 이겼으니까.”
이마에 핏대가 선 팀의 반박을 받지 않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나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저 소년이 무슨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 다만 네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투박한 것 같은데, 아직 어린만큼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 더더욱 영입하고 싶어졌어.”
“전 그때 전력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제대로 붙었다면….”
“그럼 그렇게 하지 그랬어.”
주리는 한쪽뿐인 눈으로 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할말이 많은 듯 그는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사막에서 만약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저 소년이 아니라 도적놈들한테 졌다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아닌 팀 자신의 판단이었다. 상대를 얕보다 진 것이다. 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씩씩대는 그에게 주리는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말했다.
“이기고 진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구해준 은혜도 모른다고 했던 거 있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너도 오해가 있던 것 같더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팀에게 그녀는 마저 설명했다.
“자기 얘기하는 줄도 모르고 눈알만 굴리는 거 봐라. 쟤 공용어도 모르더라. 같이 있던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포타스 말은 안다는데 바다 건너편 말을 어떻게 아는 건지…. 여튼 네가 하는 말 쟤는 하나도 못 알아들은거야.”
뭐야, 그런거였어? 놀란 눈으로 상준을 돌아보는 팀에게 주리는 말했다.
“그리고 너, 쟤랑 마주쳤을 때 네 꼴이 어땠는지 생각은 나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팀을 보고 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피범벅에 시체를 들고 있었다는 걸 들은 그는 머쓱해졌다.
“그,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지도….”
팔다리가 구속된 채 처음 보는 곳에서 깨어났는데, 피칠갑을 남자가 피 묻은 칼과 시체를 들고 다가온다면… 누구라도 경계하지 않을까. 팀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주리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자, 너한테는 2가지 선택지가 있어. 의적단에 들어와서 우리랑 같이 일하거나, 지금 죽거나. 라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선택지야?!’
일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지금의 상준에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으니 오늘은 파티다!”
“적당히 마시세요, 누님.”
먹고 마실 생각에 즐거운 사람과 못 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 그 사이에서 상준은 생각했다.
‘수갑이라도 풀어주든가….’
“어우… 머리야….”
과음의 절친인 두통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신음하며 바닥을 더듬던 주리는 머리맡에 있던 컵을 쥐었다. 밤공기에 차가워진 물로 목구멍을 적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너무 많이 마셨나?”
분명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하늘에 떠 있는 게 하나 뿐이었는데, 지금은 큰 거 하나에 작은 게 수없이 떠 있었다.
“잘 자네~”
모닥불을 건너편에서 자고 있는 비샤라를 보고 한 말이었다. 술병을 꼭 껴안은 채 해맑은 표정으로 자는 모습이 처음 봤을 때랑은 딴판이었다. 같이 있던 소년과는 달리 금방 깨어난 그는 이 바닥에서 굴러본 티가 좀 났다. 잠든 척도 능숙했고, 수갑 열쇠를 훔치려다 실패하자 즉시 마차에서 뛰어내리려 한 판단도 그랬다.
“뭐가 문젤까? 역시 팀 그 녀석의 큼지막한 흉터가 원인일 거야.”
이판사판으로 달려들려는 그를 제압한 주리는 자신들이 의적이라 설명했지만, 그딴 건 들어본 적도 없다며 대차게 까였다. 팀이 도적 털어먹는 도적이라 설명하고 나서야 알 것 같다는 반응에 약간 침울해졌다. 그렇다, 주리와 팀은 와딜리 의적단이란 이름의 자칭 의적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 활동한지 1년도 안 됐다지만, 그래도 우리가 잡은 도적이며 도와준 사람이 꽤 있는데 말이야….”
아쉬움 섞인 한숨을 뱉는 주리. 그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도적들을 물리치고 여행자나 상인을 구해준 건 맞지만, 도적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벗겨 먹고 도움 받은 이들에게 약간의 성의를 요구한 것이다.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요구 받는 입장에선 다르게 느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단 둘이서 도적떼를 박살내는 험상궂은 2인조 앞에서 못 주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팀 얘는 어디 간거야?”
주리는 보이지 않는 동업자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장작을 넉넉하게 넣은 모닥불이며 자기 전엔 없던 모포를 덮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은근히 주변을 챙기는 그가 해놓은 게 분명한데 정작 본인이 안 보인다.
‘볼일 보러갔나?’
대충 납득하고 드러누우려는 그때, 뒷골에 쎄한 느낌이 스쳐갔다.
“이건… 요술?”
요술, 술법, 마법 부르는 법이나 쓰는 법은 다르지만, 마력을 사용한다는 기본은 같다. 이 신묘한 기술은 사용하면 파장이 발생하는데 선천적으로 예민하거나, 감각을 단련하면 이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주리는 지금 그 파장을 느낀 것이다.
‘… 착각인가?’
너무 짧은 순간이기도 하고 숙취 탓에 확신할 수 없었다. 단순히 뒷골이 땡긴거라 생각하고 드러누운 주리였지만, 얼마 못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별일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기적 어기적 마력이 느껴진 곳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걱정이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필 느껴진 방향이 비샤라의 일행이 있는 천막인 쪽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저랑 같이 있던 남자애요? 아, 고객님 말하시는구나. 걔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어린 게 성질도 더럽고 마법도 장난 아니에요!”
술김에 한 이야기니만큼 온전히 믿을 순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열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으… 추워라.”
사막의 밤은 본래 추운 법이지만, 이 천막 근처는 아예 입김이 나올 정도로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닭살이 돋고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것까지 들리면… 이젠 뭐 아니라고 할 수가 없네.”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모래 위를 뛰고, 날붙이가 날아가 꽂힐 때 들리는 소리였다. 거기에 더해 둔탁한 파열음까지… 이건 분명 싸움이 난 것이리라. 마법을 못 쓰게 하는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수갑과 족쇄를 달아놨는데, 어떻게 풀어낸 건지 궁금해하며 천막 입구에 도착한 그때였다.
-펑!
폭발음과 동시에 천막 안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리는 박수를 쳤고 손바닥에서 피어오른 화염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닿는 곳 마다 하얗게 얼려버리는 광풍 앞에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휘날리는 불꽃. 하지만 결국 불꽃의 갑옷은 꺼지지 않았고, 주변이 꽁꽁 얼어붙는 와중에 주리만은 무사했다.
-짝짝
두 번의 가벼운 박수로 화염을 꺼뜨린 그녀가 천막 안에 들어가려는 그때였다.
“아 죽겠다….”
-퍽!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소년의 머리통을 반사적으로 후려쳤다. 맥없이 쓰러지는 상준. 의식이 없는 걸 확인하고 천막 안을 들여다 본 주리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팀을 본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명줄 한 번 질기네 질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엔 안도감에 젖어있었다.
“으… 머리야….”
최근 들어 너무 자주 정신을 잃는 것 같은데, 맨날 육포 쪼가리 같은 거만 먹으니 기가 허해졌나? 막 일어난 참이라 시야가 희끄무레하다.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움직이자….
-절그럭
“또 이거야?”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지구에서는 직접 본 적도 없는데 이세계에 넘어온 뒤론 벌써 세 번째 착용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쓰다보면 차갑고 딱딱한 착용감에 익숙해져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낯선 땅을 방랑하는 자가 바라노니 틈새를 매꾸고 속박을 없애라.”
‘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의 발동은커녕 마력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상준은 당황했다. 그런 소년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뭐래냐?’
대뜸 눈앞에 나타난 2미터도 넘을 것 같은 거인. 딱 벌어진 어깨며 근육질 몸은 자연스레 보디빌더가 떠올랐다. 몸과 따로 노는 가녀린 목소리나, 남자는 없는 신체부위가 아니었으면 성별을 헷갈릴 듯한 외모가 압권이었다.
“마법이 안 써져서 놀랐나?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엔 마법을 불발시키는 결계가 쳐져 있다. 라고 하십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근육 덩어리 뒤에서 지지가 나타났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상준은 반쯤 열렸던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꽁꽁 묶인 채 목에 칼이 들어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화 많이 났나보네.’
목에 들이밀고 있는 흉기만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건만,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의 눈을 보니 자신에 향한 유감스러운 감정이 대단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
당장 찌를 것 같은 살기등등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남자는 뒤쪽에 있는 거인에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이니 풀어줍시다~ 같은 말을 해주면 참 고마울텐데.’
“그냥 죽입시다, 누님. 이라고 하십니다.”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슬픈 예감은 어째서 빗나가질 않나.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상준은 그가 자신이 쓰러뜨린 칼잡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저 놈이 누님이라고 하는 걸 보면 같은 편일텐데…. 하나 잡는 것도 개고생 했는데 2:1로 싸워 이길 자신은 당연히 없었다. 심지어 마법도 못 쓰게 수를 써놓은 상태다.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죽겠지.
‘그 녀석이 나온다면 다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안 보이는 붉은 머리의 그녀를 떠올리는 상준. 하지만 마실이라도 나간건지 님은 감감무소식이다.
‘죽일 거면 굳이 깰 때까지 놔둘 리가 없어.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라는 게 고문만 아니길 바라는 상준. 이세계인 만큼 상식이 다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납치 고문을 즐기는 미친 변태가 도처에 널려 있진 않겠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을 품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나는 주리고 너한테 화가 많이 난 저 친구는 팀이야. 우린 이 사막에서 의적단을 하고 있어. 라고 하시네요.”
지지의 실시간 통역을 들은 상준은 기대감을 품었다. 의적이라면 나쁜 놈들을 해치우고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를 돕는 사람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내 목을 그어버릴 것 같은 오드 아이 형씨도 그렇고, 우락부락한 거구에 안대까지 끼고 있는 누님도 인상은 무섭지만 마음만큼은 선량할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뭔 얼어죽을 의적이래? 홍길동이냐?! 로빈 후드냐고! 상판대기는 인신매매단 같구만!
‘제발 좀 되라!’
어떻게든 마법을 써보려 안간힘을 짜내보지만, 마력은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점점 상준의 마음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주리는 말했다.
“당장 죽이거나 하진 않을테니까 너무 겁먹지마. 라고 하십니다.”
‘퍽이나 그러겠다.’
뛸듯이 기뻐할거라 생각했던 걸까 심심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리. 화끈하게 반응해준 것은 다른 쪽이었다.
“누님! 살려준다뇨? 그건 규칙에 어긋납니다!”
팀의 날선 반응에 주리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달래듯 말했다.
“그래그래,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알겠는데, 좀 들어봐. 규칙 5번 말하는 거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은 반드시 되갚아준다는 거.”
알만한 사람이 대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3번은 뭐였지?”
“아니 누님…!”
“3번은 뭐였지?”
득달같이 반박하려는 팀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묻는 주리.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인재는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그래, 맞아. 나는 저 녀석을 우리 의적단에 들어오게 할 생각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뭔데? 알아듣질 못하니 상황 돌아가는 걸 모르겠네.’
뭔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분위기가 급격히 험악해졌다. 의견 충돌이 난 것 같은데 통역이 없으니 이쪽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다.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남자가 아예 뒤돌아 선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라 예측할 뿐. 상준은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은 가축 미만이라고 항상 말하는 건 누님이잖습니까. 대체 저 놈한테만 다른 잣대를 갖다 대는 건 왭니까?”
눈을 시퍼렇게 뜨는 팀에게 주리는 사뭇 냉정하게 말했다.
“쓸만해 보이니까.”
잠시 멍하게 있던 남자는 금새 인상을 쓰며 말했다.
“마력을 감추는 거 하나는 제법입니다만, 그거 말고는 전부 어설퍼요. 마법을 어디서 배운건지 마력 흐름이 비효율적이고, 몇 번만 써도 몸에 부담을 주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런 녀석이랑 같이 활동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상준을 가리키며 묻는 그에게 주리는 말했다.
“널 이겼으니까.”
이마에 핏대가 선 팀의 반박을 받지 않고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나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저 소년이 무슨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 몰라. 다만 네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투박한 것 같은데, 아직 어린만큼 성장할 가능성이 있지. 더더욱 영입하고 싶어졌어.”
“전 그때 전력이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제대로 붙었다면….”
“그럼 그렇게 하지 그랬어.”
주리는 한쪽뿐인 눈으로 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할말이 많은 듯 그는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인 사막에서 만약은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저 소년이 아니라 도적놈들한테 졌다면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그 누구도 아닌 팀 자신의 판단이었다. 상대를 얕보다 진 것이다. 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씩씩대는 그에게 주리는 표정을 풀고 평소처럼 말했다.
“이기고 진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구해준 은혜도 모른다고 했던 거 있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너도 오해가 있던 것 같더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는 팀에게 그녀는 마저 설명했다.
“자기 얘기하는 줄도 모르고 눈알만 굴리는 거 봐라. 쟤 공용어도 모르더라. 같이 있던 가이드한테 물어보니 포타스 말은 안다는데 바다 건너편 말을 어떻게 아는 건지…. 여튼 네가 하는 말 쟤는 하나도 못 알아들은거야.”
뭐야, 그런거였어? 놀란 눈으로 상준을 돌아보는 팀에게 주리는 말했다.
“그리고 너, 쟤랑 마주쳤을 때 네 꼴이 어땠는지 생각은 나냐?”
고개를 갸웃거리는 팀을 보고 주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피범벅에 시체를 들고 있었다는 걸 들은 그는 머쓱해졌다.
“그,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지도….”
팔다리가 구속된 채 처음 보는 곳에서 깨어났는데, 피칠갑을 남자가 피 묻은 칼과 시체를 들고 다가온다면… 누구라도 경계하지 않을까. 팀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주리는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자, 너한테는 2가지 선택지가 있어. 의적단에 들어와서 우리랑 같이 일하거나, 지금 죽거나. 라고 하십니다.”
‘그게 무슨 선택지야?!’
일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지금의 상준에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 새로운 멤버가 들어왔으니 오늘은 파티다!”
“적당히 마시세요, 누님.”
먹고 마실 생각에 즐거운 사람과 못 마땅한 표정을 짓는 사람. 그 사이에서 상준은 생각했다.
‘수갑이라도 풀어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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