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까만 도화지 위에 찍힌 흰 점 같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소박하지만 겉멋이 들지 않은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 속 고민을 잠시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천하일미도 먹지 않으면 무의미 하듯, 사생결단을 내려는 두 사람에겐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 따윈 없었다.
-펑!
불덩어리가 상준의 안면을 스쳐 지나가더니 곧바로 폭발했다.
[아니, 기껏 날개가 생겼는데 높이 좀 날아봐!]
‘내가 너랑 비행 수련을 한 게 아니잖아! 허리에 뭐가 돋아나 있는 감촉 자체가 낯설다고!’
[아니, 애초에 나한테 전부 맡기지 왜 애매하게 일부만 가져간 건데?]
‘연비가 구리니까.’
[그놈의 연비 타령! 난 자동차가 아닌데 말이야~]
‘거기다 주리만 어떻게 한다고 끝이 아니잖아. 살아나가야 할 거 아니야. 여기서 힘 다 쏟고 쓰러지면, 마수들의 맛난 한 끼 식사 밖에 더 되겠어?’
언짢은 기색이 대놓고 드러난 얼굴을 한 아리오나 였지만, 지금 상준에겐 그녀를 달래줄 짬이 없었다.
“염사(炎蛇).”
박수 소리와 동시에 뱀처럼 기다란 화염이 지면을 타고 상준을 노렸다.
“화마를 막는 싸늘한 장벽.”
얼음의 벽이 진로를 막아섰지만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화염은 벽을 우회 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자유자재로 비행하는 것은 힘들더라도 도약 정도는 어렵지 않다. 십수 미터 위로 뛰어오른 상준이었지만, 화염의 뱀을 떨쳐 내기엔 부족했다.
“아 뜨거!”
상준을 따라 수직으로 솟아오른 뱀이 그의 발목을 문 것이다. 아리오나의 화염 내성을 빌려 오지 않았다면 이 순간 승부가 갈렸을지도 모른다.
“발목 타버리는 줄 알았네… 이리저리 휘고 튀어 오르고 뭔데 저거.”
[네가 곧잘 써먹던 이중 마법이잖아~ 그게 네 전매특허도 아니고 남이 쓸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도 벅찬데 자꾸 새로운 걸 보여 주니까 아주 곤란해.”
[자꾸 불안을 부추기는 것 같아서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말이야….]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몰라도 남의 눈치 따윈 안 보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는 게 더 불안해.”
[다름이 아니라 저 도깨비가 왜 갑자기 파워 업 했는지 알 것 같거든.]
아리오나는 자기가 몸이 있었을 적 일화를 꺼냈다. 어느 전투에서 다 죽어가던 도깨비가 폭발적인 힘으로 판도를 뒤집을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도깨비 관련 문서를 뒤지다 흥미로운 내용이 적힌 보고서를 찾았다고 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도깨비 포로를 신문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도깨비들에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비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도깨비가 흥을 잃었을 때 도깨비 꽃 피어난다.]
“무슨 뜻이야?”
[도깨비는 밝고 쾌활한 종족으로 정평이 나있지. 어디서나 잘 어울리다 못해, 최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제국군 병사와도 친구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기록 속의 도깨비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노래를 불렀다더라.]
“그래서?”
[그런 종족이 유쾌함을 잃을 정도면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거겠지. 단순히 큰 부상을 입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렸을 때만 파워 업이 가능하다는 뜻일 거야. 하지만 저 녀석은 이미 힘을 얻어버렸지. 이제 중요한 건 도깨비 꽃이야. 파라니아엔 도깨비 꽃이라는 꽃이 실제로 있어. 참고로 도깨비 꽃의 꽃잎은 세 장이야.]
이 순간 불길한 예감이 상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 저기서 두 번 더 파워 업을 할 거라는 거야?”
[이건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남은 건 한 번일 거야.]
“근거는 있어?”
[생의 반을 내어 준 첫 잎은 병자를 일으켜 세웠네~ 온 정신을 바친 둘째 잎은 죽음도 넋을 잃었다네~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간 셋째 잎~ 도깨비의 모든 걸 머금은 도깨비 꽃은 아름다워라~]
“갑자기 웬 노래? … 라고 하기엔 가사가 심상치 않은데.”
[오래된 도깨비족의 동요인데, 도깨비 포로가 죽기 전에 이 노래를 흥얼거렸대. 노래 가사 중에 첫 번째, 두 번째 꽃잎에 대한 거 보면 정신을 바쳤다든가, 죽음도 넋을 잃었다는 게 있잖아. 지금 주리의 모습은 평소랑 달리 상당히 기계적이고 감정이 절제된 것 같은 모습이야. 거기다 넌 분명히 즉사에 이를만한 치명상을 입혔어, 그런데도 주리는 움직이고 있고.]
“우연이라기엔 매치가 너무 잘 되긴 하네. 그런데 결론부터 빨리 말해주면 안될까? 이러다 타죽겠거든?”
“염연(炎燕).”
유도탄처럼 날아오는 무수한 숫자의 화염 제비를 모두 요격하기엔 무리였고, 상준의 몸엔 그을음이 늘어갔다.
[그러니까 명치가 뚫렸는데도 움직일 수 있는 건 정신, 즉 감정을 대가로 일시적으로 죽음을 미루고 있는 것일 거라 보인다는 거지. 전장에서 만난 도깨비가 저 상태가 됐을 땐 길어야 10분 남짓이었거든. 앞으로 3분 정도만 버티면 끝일 거야.]
연속된 전투로 지친 상준이었지만, 3분간 버티기만 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다만 아리오나의 가정에서 처음부터 배제된 가능성이 신경 쓰였다.
“네 가설이 그럴 듯 하다는 건 인정할게. 그런데 주리가 세 번째 대가를 지불하면 말짱 꽝 아니야?”
아리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는데?”
[지불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공격을 막느라 대답할 겨를이 없는 상준에게 아리오나는 말했다.
[도깨비는 흥에 살고 흥에 죽는 종족이야. 이미 목숨보다 소중한 희로애락을 대가로 바쳤는데, 대체 무엇이 그 이상의 대가가 될 수 있겠어?]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라든가, 나라에 목숨을 바치려는 충신 이라든가 있을 수도 있잖아.”
[확실히 네 말대로 신념이나 사랑, 명예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던지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그것도 소중하다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두 번째 대가를 치룸으로써 감정이 사라졌는데, 텅 빈 마음이 무언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아리오나의 추측은 제법 그럴듯했다. 주리의 감정은 실시간으로 메말라 가는 중이었고, 상준이 아리오나와 소통하며 전투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분노가 사라지면서 투지 또한 사그라들었고, 그에 따라 공격이 미적지근해진 것이다. 이제 한 움큼도 남지 않은 감정이 전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그때, 주리의 생명 또한 꺼질 것이다.
‘왜?’
자신은 왜 저 소년을 공격하는 걸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분노했던 걸까. 어차피 곧 죽을텐데 악을 쓰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주리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기억이 사라진 건 아니기에 전후 사정은 알고 있다. 다만 공감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분 전의 자신이건만 지금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허무해진 것이다. 뜨거웠던 마음이 차게 식고 그 자리엔 공허함만 남는다.
‘이제 그만하자.’
“뭐야, 저거 왜 저래?”
[예상보다 좀 빨랐네.]
아리오나는 초점 없는 주리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끝난다고 했지만, 기회가 있을 때 확실히 해둬야겠지.”
[애송이 주제에 피도 눈물도 없구나 제자야~]
“확인 사살하라고 가르친 건 댁이잖수.”
지상으로 내려온 상준은 주리의 머리를 노렸다. 대놓고 자신을 죽이려는 걸 보고 있지만, 주리는 피하거나 막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얼 해도 결국 몇 분 뒤면 죽을텐데…. 달관과 비슷하지만 실상은 포기와 다름없는 생각을 품은 채 하늘에 한 번, 땅에 한 번 느긋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의 눈에 의지가 돌아왔다.
[야, 뭔가 이상해…!]
주리의 변화를 눈치챈 아리오나 였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콰직!
자신을 덮쳐오는 얼음덩이에 얻어맞고 찢기면서도 그녀는 달려나갔다. 상처 부위에선 피가 아닌 불똥이 튀었다. 작은 살점 하나, 피 한 방울까지 스스로를 불태우는 주리는 말 그대로 달리는 화염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그녀였지만, 머릿속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아야 해.’
자신의 파트너에게 하는 말이었다. 모든 걸 내려 놓으려던 그녀는 보았다, 팀의 손끝이 움직이는 것을.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목격한 것이다. 아직 지킬 것이 있다는 희망의 불씨는 그녀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은 꺼질 회광반조 였지만 이 순간 만큼은 달보다도, 별보다도 빛났다.
[제대로 좀 막아봐!]
“배가 뚫리고 눈알이 뭉개졌는데도 안 멈추는 걸 어쩌라고!”
-쾅!
자신을 향한 공격은 무시한다. 앞길을 막는 건 부순다. 불도저나 다름없는 그녀를 막는 건 불가능하다 판단한 상준은 날아 올랐지만, 그의 미숙한 비행 실력이 또 한 번 발목을 잡았다.
“아니 미친!”
화염을 추진력 삼아 로켓처럼 날아오른 주리는 그를 잡아 땅에 내던졌다.
“컥!”
돌바닥도 아니고 모래 위에 떨어졌음에도 충격에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재정비를 하고 싶은 상준이었지만, 선택권을 쥐고 있는 건 그가 아니다.
“이, 이거놔!”
어떻게든 일어서려는 상준에게 달려드는 주리. 모양새는 태클이었지만 , 실상은 달군 놋쇠로 만든 황소가 들이받은 것과 비슷했다. 소년의 양팔과 허리를 붙잡은 채 그대로 달려나가는 주리.
-치이익!
불판 위 고기가 익는 듯한 소리는 상준의 피부에서 나는 것이었다. 화염 저항력이 높은 아리오나의 피부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화염. 지금 그녀는 사람의 형태를 한 용광로였다.
“이 미친, 같이 죽으려고 환장한 건가?!”
[대가를 지불해 얻은 마력을 열로 치환해 몸에 응축 시키고 있어. 진짜 자폭이라도 할 셈인가 봐!]
뜨거워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한 뒤로 주리는 점점 빨라졌다. 이미 자동차 수준인데 속도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면 자폭은 고사하고 날 안은 채 자빠지기만 해도 치명상이다.
“일단 속도부터 줄이자고!”
날개에서 역추진으로 마력을 뿜어 브레이크를 걸었다. 거기에 더해 양발에 얼음으로 만든 커다란 닻을 달고 나서야 주리는 겨우 멈췄다.
“어?”
“아.”
멈춰선 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지였다. 기지가 습격 당한 틈에 냑타를 훔쳐 달아난 것 같다.
[큰일이야! 지금보다 더 빠르게 뜨거워진다! 이제 진짜 터지겠어!]
“상황 보면 대충 급박해 보이지? 지금 당장 그 칼로 이 아줌마 팔 좀 잘라줘. 아무래도 곧 자폭할 것 같거든.”
“에?! 자, 자폭?”
“그래, 지금 급해! 빨리!”
나와 주리를 번갈아보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히, 힘내십쇼!”
“어딜!”
불쑥 솟아오른 얼음이 냑타의 복부를 관통했다. 냑타는 쓰러졌고 지지 또한 땅바닥에 처박혔다.
“사람 죽이려고 환장했어요!?”
“선택해라.”
“뭐, 뭘요.”
“같이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이좋게 타 죽는 거야. 정해.”
‘겨우 자유의 몸이 되나 했는데 다시 만날 건 뭐람….’
신세 한탄이 절로 나오는 지지였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력을 보는 게 미숙한 그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거대한 마력. 이런 건 난생 처음 보는지라 분명 아는 얼굴인데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다. 일단 살고 싶으니 시키는 대로 칼을 빼든 지지였지만, 그는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 건드려도 되는 거 맞습니까? 톡 쳤더니 펑! 하고 터지는 거 아니에요?”
‘풍선이냐….’
[아주 틀린 소린 아니지. 고무 대신 가죽으로 만들어진 풍선에 공기 말고 고밀도 마력이 들어차 있어서 그렇지.]
“에라 모르겠다!”
-퍽!
지지는 있는 힘껏 칼을 내리쳤다. 하지만 팔을 일도양단 하기는커녕 칼날은 얼마 들어가지도 않았다.
“아니 이게 사람이야 나무토막이야?”
스테로이드라도 들이킨 것 같은 우락부락 근육은 장식이 아니었다. 안 드는 도끼로 장작을 패듯 죽어라 내려찍던 지지는 소리쳤다.
“아, 진짜! 뒤로 빼지 좀 말아요! 제대로 자를 수가 없잖아요!”
“나도 최대한 버티고 싶은데 말이야….”
상준이 뒤로 빼고 있는 게 아니다. 주리가 그를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이상으로 출력 내려고 하면 날개가 먼저 터져버릴 걸.]
‘다른 방법 있어?’
[없진 않은데… 추천하고 싶진 않네.]
‘뭐라도 좋으니까 얘기해 봐.’
아리오나의 이야기를 들은 상준은 지지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따로 너한테 신경 쓸 틈이 없으니 미리 말해둘게. 팔을 잘라내면 즉시 내 손을 잡아. 바로 도망칠 거니까.”
그는 통보나 다름없는 말을 남기고는 주리와 직접 닿은 부위에 의식을 집중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전류의 뱀.”
허리, 팔뚝 등 서로 맞닿은 곳에서 부터 전류가 흘렀다. 감전사는커녕 몸이 조금 저릴 뿐인 수준이지만, 상준이 바라던 바가 딱 그것이었다.
[위력이 세면 방대한 마력을 자극해서 즉시 터져버릴 거고, 너무 약하면 의미가 없지. 섬세한 마력 조절이 필요한데… 솔직히 진짜 해낼 줄은 몰랐어.]
“제발! 좀! 잘려라!”
주리의 움직임이 크게 둔해지자 지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곳을 집요하게 내리찍었고,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릴 즈음엔 결과가 나타났다. 커다란 근육질 팔이 잘리자마자 지지는 상준의 손을 잡았다. 이제 도망치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주리 역시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걸 보고만 있진 않았다.
“어, 딜…!”
“저 상태에서도 움직인다고?!”
전신이 저려오는 상황에서 주리는 오기로 움직였다. 강한 집념의 발로였다. 털북숭이에 인상이 나쁜 그를 떠올리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팀을 위해서야!’
만약 10초만 더 주어졌다면 그녀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팀이 누구지?’
결정적인 타이밍에 진행된 대가의 회수. 그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주리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상준은 주문을 읊었다.
“됐다!”
화염과 냉기가 부딪히며 발생한 강렬한 폭발은 주리와 두 사람 사이를 찢어놓았다. 그 기세 그대로 상준과 지지는 저 높이 솟아올랐다.
-펑!
지상을 벗어나기 무섭게 폭발이 시작됐다. 그녀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주위의 모래나 바위가 녹아버릴 정도였다.
“아뜨뜨! 좀 더 빨리 갈 수 없어요?! 이러다 타죽겠네!”
“손에 들고 있는 짐을 버리면 훨씬 도움 될 것 같은데!”
“도와줬더니 짐짝 취급하는 거에요?!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아 바람이 너무 세서 하나도 안 들리네~”
걸음아… 아니, 날개야 날 살려라 라는 말이 딱 맞는 모양새로 두 사람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윽… 머리야….”
모든 게 타버리고 탄 냄새만 남은 폐허에서 남자는 눈을 떴다. 전신이 쑤시고 아린 것이 술을 진탕 먹고 언덕에서 구른 느낌이었다.
“몸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이게 무슨 꼴이냐….”
-펑!
저 멀리 보이는 반구형 폭발. 얼마나 위력이 센지 남자는 강풍에 휩쓸려 날아갈 뻔 했다.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다시금 조용해진 사막. 흙바닥에서 뭉그적거리던 남자는 눈을 번뜩였다. 무엇을 찾는 건지 한참을 킁킁대던 그는 눈을 번뜩였다.
“누님! 누님은?!”
늑대를 닮은 모습이 폼은 아니었는지 바람에 섞인 미약한 잔향을 잡아낸 팀. 한 가지를 떠올리자 도미노가 쓰러지듯 연속적으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부 생각난 그는 폭발이 일어난 쪽을 바라보았다.
“설마….”
냄새만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주리의 마력이다. 하지만 이 말도 안되는 크기며 양은 뭐란 말인가. 문뜩 뇌리를 스치는 불안감은 부러진 다리를 억지로 걷게 만들었다.
“아닐 거야… 아니지?”
중얼중얼 부정의 말을 연신 내뱉으며 그는 절뚝절뚝 나아갔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었다. 뛰지 못할지언정 멈추지 않고 걸어간 끝에 팀은 현장에 도착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가 아연실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사막 한가운데에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커다란 구덩이 안에는 새카맣게 탄 바위나, 녹아서 용암처럼 변해버린 모래가 한가득 이었다. 활화산 같은 열기에도 아랑곳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중심부에 무언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누님? 누님이죠?!”
저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돌덩어리거나 열기가 만들어낸 아지랑이가 눈을 속인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크레이터 안쪽으로 들어가길 망설이지 않았다.
“으악!”
급한 마음에 서툴게 움직이던 팀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이리저리 구르며 몸 이곳저곳이 달구어진 모래에 닿아 화상을 입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빠르게 구덩이 밑바닥까지 왔다는 것. 그는 제일 심하게 데인 얼굴을 붙잡은 채 절뚝절뚝 나아갔고,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그토록 찾던 주리를 목도 했다.
“으, 아아….”
슬픔, 절망, 한탄… 어떤 말을 갖다 붙여도 그의 마음을 명료하게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제 몫을 다한 숯처럼 하얗게 불태운 주리 앞에서 팀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려 해보지만….
-파사삭
“아아, 안돼!”
부스러져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얼굴을 시작으로 가슴, 배, 다리… 전신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아, 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잿가루 더미 앞에서 남자는 오열했다.
“누님! 누니이임!”
형태조차 남지 않은 그녀의 온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남자는 잿가루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아 보지만, 그것은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목이 터져라 슬픔을 토해낸 그는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찾아낼게요…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누님의 원수를 갚을게요!”
형체도 남지 않은 그녀 앞에서 남자는 복수를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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