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톡… 톡…
“으… 뭐야, 하지마….”
불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단잠을 방해한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미간에 떨어지던 게 뺨이나 콧등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짜증 나.”
끝내 참을성 승부에서 패배한 지지는 눈을 떴다. 재수 없게도 눈을 뜨자마자 눈동자에 떨어진 물방울. 뜨뜻미지근한 온도에 약간 끈적거리까지 하는 액체는 안 그래도 짜증 나있는 그를 더욱 자극했다.
“어라…?”
한참 눈을 비비고서야 시야를 되찾은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맑고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머리통에 관통 당한 거대한 벌레. 새까맣고 납작한 몸체에 기다란 더듬이가 특징인 이 생물은 레므. 바퀴벌레와 놀랍도록 흡사한 이 생명체는 취급이나 대우도 바퀴벌레와 비슷하다. 그렇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아, 어, 으….”
의미를 갖지 못한 소리가 지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 뜨자마자 목격한 것이 머리가 꿰뚫린 어린애 만한 바퀴벌레. 이것만으로도 졸도할 사람이 차고 넘칠텐데,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던 액체가 벌레의 뇌수라는 걸 알고도 발광하지 않았다는 점은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퍽!
갑작스레 튀어나온 거대한 가시가 레므의 시체를 관통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몇 개나 되는 가시는 레므의 시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벌레와 함께 꼬치 신세가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던 지지는 콧잔등에서 냉기를 느꼈다.
“이거 얼음이잖아?”
생각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저, 저기 이것 좀 치워주시면… 뭐야 저거?”
시선을 돌린 지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의 몸에서 얼음이 자라나는 것 같으면서도, 얼음이 인간으로 의태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모양새였다. 그것이 자신의 동행자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 관찰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상준을 중심으로 얼음이 전방위로 뻗어 있었다. 고목의 뿌리처럼 자라난 가시에 찔려 죽은 레므가 셀 수 없을 만큼 있었다. 벌레들이 참혹하게 박살난 모습은 시각적 테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보기 역겨운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제발 멈춰요!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고요!”
상준은 의식을 잃은 채 끝없이 얼음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가시는 땅굴의 천장이며 벽을 파고들었다.
-부스스
“당장 뭐라도 해야 해….”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지듯 흙 부스러기가 떨어질 때마다, 생매장 카운트다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지지를 곤두서게 만든다.
“악!”
상반신을 일으키던 중 갑자기 솟아난 가시가 팔뚝을 찔렀다. 새끼손가락보다도 작았기에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일어서는 것조차 함부로 못하는 처지라는 것만 알게 된 셈이다.
“어떻게든 접근만 하면….”
“접근만 하면… 방법은 있고?”
“깨어났군요!”
상준의 목소리에 화색이 도는 지지였지만, 돌아오는 건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요?”
“의식은 있는데 몸이 안 움직여져.”
“자기 몸인데 마음대로 안 된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의식과는 별개로 몸이 혼자 마법을 난사 한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기에 지지는 당황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그와 대화 하는 건 아리오나였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경황이 없었다. 상준이 자리를 내어주거나, 의식을 잃으면 자연스레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것은 당연한 순리이자 법칙 같은 것이었다.
[이제와서 새삼 고대 마법의 위험성을 떠올리게 될 줄이야.]
솔직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명확하게 짚어낼 순 없다. 아리오나는 의사나 학자도 아닐 뿐더러, 이세계인에 대한 정확한 진찰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정황상 가장 의심 가는 걸 꼽아보자면, 역시 정신적인 쇼크려나? 기습 당했을 때 독을 주입 당했을 가능성도….]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찰나 때마침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니… 이대로 있으면 우린 사이좋게 땅속에 파묻혀 버릴 거라고요!”
“곤란한데, 그러면 아주 곤란해~”
“그러니까 무슨 방법 없어요?”
“방법은 내가 아니라 너한테 있는 것 같은데? 아까 수단이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
“그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서… 홧김에 말해봤달까….”
“뭐가 됐든 일단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제 진짜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부스스… 툭…
자갈과 돌이 떨어지고 점점 많은 흙이 떨어지고 있다. 당장 터널이 무너지기 시작해도 이상할 게 없다.
“마력을 흡수 할 거에요.”
지지의 머리에 여우 귀가 돋아나고 등 뒤에서 한 쌍의 꼬리가 나타났다. 그렇게도 감추고 싶어하던 정체까지 드러낸 것으로 그의 각오를 알 수 있었다.
“딴지 걸려는 건 아니고 순수한 의문인데, 정말 할 수 있는 거야?”
요호종은 타인의 마력을 흡수하는 마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체내의 여우 구슬을 밖으로 꺼내 활용하는 건, 아주 오랫동안 수행한 여우들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리오나는 알고 있었다. 일례로 전장에서 구슬을 꺼내 활용하던 여우들은 대개 꼬리가 4개 이상이었다.
“우, 우에엑…!”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더 안 보여줘도 돼~”
백문이 불여일견. 당장 여우 구슬을 토해내 들어올린 지지, 알사탕 만한 사이즈였지만 그건 분명 여우 구슬이었다. 지지가 계획을 보여주었으니 이번엔 아리오나가 그를 도울 차례였다.
“지금 말하는 걸 보면 알겠지만, 아주 못 움직이는 건 아니거든? 네가 신호하면 최대한 몸을 억제 해볼테니 그때 마력을 뺏든 뭘하든 해봐.”
작전 회의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실행에 들어갔다. 날렵하게 가시를 요리조리 피해 움직이는 지지. 억제가 잘 되고 있는 건지 가시의 속도는 상당히 느릿했다. 상준 앞에 도착한 지지는 술법을 사용했다.
‘제발 잘돼야 할 텐데….’
어릴 적에 배우고 한 번도 써먹은 적 없는 술법을 이런 상황에 재현할 수 있을까. 불안함에 짓눌릴 것 같았지만, 지지는 박자를 맞췄다.
“휘파람인가.”
도깨비들이 신체를 부딪혀 요술을 부린다면 요호들은 박자와 리듬으로 술법을 쓴다. 흥얼거리기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지처럼 휘파람을 불거나, 아예 노래를 부르는 이도 있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으로 맡겨본 건데 의외로 제대로 할 줄 아네?]
살아있는 지도 정도로 여기고 있던 지지에 대한 평가가 살짝 올라갔다.
‘아니 이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뭐야? 마법을 난사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술법의 성공을 기뻐할 틈도 없이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상준의 마력량이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마력 흡수 술법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허용량을 넘으면 흡수한 마력이 그대로 대미지가 되어버린다. 이는 장기나 척추에 직통으로 마법을 맞는 것과 마찬가지.
‘이러면 어떻게 하든 죽게 생겼잖아!’
뱃속에 음식을 소화하고 다시 음식을 먹듯 마력을 소모한 뒤 다시 도전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간신히 성공한 술법이라는 게 문제였다. 지지는 다시 술법을 시도했을 때 성공할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부스스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중인 터널이 그녀를 기다려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확실히 둔해지긴 했지만, 가시가 계속 벽이며 천장, 바닥을 헤집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 상황을 헤쳐나갈 묘수가 필요하다. 결국 지지는 도박을 하기로 했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진짜 가만히 좀 있어!]
지지가 골머리를 썩는 한편, 아리오나는 잇몸이 터져라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간접적인 영향력만으로 상준을 멈추게 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식을 잃으면 바톤터치 하는 거 아니었냐고!]
-빠드득!
강하게 악문 이빨이 마찰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버거웠는데, 가이드가 술법을 쓰자마자 더 난리네.]
마력을 빼앗기는 걸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건지, 의식도 없으면서 가이드를 노리고 공격하려 한다. 그러는 한편 사방으로 뻗어대는 가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러면 속도전인데 제발 늦지 말아라.]
둘 다 지킬 순 없다. 지지를 우선하기로 한 이상 땅굴이 부서지는 건 가속화 될 것이다.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지지를 쳐다보았고, 그 순간 시야가 빛으로 가득 찼다.
“으악!”
한밤중에 상향등의 빛이 안구에 직접 꽂힌 느낌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아리오나에게 지지는 소리쳤다.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라도 마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 흡수하는 동시에 소모 시키기 위한 지지의 선택은 조명 마법이었다. 술법과 동시에 쓸 수 있을 만큼 간단한데다, 밝으면 밝을수록 마력을 마구 잡아먹는 기초 마법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눈과 코, 입, 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은 기괴하기 그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들이야!”
수정 구슬 너머로 상준네를 보고 있던 푸와야쿠나사는 분통을 터뜨렸다. 계획이 어그러졌는데 화나지 않을 사람이 있겠냐만은, 그것보단 자신이 공들여 키운 레므가 몰살 당했다는 게 주요했다.
“감히… 감히 실험체 주제에 내 귀여운 레므를 죽이고 이 기지도 부수려 하다니! 넌 특별히 오랫동안 괴롭혀주마!”
기포가 부글부글 올라오는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양손에 쥔 채, 푸와야쿠나사는 소리쳤다. 뚫어져라 수정 구슬 너머를 노려보던 그의 안구에 빛이 들이닥쳤다. 평소 땅속에서 어두컴컴하게 지내는 그에게 있어, 강한 빛은 망막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아아악! 내 눈!”
그는 눈을 움켜쥔 채 몸부림쳤다.
“너희들의 마력도, 영혼도 모조리 내 나프시 드래곤의 영양분으로 만들어주마!”
증오에 차 길길이 날뛰던 푸와야쿠사나는 돌연 멈춰 섰다.
“이게 무슨 냄새야?”
달콤하면서도 비릿하고, 구릿하면서도 시큼한 것이 매우 기묘했다.
“이 근본 없는 잡다한 냄새… 설마?!”
냄새의 정체를 알아챘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펑!
빛이 터져나왔을 때 약품을 놓쳐버렸고, 본래 섞이면 안될 물질이 뒤섞여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폭발음과 함께 부풀어 오르는 약품.
“으악!”
잔뜩 흔들어 놓은 콜라처럼 빠르게 솟아오른 약품은 푸와야쿠사나를 덮쳤다. 본래라면 절대 섞일 일 없는 약품과 이물질이 만나 발생한 거품은 단순한 거품이 아니었다. 제법 묵직한 질량을 가진 거품 형태의 화학 물질은 남자와 실험실을 집어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만은 안 돼!”
거품 사이에서 떠다니는 동그란 마도구를 향해 손을 뻗는 푸와야쿠사나. 하지만 마구잡이로 부푸는 거품은 파도와 같아 휩쓸린 모든 것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다.
“잡았다!”
몸치에 운동과는 거리가 먼 마도 학자인 푸와야쿠사나였지만, 유일하게 수영만은 자신 있었고 그는 거품 속을 헤엄쳐나가 마도구를 잡아챘다. 손 안에 들어온 마도구를 쓰다듬은 그는 마력을 불어넣었다.
-휘잉~!
표면에 문양이 나타나고 청소기 같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 마도구.
“결계만 열리면 이 거품도, 저 잡것들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지.”
음침하게 웃는 푸와야쿠사나. 거품에 익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웃었다. 그가 작동 시킨 마도구는 실험실을 만드는 열쇠였기 때문이다. 그의 육체는 연약하고 마력 또한 빈약하지만, 결계 안에서는 다르다. 실험실이라는 이름의 결계 안에서 그는 무적이었다. 마도구에 시간 제한만 없었다면 24시간 내내 켜 놓았을 것이다. 앞으로 십 몇 초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으드득!
강한 압력이 그의 몸에 전해졌다. 거대한 손바닥이 전신을 짓뭉개려는 듯한 감각. 남자를 억누르는 것의 정체는 단단 해진 거품이었다. 차오를대로 차오른 거품은 시멘트가 굳듯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양 끝에서 시작되어 점점 중앙에 가까워졌고, 그 사이에 있던 푸와야쿠사나에겐 재앙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가 고통에 발버둥치는 일은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뼈가 박살나고 내장이 찌부러지는 걸 느낄 새도 없었으니까.
-키에에에에에!
소름 끼치는 포효가 실험실에 울렸다. 작동 시킨 소유자가 죽었지만, 마도구는 멈추지 않았다.
-콰득!
돌처럼 단단해진 거품이 부서졌다. 아무도 없는 실험실에서 단단한 게 부서지는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거품이 사라지고, 실험실이었던 휑한 공간만이 남았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간일텐데, 그곳엔 위화감이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케에에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괴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도학자는 자신이 발견한 존재를 나프시 드래곤이라 불렀다. 무형의 존재에게 눈이 있다면 아마 지금 위를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상준과 지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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