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아, 죽겠다.”
이마에 흐르는 비지땀을 닦으며 상준은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땅바닥과 널부러진 도적들.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증명이었다. 그는 저려오는 왼손을 반대 손으로 주무르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곳엔 파들파들 떨고 있는 상인들과 흉악한 외견의 남녀가 있었다.
“이야~ 큰일 날 뻔 하셨네. 우리 아니었으면 이거 싹 다 털렸겠어?”
팀이 냑타 위에 실린 짐을 툭툭 치며 말했다. 본인은 말 그대로 다행이라는 뜻이었지만, 이마에 있는 큼지막한 흉터를 비롯해 함상궂은 인상이 말뜻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러게. 말 잘했다 팀. 장사꾼 양반, 운이 좋아. 우리 와딜리 의적단이 아니었으면 댁은 저놈들한테 탈탈 털렸을테니까.”
“아, 아무렴요. 덕분에 이렇게 털끝 하나 안 다쳤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던 상인은 은근슬쩍 냑타의 고삐를 잡았다. 자연스레 가던 길 가려던 그를 막아선 주리는 한마디 던졌다.
“생색 내려는 건 아닌데 좋은 일을 했으면 그에 맞는 보상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손을 까딱거리는 모습이 칼만 안 들었을 뿐 강도가 따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저런 노골적인 제스처를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주리 앞에 서있는 상인도 그러했다.
그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두둑해 보이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돈주머니를 받아든 주리는 팀에게 던졌다.
“성의 확실하네.”
받자마자 내용물을 확인한 팀. 잽싸게 돈 계산을 끝내더니 그는 만족스러운 죠정을 지었다. 주리와 상인이 남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기는 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간 끝에 있는 건 상준이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네~ 그래 가지고 100명 채울 수 있겠어? 라네요.”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저 너머에서 숨어있던 지지가 통역했다.
“신경 끄시지?”
잔뜩 구겨진 상준의 얼굴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짐작한 그는 코웃음치며 자릴 떴다.
-뿌드득
안타깝게도 상준이 할 수 있는 일은 애꿎은 치아를 마찰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가 자칭 의적단과 함께 다니며 일을 돕는 것은 계약 때문이었다.
“우리랑 같이 일해볼 건지, 아니면 지금 죽을 건지 골라.”
선택을 강요 당한 그날, 생존을 위해 몸으로 떼우기로 한 상준에게 주리는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마도구 같은 이세계 물건에 대한 조예가 없는 상준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만지고 있는 게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걸 단숨에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와, 글자가 불타고 있어.’
양피지 위에 적힌 글자가 불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불인지조차 상준은 알 수 없었다. 겉보기엔 영락 없는 불이었지만, 양피지는 타지 않았고 만져도 뜨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화의 계약서 입니다.”
“업화의 계약서?”
그게 뭐냐는 듯 되묻는 상준에게 지지는 설명했다.
업화의 계약서.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 마도구로 여기에 대고 맹세한 계약을 어겼을시, 위반자의 몸이 불타게 된다.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업화는 대상이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
‘더럽게 살벌한 물건이었잖아.’
신기한 장난감 보듯 만지작거리던 상준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계약서라 함은 종이나 글자보단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과연 어떤 무리난제를 제시할지 긴장하고 있던 그때, 지지의 통역을 들은 그는 귀를 의심했다.
“3개월 동안 우리를 도와 도적 100명을 잡으면 풀어주겠다. 만약 달성하지 못할 경우 죽을 때까지 의적단에 귀속되는 거다. 라고 하시네요.”
너무 간단한데?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닐까 의심하는 상준이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까짓 거 금방 끝내버려야지.’
그는 자신이 있었다. 사막을 여행하면서 강도질 하려는 놈들을 몇 번이고 마주쳤고 물리쳤다.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 보다 훨씬 위험한 마수도 얼음 덩어리로 만들었다. 100명이면 제법 많지만, 생포도 아니고 죽이든 살리든 무력화만 시키면 되는 거라면 일주일 안에 끝날 일이다. 금새 자유를 찾을거라 생각한 상준이었으나….
“염병… 이런 식이면 3달은커녕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해!”
기지로 돌아온 상준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일주일간 그의 성과는 0명에 경고 1회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간파 당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상준이 마법을 쓰려고 할 때마다 예상했다는 듯 한 발 먼저 움직이고, 결정타만 먹이면 되는 적을 노려도 그것마저 가로채 갔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방랑자가 바라노니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라.”
열 받은 소년은 이판사판으로 광범위 마법을 써보았지만….
-짝!
박수소리와 함께 나타난 화염의 벽에 막혔다.
-풀썩
두 다리가 마비되어 쓰러진 상준에게 주리는 경고 했다.
“너, 경고야. 두 번은 없어. 아군까지 휘말리게 하지마. 라고 하시네요.”
‘아군은 개뿔, 계약으로 묶어두고 평생 부려먹을거면서….’
적당한 마법은 간파 당하고 위험을 무릅 쓰고 광역기를 써도 막힌다. 심지어 이젠 시도조차 못하게 됐으니… 상준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이대로면 여기서 뼈를 묻게 생겼어.’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막내야~!”
“또 시작이네.”
입장상 의적단의 막내인 그는 기지에 있을 땐 온갖 잡일을 맡고 있다. 식사나 설거지는 물론이고 세탁, 냑타 관리에 하다하다 선배들 안마까지 해야 한다. 허구한 날 찾아대니 저 막내야 소리는 아예 외워버렸다.
‘진짜 알뜰살뜰하게도 부려먹네.’
대자로 뻗어 곯아떨어진 두 사람을 보고 한숨을 내쉰 상준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곳엔 책상을 펴놓고 기다리는 지지가 있었다.
“자, 오늘도 한 번 공부해 봅시다.”
짐꾼이자, 통역인 그에게 의적들은 특명을 내렸으니, 상준의 계약 기간인 3개월 안에 공용어를 읽고, 쓰고, 말하게 하라는 것. 당연히 거부권따원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매일 밤 필사적으로 상준을 가르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약 기간인 3개월 안에 상준이 공용어를 떼지 못하면, 전용 통역사로 지지 역시 잡아둘 것이라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주경야독이 따로 없네.’
신음을 흘리며 드러누운 상준은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이 자칫하면 죽을 때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몸에 쌓인 피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잘도 잔다~]
분명 잠들었을 터인 그의 귀에 또렷한 한 마디가 들렸다. 할아버지라기엔 높고, 할머니라기엔 낮은 기묘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오밤중에 뭔… 으악?!”
듣도 보도 못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상준의 얼굴에 쏟아지는 물벼락. 뜬금 없는 찬물 세례에 화가 났지만,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입에서 쏟아져 나온건 욕설이 아닌 감탄이었다.
“이건 대체 무슨…?”
꿈일까? 아니면 환각인가? 나는 분명 누추한 천막 안에서 잠들었다. 그런데 이 정자는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좀 떨어진 곳에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가 있고, 군데군데 나무도 보인다. 모래 먼지 풀풀 날리던 사막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에 머리가 띵해졌다.
-쏴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는 소년에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멍청하게 입 벌리고 있으면 누가 밥이라도 먹여준다더냐?]
“아까부터 자꾸 누구야?!”
눈에 불을 켜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상준이었지만, 그의 주위에 있는 거라곤 나무와 풀, 바위뿐이었다.
[악에 차서 눈깔에 힘주니 뭐가 좀 달라지느냐?]
“당신 누구야? 날 여기로 부른 게 당신이야?! 어디에 숨어서 나불대는거야?!”
[할 줄 아는 건 없는 놈이 궁금한 건 많구나.]
거듭되는 조롱에 슬슬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상준이었지만, 애써 가라앉히며 침착을 유지하려했다. 하지만 그것도 옆에서 자극하지 않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능력 없는 놈이 성질까지 더러우니 글렀네 글렀어.]
“이 노인네가….”
스스로 나타나게 할 생각따윈 접어버렸다. 직접 잡아서 무릎 꿇게 만들기로 결정한 상준. 그는 즉시 주문을 외웠다. 자신의 반경 수십 미터를 얼려서 잡아내겠다는 생각으로 마력을 끌어 모았다.
[예끼, 이놈아! 어딜 개수작이냐!]
“컥!”
상준의 복부에 꽂히는 묵직한 한 방. 모였던 마력은 모조리 날아가고, 주문도 외울 수 없다. 숨이 제대로 안 쉬어져 부들대는 소년에게 노인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주 광고를 해라. 넘실거리는 마력이 네가 무얼하려는 건지 빤히 보여주는구나.]
겨우 숨을 고르고 일어서려는 상준에게 노인은 하던 말을 이어갔다.
[마법 한 번 쓰는데 낭비가 심해. 한 모금을 위해 물병에 든 물을 죄다 부어버리면 애꿎은 바닥만 더러워지는 것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죄 없는 젊은이 데려다 때리고 욕하면서 변태적인 취향이나 만족하려거든 다시 있던 곳으로 보내주….”
-철썩!
상준의 말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는 찰진 소리를 내는 타악기가 되었다.
[떼끼, 이새끼야. 아주 그냥 못하는 소리가 없어! 마법 실력만큼이나 입버릇도 형편 없구나. 너는 마법 이전에 그놈의 버르장머리부터 고쳐놔야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속이 좀 풀렸는지 주먹을 거둔 노인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에헴, 나답지 않게 흥분을 했구만. 네가 매를 부른 것이니 너무 억울해 말거라.]
할 말은 많았지만, 눈두덩이가 시퍼래진 상준은 말을 가리는 법을 배운 상태였다.
“그, 영감… 님은 뉘신데 절 여기로 데려온 겁니까?”
머뭇머뭇 질문을 꺼낸 상준에게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그런 것보단 두 달 하고 몇 주 뒤면 코가 꿰일 네 팔자가 더 중요하지.]
‘내가 계약을 했다는 걸 알고 있어?’
자신을 포함해서 넷 밖에 모르는 일을 이 노인은 어떻게 알고 있는걸까. 더더욱 그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상준이었지만, 캐묻는다고 말해줄 것 같지도 않기에 빠르게 다음 용건을 말했다.
“사정을 좀 아는 것 같은데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요. 내일도 할 일이 많아서 빨리 돌려보내 줬으면 합니다만.”
[평생 그렇게 살래?]
“… 뭐요?”
[평생 그렇게 살거냔 말이다. 남 밑에서 종노릇 하면서 모래 먼지나 먹으면서 살거냐고.]
안 그래도 매일 고심하는 문제를 손가락으로 홍시 찌르듯 후벼버리니, 상준은 다시 한 번 발끈했다.
“영감탱이야 미쳤어?! 그렇게 살고 싶은 인간이 세상에 어딨어!”
질러놓고 아차 싶었는지 가드를 올린 상준에게 날아든 것은 주먹이 아닌 일침이었다.
[어떻게 말이냐? 매일 허탕이나 치는 주제에 뭘 하겠다는거냐. 계획은 있느냐? 가능성이 있느냐? 근거는 있느냔 말이다.]
“그건…!”
악이라도 지르려던 상준이었지만, 신맛이 그러하듯 혀끝에서 부들대다 녹아 사라졌다. 이대로 가면 자신은 평생 종노릇이나 하게 될 거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뭘 어쩌란 말인가. 자기 딴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무엇 하나 나아지는 게 없는 것을. 말문이 막힌 그에게 노인은 말했다.
[방법이 없느냐, 혼자선 못하겠느냐? 그렇다면 배워라. 배우고 익혀서 개선해라. 내가 널 가르쳐주마.]
여전히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소년은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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