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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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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어디냐… 앞? 아니면 뒤?’

 

  복싱을 하듯 양팔로 가드를 올린 채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상준. 주변에 있는 거라곤 나무, 바위, 폭포 같은 자연물 뿐이었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는 이윽고 자신의 발아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죽어!”

 

  땅에 닿기 직전 소년의 팔은 얼음으로 감싸였고, 그 모습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건틀릿을 낀 것 같았다.

 

  -쩍!

 

  건틀릿이 땅과 충돌하자마자 소년을 중심으로 냉기가 퍼져나갔다. 반경 십수미터 가량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빙판의 중심에서 상준은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의 시선은 사람의 형태를 한 얼음 덩어리에 꽂혀 있었다. 달리는 모습 그대로 급속냉동된 역동적인 얼음 조각상을 빤히 보던 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꼴 좋다.”

 

  [자조하는 거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어색한 노인의 목소리. 들릴 리 없는 말소리에 당황한 상준은 급히 방어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빡!

 

  “얽?!”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육중한 충격. 그것은 상준의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대로 얼굴을 지면에 처박았다.

 

  [미끼에 홀라당 넘어가는 꼴이 아주 좋구나.]

 

  정신을 잃은 상준을 들어올린 노인은 그대로 어딘가로 향했다.

  -쏴아아

 

  폭포 앞에 멈춰선 그는 상준을 냅다 집어던졌다.

 

  -풍덩

 

  차디찬 계곡물에 얼굴부터 처박힌 상준은 제철 숭어처럼 물 위로 솟구쳤다. 소년과 숭어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상욕을 한다는 점이리라.

 

  “이 노친네야 사람 죽이려고 환장했어?!”

 

  [그 놈의 입이 방정이구나!]

 

  “컥!”

 

  옆구리를 걷어차인 상준은 빙글 돌며 날아가더니 뭍으로 떨어졌다. 맞은 곳을 문지르며 중얼거리는 그에게 노인은 말했다.

 

  [한참 멀었구나. 이런 간단한 함정에 걸리다니 어설프게 느끼는 수준이라 그런 것이야. 제대로 마력을 볼 수 있었다면 간파했을 것인데….]

 

  “매일매일 얻어맞아가며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겁니까? 이것도 한달 걸려서 겨우 감 잡은 건데.”

 

  그렇다. 상준이 이 협곡에 불려온 것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온 날부터 밤낮 없이 수련하다 기절하고 일어나면 다시 수련하는 것의 반복. 보이지 않는 공격을 막고 반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련과 폭포수를 맞으며 몸 안에 마력을 조절하는 명상 수련이 주요 일과였다.

 

  “댁… 영감님 덕분에 제법 성장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이래선 부족해요.”

 

  계곡물을 떠먹는 상준에게 노인은 물었다.

 

  [부족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조바심을 내느냐?]

 

  상준은 다 알면서 뭘 묻느냐는 태도로 답했다.

 

  “그야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여기 막 왔을 때에 비하면 확실히 마법 쓰는 것도 능숙해졌고 맷집도 늘었지만, 그놈들을 이기기엔 부족해요. 이제 계약날까지 두 달도 안 남았는데 이 속도로는 도적 100명 잡기는 어림도 없다구요.”

 

  고민하는 걸까? 잠시 답이 없던 노인은 이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조바심 내면 될 것도 안된다. 때론 우직하게 견뎌야 할 때도 있는 것이야. 자, 이제 명상하러 가거라.]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은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되네.’

 

  속 편한 늙은이라며 터덜터덜 폭포로 향하던 상준은 이상함을 느꼈다. 나무가 휘어지고, 폭포가 비뚤어진다. 세상이 기울어지는 건가? 아니다, 쓰러지는 건 자신이었다.

 

  “좀 일어나라고요!”

  “이게 무슨….”

  “무슨… 이 아니라 아침이에요! 식사 준비 하셔야죠.”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천장과 익숙한 목소리에 상준은 당황했다. 나무도, 폭포도 사라졌다. 계곡 특유의 맑은 공기도 흙먼지 섞인 퀴퀴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한 달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설마 그게 다 꿈이었다고?’

 

  당황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에게 감상적인 기분에 잠길 여유따윈 없었다.

 

  “아, 빨리 일어나라니까요?! 늦어지면 저까지 혼난다고요!”

 

 소란스럽게 구는 지지의 손에 끌려가려던 찰나 한동안 못 봤던 얼굴이 나타났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하며 등장한 건 팀이었다. 이마에 난 큼직한 흉터와 험상궂은 면상을 보고 있자니 이제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상준은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

  “오늘은 고기가 먹고 싶으시다네요.”

  “하아….”

 

  대답 대신 한숨을 뱉은 그는 조용히 냄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든 게 허상이었다는 허탈감이 몸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런 건 현장에 가고 나서 싹 사라졌다.

 

  “오늘은 운이 좋네? 다음 없겠지만. 라고 하십니다.”

 

  지지의 통역은 상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도적을 잡은 것이다. 비록 99명을 더 잡아야 하지만 0에서 1이 된 건 장족의 발전이었다.

 

  ‘뭔가 달랐어.’

 

  돌아가는 냑타 위에서 저릿한 종아리를 주무르며 생각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착각이 아니었다.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감각적인 거라 스스로도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마법을 펑펑 써댔으면서 뻗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변화가 있었다는 건 명확했다.

 

  ‘꿈이 아닌건가?’

 

  하룻밤 사이에 이런 극적인 변화가 말이 되는 걸까.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는 사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갔던 건 아닐까?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한편, 마법이나 이세계는 말이 되고? 오컬트, 창작물 속에나 있던 것들이 실존하는 세상에서 지구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

  “막내야, 집에 왔는데도 타고 있을만큼 냑타가 좋으냐? 라고 하시네요.”

  “예~ 갑니다 가요.”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상준은 늘 하던대로 집안일을 시작했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

 

  전에 비해 확연히 피로감이 줄었다. 여전히 드러눕고 싶긴하지만, 이전까진 눈꺼풀이 천근 만근이라 돌아오면 거의 눈을 감고 있을 정도였다.

 

  “자, 오늘은 태도가 좋으니 조금 일찍 끝내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세요.”

 

  말을 마친 지지는 책상을 치우고 자신의 이부자리를 폈다.

 

  ‘역시 그건 그냥 꿈이 아니었어.’

 

  이젠 확신할 수 있다. 어제 그 일은 꿈이 아니다. 계곡에서 괴팍한 노인네한테 수련이랍시고 두들겨 맞았던 것도, 하룻밤 사이에 한 달 분량의 실전 압축 수련을 한 것도 전부 진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인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 말이다.

 

  ‘부족해.’

 

  너무너무 부족하다. 한 달간의 수련으로 나는 분명 성장했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오늘의 성과는 내 실력보단 의적놈들의 방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들이 작정하고 훼방을 놓는다면 다시 한 번 틀어막힐 것이다. 나에겐 더욱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한 번만 더 그곳에 갈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상준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만 일어나라, 이 애송이 녀석아!]

 

  -딱!

 

  노인이 휘두른 작대기가 소년에 머리에 맞았고 그는 눈을 부릅 뜨고 소리쳤다.

 

  “아프잖아, 이 노친네야! 악!”

 

  작대기가 상준의 입과 격한 만남을 가졌고, 고통의 몸부림치는 그에게 노인은 물었다.

 

  [수련의 결과는 어떠했느냐?]

 

  “실력은 분명히 늘었지만 부족했어. 난 더욱더 강해져야해.”

 

  [강해지고 싶다라…. 하긴, 젊은 놈이 노인 하나도 못 이기는데 아무렴 수련해야지.]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상준은 대답했다.

 

  “그러니까… 빨리 시작하자고요. 이번에야 말로 꽁꽁 얼려줄테니까.”

 

  [헹, 100살도 안된 애송이한테 질 것 같으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거지!”

 

  그렇게 다시 한 번 수련의 나날이 시작됐다.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더니 이런 걸 숨기고 있었구나.]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5년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팅팅 부어오른 얼굴로 말해봤자 폼이 안 난다만… 그래, 인정하마. 너는 강해졌다.]

 

  반신이 얼어붙어 팔이나 날개, 얼굴의 절반이 드러난 그녀를 보며 상준은 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덕분에 많이 배웠고 그동안 고마웠어 아리오나.”

 

  투명화 마법을 푼 아리오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되바라진 소년의 진심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성장한 제자를 본 스승의 감정인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리오나는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넉살 좋은 투로 말했다.

 

  [애송이가 폼 잡는 법만 늘었네~]

 

  더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악수를 나눴고, 그것은 콤비의 부활을 뜻했다. 계약 만료까지 남은 기간은 23일. 99명이나 더 잡아야 하지만, 더 이상 상준에게 초조함이나 불안따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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