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후덥지근한 천막 안에서 홀로 앉아있는 소년. 그는 명상을 하듯 가부좌를 튼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오늘도냐?”
그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오는 지지에게 물었다.
“그렇죠 뭐, 오늘도 대기하랍니다.”
“오늘도….”
실망한 기색이 신경 쓰이는지 지지는 대뜸 위로를 건냈다.
“내일은 또 다를 수 있잖아요. 그, 힘내요!”
“그래. 고마워.”
차분하게 대답한 상준이었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폭포 수행 경험이 없었다면 당장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노골적이네~]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아리오나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똥줄 탄다고 이런 식으로 작정하고 훼방 놓을 줄은 몰랐어.’
[두 달 동안 1명밖에 못 잡던 애가 갑자기 하루에 10명씩 잡아대니 긴장할만도 하지~]
‘그렇다고 기지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할 줄은…. 이건 반칙 아니야?’
[그러면 안된다는 조항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이런 식의 꼼수를 쓴다면 이쪽도 똑같이 돌려줘야지.]
‘어떻게?’
[자, 한 번 들어봐….]
아리오나의 의견을 들은 상준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 그게 진짜 될까?’
[다른 방법이 없잖아?]
‘하긴, 이제 3일 밖에 안 남았는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지.’
“야, 나 나갔다 온다.”
“화장실 가는 거 일일이 보고하지 마세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젓는 지지를 뒤로 한 채 상준은 천막을 빠져나갔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이틀 뒤였다.
“갑자기 사라졌나 싶더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막내가 일거리를 물어왔는데 왜 그리 성질을 내시나~”
실실대는 상준에게 팀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미친놈이! 기지로 적을 유인해놓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우리 선배님들이 기지에서 꼼짝 안하고 자빠져 놀길래, 나라도 나서야겠다 싶어서 그런거지.”
“너 이…!”
더 따져물으려는 팀의 어깨를 잡은 주리는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우선은 이 난리를 정리하는 게 먼저다. 막내의 처우는 그 다음이다.”
‘눈빛 살벌한 거 보소.’
씹어먹어도 시원찮은 놈을 보는 듯한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상준은 자신이 만든 난장판으로 뛰어들었다.
“죽어라 이 개자식들아!”
“어이쿠, 독기 바짝 오른 거 보게.”
“아니 이 새끼들이 천막을!”
와딜리 의적단에 털린 적 있는 놈들만 골라서 데려온거라 그런지 효과가 확실했다. 정면으로 달려들어도 이기기 힘든 걸 아는 도적들은 역할을 분담했다. 다수가 주리와 짐에게 달려들어 시선을 끄는 사이 몇 놈이 몰래 불을 놓은 것이다. 두 사람은 불을 끄고 싶겠지만 적들이 그걸 두고 볼리가 없다.
‘잘 한다 잘 해~ 싹 다 태워버려라~’
꼬질꼬질한 천막이 타면서 나는 구린내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기분은 유쾌 통쾌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이 마냥 쉽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짝
4, 50명이 뒤섞여 날뛰고 있는 이곳에서 그 박수 소리만은 명확하게 들렸다.
“아악!”
“사람 살려!”
어디선가 솟아난 거대한 불이 쓰나미처럼 몰려왔고, 나아가는 길에 있는 모든 걸 집어삼켰다.
“성난 맹화도 잠재우는 빙경(氷鯨).”
거대한 얼음 고래와 화염의 파도가 맞부딪혔고, 엄청난 양의 마력이 수증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폭발음이 고막을 때렸다. 시각과 청각이 모두 차단 당한 틈을 노린 일격이 상준을 노렸다.
“위험하잖수 아줌마!”
“운이 좋군. 아니지, 감이 좋은건가?”
피하느라 자세가 무너진 상준에게 날아드는 수많은 불덩이. 고작 한 사람에게 가하기엔 차고 넘칠만큼의 화력이 쏟아졌다.
“아깝군 아까워. 잘 키우면 제법 쓸만했을텐데….”
“그런 것 치곤 인정사정 없던데?”
”너 이 녀석 어떻게?!”
분명 끝장났을거라 생각한 녀석이 살아있다. 심지어 자신의 뒤를 잡은 것에 놀란 주리였지만, 서프라이즈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차디찬 설산 꼭대기의 숨결이여 나의 적을 얼려라.”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냉풍. 피부를 뚫고 척수를 급속 냉각 시키는 듯한 고통이 주리의 몸에 파고 들었다. 완벽한 기습에 저항은 불가능 했다. 여기서 의식이 끊어진다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칫,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혀를 차며 마법을 캔슬한 상준. 몸을 피하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에 칼이 날아와 꽂혔다. 그대로 있었으면 주리와 저승길 길동무가 됐을 것이다.
-휘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발차기는 정확히 소년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자세로는 제대로 막을 수 없는 걸 알기에 상준은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잔재주를…!”
“두께 40센치짜리 얼음도 부수는 살인 킥을 맨몸으로 맞을 순 없잖아?”
“역시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건 저기 얼어있는 너네 누님한테 가서 따지시고.”
눈알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팀의 공격은 매서웠다. 머리가 뜨거워진 만큼 공격 궤도는 단순했지만, 스피드와 파워가 단점을 상쇄했다. 급조한 방어벽은 부서져 버리고, 집중해서 마법을 쓰기엔 연타가 너무 빨랐다.
[이러면 지구전인데 저쪽은 체력이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이네. 수련 안 했으면 이미 마력 중독으로 녹다운 이었겠네. 제자의 부족한 부분을 정확하게 메꿔주는 참교육자…!]
‘자화자찬은 나중에 하고 좋은 방법 없어?’
[예끼, 이놈! 그간의 수련은 단순히 마력에 대한 적응이 끝이더냐.]
‘그야 신기술도 좀 만들기도 했는데 지금 도움 될만한 게… 아.’
[그래, 네가 훈련을 마칠 수 있었던 건 공격과 방어만 하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지.]
지구전으로 가고 싶지 않은 건 비단 상준만이 아니었다. 주리의 용태를 살피고 싶은 팀의 공격은 점점 격렬해졌고, 그 조급함과 간절함 사이의 마음이 원동력이 된 걸까. 결국 방어 마법과의 속도 싸움을 앞질렀다.
“끝이다!”
그가 노리는 것은 상준의 복부, 하지만 칼날이 내장을 휘저어 놓는 일은 없었다.
“으… 아파라. 그래도 살았으니 세이프!”
옆구리를 붙잡은 채 실실대는 상준을 보는 그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인정한다. 넌 처음 봤을 때랑은 수준이 다르다.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하겠다.”
“웩… 칼에 묻은 피는 왜 핥는거야?!”
상준의 질색했지만,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금새 알 수 있었다. 팀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키도 커지고 울락부락한 근육질이 되는가 싶더니 피부가 안 보일 정도로 털이 자라났다. 얼굴도 인간보다는 늑대나 여우 같은 갯과 짐승과 비슷해졌다.
[아하~ 어려 보이는 외견에 비해 꽤나 강하다 싶었는데, 저녀석 혼혈이었구나?]
‘혼혈? 뭐랑 섞인거야?’
[덥수룩한 털 하며 날카로운 발톱, 이빨에 무엇보다 얼굴을 보아하니 웨어울프겠지.]
‘웨어울프족 특징이 뭐더라?’
[일단 생긴 것처럼 후각이 뛰어나지. 지들 말로는 천리 너머에 있는 적도 추격할 수 있다나~ 거기다 무지 빨라. 괜히 물 속의 나가, 비행 중인 하피와 함께 육해공 최속으로 묶이는 건 아니거든~]
아리오나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상준은 웨어울프의 민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라졌어?!”
[그리고 철판도 찢는 발톱과 이빨은 무기가 필요없을 정도지.]
“확실히 그 말대로 인 것 같네….”
뒤늦게나마 회피한 상준이었지만, 그의 팔뚝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팔을 뜯어낼 셈이었는데, 잘도 피했군.”
“내가 좀 날래지.”
애써 당당한 척 하고 있지만, 소년의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공격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뒤로 피한 것이기에 두 번의 행운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히 불안한 그에게 떨어지는 비보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웨어울프는 원래 대륙 북쪽에서 사는 종족이야. 저 북슬북슬한 털을 보면 알겠지만, 추위나 냉기 계통 마법엔 유독 강해.]
‘종합하면 나는 무지 불리한 상황이라는 거네?’
[뭐, 그렇지~]
‘이 상황을 해쳐나갈 좋은 방법 있어?’
엄지를 척 올린 아리오나는 딱 한 마디 했다.
[굿 럭!]
‘평소에 내 머릿속에서 뭘 보고 있는거야.’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솔직히 너랑 저 녀석의 상성은 최악이야. 네 주력인 얼음 마법으론 타격을 주기 힘들거고, 속도전을 하려고 해도 밀리겠지. 그런데도 해볼거야?]
적재적소라는 말이 있듯 여기선 아리오나에게 맡기는 게 수월한 길일 것이다. 실력 면에서는 물론이고, 그녀가 다루는 화염 마법이면 저 북슬북슬한 털을 전부 그슬려버릴테니까. 몸을 맡기면 부작용이 있지만, 수련을 마친 지금의 나라면 예전만큼 심하지는 않을거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고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지.”
놀란 눈을 하던 아리오나는 또다시 어설픈 노인 목소릴 냈다.
[허허, 애송이 제자 주제에 잘난 척은… 이겨라.]
“아무렴요.”
피를 얼려 출혈을 막은 상준은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가는 곳마다 하얗게 물들이는 눈보라처럼 내 발길이 닿는 곳은 곧 얼어붙을 지어니.”
자신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상준을 보던 팀은 가소롭다는 듯 웃어댔다.
“제법 빨라졌다만 그 정도로 나랑 대등해지긴 부족하지!”
-파사삭
“이건…?”
뛰쳐나간 팀 앞에 얼음 말뚝이 솟아났다. 하지만 이미 본 이상 못 피할 건 없다. 그는 방향을 전환했다.
-파사삭!
“또?”
팀이 움직일 때마다 말뚝은 번번히 그의 앞을 막았다.
“하, 이제야 알겠군… 이런 잔재주에 어울려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살얼음 밟는 소리로 위치를 짐작한다는 걸 벌써 알아차렸나? 예상보다 좀 빠른데.’
-파사삭!
다시 한 번 소리에 맞춰 말뚝은 솟아났다. 하지만 이번엔 팀을 막지 못했다. 그는 앞도 뒤도 아닌 위로 솟았기 때문이다.
“네녀석이 아주 잘 보인다.”
“무슨 점프력이 저래?!”
4층 건물 정도의 높이까지 뛰어오른 팀은 상준의 위치를 알아차렸고, 이내 강렬하게 회전하며 소년을 향해 날아갔다.
“바람 마법을 이용한 추진력으로 널 갈갈이 찢어주마!”
“최상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넌 이미 졌어.”
“헛소리!
무언가 반짝였다. 그게 무엇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늑대의 눈동자는 빛으로 가득 찼다.
“이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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