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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딸) 아는 사람한테 추천 받아서 써본 말딸글

by 야미카 posted Feb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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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 삐걱…

 

엉망이 된 방 안, 낡은 의자에서 나는 삐걱거림만이 30평 남짓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티를 내고 있건만, 분위기 파악 못하는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렇게 낭비할 시간에 청소라도 하는 건 어때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갤 돌리자 그곳엔 머그컵을 들고 있는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맨하탄 카페. 평상시엔 조용하고 얌전해서 존재감이 옅지만, 달릴 땐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소름 돋는 기운을 내뿜는다. 거기다 벌레 한 마리 못 잡을 것 같은 심약한 인상이지만, 남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독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미안해 타키온. 나 때문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목소리 다음은 아예 설설 기는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는 모르모트군. 대외적으론 나의 트레이너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저런 꼴이 된 것은 유감스럽게도 나의 지분이 조금 있다. 아니, 사실은 좀 많다. 대략 99% 정도….

 

에잇! 자네의 몸은 왜 이리 약한 건가!”

, 미안!”

 

답답한 마음에 괜한 소릴 뱉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피해자임에도 나에게 사과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고, 실험실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구석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카페가 중얼거렸다.

 

책임 전가… 추하네요.”

학생회의 개는 입 다물도록.”

 

그녀는 자신의 가슴 쪽에 달린 감시역이라 적힌 이름표를 의식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 누가 개라는 겁니까. 저도 이런 잡스러운 역할은 떠맡고 싶지 않았다고요.”

그럼 거절하면 됐잖은가.”

 

카페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녀는 조금 더 감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이 멀쩡한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랬을텐데 말이죠….”

? 난 적극적으로 엮이려 하지 않을 뿐, 평범한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네만?”

제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르네요. 저한테 감시역을 부탁하러 온 학생회 분 말로는 타키온 씨네 반 학우 전원에게 거절 당하고 저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 까짓 거 거절하면 그만 아닌가?”

인정머리 없는 누구누구 씨완 달리 저는 냉혈한이 아니거든요. 제발 부탁한다며 울먹이는 사람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 그런 쓸데없는 동정심이 언젠가 자네의 발목을 잡을 걸세.”

그럴지도요. 그래도 자기 트레이너의 발목을 분질러 놓은 타키온 씨만 하겠어요?”

 

다시 한 번 실험실에 침묵이 찾아왔다. 커피를 후~ 불어 식히는 카페의 모습엔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이상 무익한 말다툼을 이어 가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애초에 일이 꼬인 건 전부 학생회와 이사장 탓이야. 실험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을!’

 

나는 이사장실에 불려갔던 일을 떠올렸다.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네 사람이 2:2 구도로 마주 보고 있었다.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만 이어지던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2명 쪽이었다.

 

아그네스 타키온. 자네가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됐는지… 알고 있겠지?”

 

심볼리 루돌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건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긴 했지만, 원래 실험에는 어느 정도 시행 착오가 있는 법이랄까 큰일까진….”

 

타키온의 입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말이 터져 나오기 직전, 그것을 끊어내는 이가 있었다.

 

제 잘못입니다! 트레이너인 제가 맡은 바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입니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타키온의 조금 뒤에서 참관인처럼 앉아있던 남자가 돌연 소리쳤다. 담당을 변호하고자 부러진 다리로 절뚝절뚝 걸어 나오는 모습은 부상 투혼으로 보일 정도였다. 경기 중이었다면 감동의 물결이 일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곳은 경기장이 아니다.

 

앉게.”

 

낮고 엄숙한 한 마디가 방 안 분위기를 다시 가라앉혔다. 평소엔 무게감이나 근엄 같은 것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져 있던 이사장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누구보다도 위엄 있었다.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자네는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주범의 이야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차례가 올테니 서두르지 말게나.”

 

-촤라락!

 

말을 마친 이사장은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고, 바통을 넘겨 받은 심볼리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이미 진상은 명명백백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 가지, 확실하게 짚고 가도록 하지. 트레이너가 먹고 날뛰게 된 약…. 아그네스 타키온, 본인이 제조한 게 맞나?”

맞아. 모르모트군이 먹은 건 내가 만든 게 맞고, 임상실험을 위해 먹인 거야.”

좋네, 그럼 약을 먹고 날뛰기 시작한 자네의 트레이너가 학원을 난장판으로 만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하는 건가?”

딱히 위험한 약물도 아니었고 실험 또한 해를 끼치기 위한 건 아니었어.”

자네의 약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었고, 애초에 학원에선 그런 실험을 정식으로 허용한 적이 없어.”

내가 이런 실험을 한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잖아?”

 

타키온을 보는 루돌프의 눈이 싸늘해졌다.

 

타키온. 자네는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회장 답지 않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거지?”

 

타키온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루돌프는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은 트레센 학원. 이름 그대로 학원이지만 그와 동시에 전국 각지의 실력 있는 우마무스메가 모이는 각축의 장이다.”

 

뭘 당연한 소릴 하느냐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타키온에게 루돌프는 담담히 말했다.

 

트레센 학원은 최고의 우마무스메를 배출해내기 위해 갖은 지원을 아끼지 않지. 타키온, 자네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지만 뛰어난 인재라는 것은 분명해. 자네가 빈번히 저질러온 교칙 위반 수준의 실험들을 적당히 눈 감아 주던 것도 일종의 특혜였던 것이지.”

그럼 늘 하던 대로 넘어가면 될 일 아닌가?”

 

타키온의 물음에 루돌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이번 건은 명백하게 선을 넘었어. 자네와 자네의 트레이너 모두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거야.”

 

타키온이 자기 변호를 하는 것보다 빠르게 루돌프는 죄목을 읊었다.

 

허가 되지 않은 약물 제조 및 임상 실험. 약물을 마신 트레이너는 타키온은 최고다 라는 말을 연신 외치며 1시간 24분 동안 운동장, 분수대, 세 여신상과 교문, 체육관 등 교내 온갖 곳에 페인트칠을 하고 기물을 파손… 하.”

 

두통이라도 온 건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 심볼리 루돌프. 그녀는 그 상태 그대로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겠네만…. 타키온, 이 사태에 고의성은 없겠지?”

그럴리가. 내가 만들던 것은 긴장을 완화 시켜주고 근육의 수축과 이완을 돕는, 일종의 자양강장제였어. 이번 일은 약간의 계산 미스로 일어난 해프닝을 뿐이라고.”

그렇다고 합니다. 처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장님.”

 

안 그래도 무거운 분위기가 물 먹은 솜처럼 가라앉는다. 부채로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는 이사장. 그녀의 판단에 따라 타키온의 처벌이 결정된다. 우수한 학생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트레센 학원이지만, 이번 일은 규모가 너무 크다. 최악의 경우… 아그네스 타키온은 학원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

 

부채를 접는 것과 동시에 학원장은 외쳤다.

 

아그네스 타키온… 퇴학!”

 

너무나 큰 결정인 탓에 사고가 따라오지 못한 걸까. 처벌이 정해졌음에도 방 안의 분위기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가장 먼저 상황 파악을 마친 것은 타키온 이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에 놓인 홍차에 각설탕을 넣는 그녀였지만,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그렇습니까.”

 

담담하게 이사장의 결정을 곱씹는 심볼리 루돌프. 여느 때처럼 학생회장은 초연해 보였지만, 쓴 약을 먹는 것처럼 팔짱을 낀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수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처벌을 받는 쪽도, 내리는 쪽도 아니었다. 울상을 지은 채 주먹을 꽉 쥔 타키온의 트레이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타키온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추호도 아니었다. 처벌 받는 것 역시 당연하다 여기고 있지만….

 

, 퇴학 만큼은 제발…!”

 

이제 막 깁스를 한 다리로 무릎을 꿇으려던 찰나 이사장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 이번 사건의 규모나, 자네가 평소 벌이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생각하면 퇴학 시키는 게 지당하네만, 다행히 부상자가 없던 점, 인재로 가득한 이 학원에서도 돋보이는 귀하의 재능을 봐서 두 번 다시 이러한 사건을 만들지 않겠다 약속한다면 퇴학 만큼은 면하게 해주겠네. 어떠한가, 약속할 수 있겠나?”

 

타키온은 이사장이 내건 조건을 승낙 했고 이렇게 퇴학 건은 일단락 되었다. 모든 게 좋게 끝난 것 같은데 어째서 트레이너와 타키온은 실험실에서 죽상을 쓰고 있었던 걸까.

 

 

 

30분 가량 지나고 타키온과 트레이너는 이사장실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 3시간이 넘도록 이 상태인 것이다.

 

, 뭐가 약속만 하면 퇴학을 면하게 해준다는 건지. 그 뒤로 조건을 몇 개나 붙지 않았나! 이건 사기 아닌가?”

 

-끼익… 끼익…

 

아그네스 타키온은 의자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그 난리를 피워놓고 고작 약속 하나로 전부 퉁 치려고 하는 게 오히려 도둑놈 심보 아닐까요?”

! 학생회의 충견은 말하는 폼이 다르구만.”

 

멘하탄 카페는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학생회로부터 받은 전달 사항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엔 타키온이 받아야 하는 벌의 내용도 적혀 있었다.

 

첫째, 엉망이 된 장소를 직접 청소하고 감시역 한테 검사 맡기. 둘째, 트레이너가 완치될 때까지 직접 간호하기. 셋째, 앞의 조건이 달성되기 전까지 실험 일체 금지.”

정말이지 악독하기 그지 없군. 특히 세 번째 조항이!”

나 때문에 실험을 못하게 됐네. 미안해 타키온.”

 

뒷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하게 웃는 트레이너에게 타키온은 맞장구쳤다.

 

정말이지 그 말대로야.”

 

듣고 있는 두 사람이 굳어버렸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타키온은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의 진보를 위해 힘쓰고 있어야 할 것인데, 청소나 하게 생겼으니 말이야. 거기다 요리와 차 끓이는 솜씨를 빼면 범용한 사내일 뿐인 자네의 뒤치다꺼리를… 며칠이라고 했지?”

의사 선생님은 최소 3달은 안정을 취하라고 하더라고.”

그래 그래. 무려 3달이나 나의 황금 같은 시간이 낭비된다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안 그래도 착잡해 보이던 트레이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듣다 못한 맨하탄 카페가 한마디 하려던 찰나….

 

하지만 안심하게! 나는 한 번 시작한 실험은 포기하지 않으니까.”

 

뚱딴지 같은 소리에 두 사람은 멍하니 타키온을 바라보았다.

 

실험을 하다 보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보단 변수가 생기거나 막히는 일이 훨씬 많다네. 그런 것에 일희일비 하면 과학은커녕 실험 비슷한 것도 못하는 법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카페의 질문에 타키온은 모르모트군을 가리켰다.

 

실험은 연구자만으로 이루어 지는 게 아니야. 플라스크도, 스포이드도, 시약도, 용매도, 이 실험실도 전부 실험의 일부지. 그리고 피험자 역시 그것에 포함된다네.”

, 타키온…!”

 

울컥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트레이너를 타키온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실험의 결과를 보기 위해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거라네. 그저 이번엔 다소 번거롭고 오래 걸릴 뿐이지. 결코 포기는 없을 거야.”

 

아아, 그 눈이다.’

 

아그네스 타키온의 눈이 빛났다. 적어도 트레이너에겐 그렇게 보였다. 레이스나 실험 중일 때 보이는 눈빛. 무언가에 푹 빠진 그녀의 눈동자에 반해 트레이너로 자원한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자신을 위해 우상과도 같은 그녀가 열정을 불태우다니….

 

죽어도 좋아….”

“… 트레이너 선생님은 가끔 영문 모를 소릴 하시네요.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만, 당신 또한 징계 중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

 

카페는 다시 한 번 스마트폰을 꺼냈다.

 

첫째 몸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아그네스 타키온의 간병을 받을 것. 둘째 아그네스 타키온이 하는 모든 행동에 돕거나 간섭하는 것을 금지함. 셋째 6개월 감봉.”

,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이는 트레이너를 보며 카페는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땐 감봉 말고는 징계가 맞나 싶었지만, 타키온 씨를 과보호 하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겐 제법 힘든 벌이 될 것 같네요.’

 

여전히 나불나불 일장 연설을 이어 가는 중인 타키온에게 카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시간에 나가서 청소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저는 하교 시간이 지나면 바로 기숙사로 갈 거라서 말이죠.

좋을 대로 하게나. 거추장스러운 학생회의 감시가 없으면 청소가 더 잘될지도 모르지.”

뭔가 잊은 건 없으신가요? 당신의 벌은 청소만이 아닙니다. 감시역에게 검사를 맡는다는 부분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청소를 하더라도 제 눈앞에서 한 게 아니라면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할 겁니다.”

아니 그런 법이 어디 있나! 너무 제멋대로 아닌가?!”

 

타키온의 항변에 입가까지 올렸던 머그컵을 도로 내리는 맨하탄 카페.

 

교칙을 어겨서 벌을 받는 사람이 필요하니까 법이며 규칙을 찾는 건 다소 뻔뻔하지 않나 싶네요.”

 

아픈 곳을 찔린 듯 움찔하는 타키온에게 카페는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 30분 남았네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본 타키온이 본 것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였다.

 

모르모트군! 지금 당장 체육관으로 가세나!”

 

-드르륵!

 

교실 문을 거세게 열어젖힌 타키온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그녀의 뒤를 보며 맨하탄 카페는 중얼거렸다.

 

“… 복도에서 달리면 안된다는 건 초등학생도 알텐데 말이죠.”

 

신랄한 한 마디를 날리면서도 카페의 입가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PM 540.

 

고작 5분 밖에 안 지났다고…?’

 

시간을 확인한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걸레와 신나를 챙겨 체육관까지 온 건 좋았지만, 작업은 시작하고 단 5분만에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주 미세한 차로 결과 값이 틀어지는 복잡한 수식이나, 한 방울 차이로 폭발해버릴 수도 있는 용액을 매일 같이 다루는 나에게 페인트를 지우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졸려….”

 

맹점이었다. 처음에는 코를 찌르는 신나 냄새나, 청소 따윌 해야 한다는 불만이 가장 큰 적이 될 거라 여겼다. 설마 단순 반복 노동이 이렇게나 지루할 줄이야. 지루함이라는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졸음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걸레를 쥔 손이 점점 느려지고 고개는 꾸벅꾸벅 흔들린다. 이대로 수마에 사로잡히는가 싶었던 그때였다.

 

오후 540분경… 아그네스 타키온 청소하다 잠듦. 반성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음. 불성실함….”

“… 정정해주게. 난 자지 않았네.”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닦고 말하시죠.”

 

정말이지 지독하기 그지 없군.’

 

학생회에 매수된 배신자를 욕하며 입가를 소매로 문질렀다. 나는 다시 한 번 정신을 가다듬고 걸레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벅벅 소리 나게 걸레질 할 때마다 조금씩 벗겨지는 페인트를 보고 있자니 금방 끝나겠다는 희망이 보인다.

 

이 기세를 몰아 단번에 끝내야겠군.’

 

걸레질에 점점 속도가 붙고 페인트는 빠르게 지워져 갔다. 손놀림은 이내 다리 만큼이나 빨라져 닿는 곳마다 깨끗해졌다. 마침내 낙서를 전부 지운 나는 깨끗해진 주변을 돌아봤다.

 

완벽하군. 티끌 하나 없어. … 어라?”

 

주변은 정말 깨끗했다. 낙서는 물론이고, 건물도, 바닥도 없었다. 카페도, 트레이너군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오직 나 혼자 서있을 뿐이었다. 영문 모를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과학적 탐구심은 발휘 되는 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어떻게 서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낙하는 이마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끝이 났다.

 

타키온, 괜찮아?”

으음… 모르모트군. 여기는…?”

? 체육관이야.”

그렇군. 전부 꿈이었나 보군.”

 

제법 흥미로웠는데 말이야.’

 

아직 가시지 않은 꿈의 여운을 즐기는 중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타키온, 안 하던 일을 하니까 힘들지? 미안….”

 

안 그래도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기애가 표준 미달인 모르모트군은 내가 잡일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나는 무언가를 집으려는 그의 손을 막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끝에 물음표가 붙었지만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가 집은 대걸레를 빼앗은 뒤 나는 말했다.

 

이건 내 일이니 자네는 허튼짓 말고 거기 앉아 편히 있게나.”

하지만….”

자네는 나와 작별하고 싶은 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오호, 이건 좀 의외로구만.’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낸 그를 보고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카페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신선한 모습을 조금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호랑이는 금세 고양이로 돌아가 버렸다.

 

미미미, 미안! , 나는 화내려던 게 아니라….”

핫핫하! 자네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네만,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있었나 보구만. 신장과 발 사이즈부터 간수치, 혈압, 혈당 기타 등등. 수치화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파악해 뒀거늘… 모르모트군 자네는 내 예상보다 흥미롭구만.”

 

같은 말을 듣고 질린다는 표정과 감격한 표정을 동시에 보는 것 또한 색다른 기분이로군.’

 

트레이너군. 자네는 내가 뛰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다고 했지?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참게나. 실험 중에는 금방 결과가 나오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닌 것도 있는 법이니까. 답답하다고 마구 휘저어버리면 세균은 배양되지 않는 법이라네.”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걸레를 들고 폼을 잡으셔도 말이죠….”

나도 남 눈치 안 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지만. 카페, 이럴 때는 맞장구를 쳐주는 게 도리라는 거 아닐까 싶네…. 잠깐, 자네는 지금 어딜 가는 거지? 자네가 없으면 청소의 의미가 없어지잖나.”

 

내 질문에 맨하탄 카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 시간이 됐거든요.”

?! 트레이너군, 지금 몇 시 몇 분인가?”

? , 6시네.”

나와 자네 사이의 끈끈한 우정을 봐서 조금만 더 있어 주는 건….”

싫어요.”

 

-끼익… 탁

 

거절과 동시에 문을 닫고 나가는 맨하탄 카페. 그렇게 징계 1일차는 끝이 났다.

 

 

 

시간은 흘러 징벌 한 달 째. 익숙해진 것인지 걸레질 중에 조는 빈도가 조금씩 줄어 가는 아그네스 타키온 이었지만, 그런 그녀에겐 새로운 골칫거리가 생겼다.

 

흠….”

, 어때?”

 

두 눈을 감은 채 차를 음미하는 타키온에게 그녀의 트레이너가 물었다.

 

“… 역시 뭔가 아니야. 트레이너군, 정말 이 레시피가 맞는 건가?”

, . 이거 맞는데… 뭐가 달라?”

 

늘 쓰는 주전자에 찻잎의 양, 물의 온도와 찻잎을 넣는 타이밍과 우리는 시간까지 완벽하게 재현했을 텐데… 뭐가 문제지?’

 

한 치의 오차 없이 재현 했음에도 어째선지 트레이너가 직접 우려 주는 홍차보다 못하다. 같은 과정을 거쳤음에도 결과물이 다른 이유에 대해 고민하는 아그네스 타키온. 그녀에겐 중요한 문제였지만 마침 잔을 비운 흑발의 소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트레이너 선생님. 한 잔 더 받을 수 있을까요?”

 

늘 먹던 맛을 재현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는 타키온에겐 트레이너가 끓여준 커피를 홀짝홀짝 받아먹는 맨하탄 카페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차 한 잔 정도는 그냥 내가 타줘도 되지 않을까?”

 

타키온의 미간에 심술이 끼기 시작한 것을 빠르게 알아차린 트레이너 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그건 징계 사항 1번에 저촉됩니다. 다리가 완치될 때까지 트레이너 선생님은 돕는 게 아닌 도움 받는 입장입니다.”

그래도 본인이 끓은 건 만족스럽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차 끓이는 건 어렵지도 않고.”

“… 그건 징계 사항 2번에 저촉됩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완치될 때까지 타키온 씨가 하는 어떤 일도 도와서는 안 됩니다.”

 

감시역으로서 맡은 바를 다할 뿐인 카페였지만, 타키온에겐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학생회는 좋겠어~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생체 CCTV가 있으니 말이야.”

또 시작인가요…. 한 달쯤 지났으면 적응할 법도 한데….”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한숨을 쉬는 카페에게 타키온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핫핫하! 차 한잔조차 만족스럽게 즐길 수 없게 된 느낌을 아는가?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빼앗겼을 때의 상실감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 수준이라네.”

“… 빼앗기는 게 싫었다면 생각하고 행동 했어야죠. 사고 쳐서 벌 받고 있는 거면서 억울하다는 듯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차 맛이 만족스럽지 못한 건 타키온 씨가 트레이너 선생님 보다 차를 타는 실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겠죠.”

 

괴변은 정론 앞에 무너지는 법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니 이렇다 할 반박을 늘어놓기 힘들었다.

 

호오… 평소 답지 않게 오늘은 잘도 재잘재잘 말하는군.”

 

한 발 물러선 타키온에게 카페는 결정타를 먹였다.

 

“… 애초에 너무 의존하고 있던 거 아닌가요? 당신, 연구랑 달리기 이외의 모든 걸 트레이너 선생님께 떠넘기고 있었잖아요. 청소나 요리는 물론이고, 걷기 귀찮을 땐 어부바를 해달라 조른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어부바는 한 적 없네!”

그… 예전에 한 번 급하게 연락을 받고 갔더니 투자자랑 말씨름 하느라 피곤해졌다고 걸을 힘도 없다길래 해줬던 적이….”

조용히 하게! 모르모트군, 자네는 대체 누구 편인가?!”

 

트레이너의 입에 각설탕을 들이붓는 타키온. 카페는 혼잣말을 하듯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잃고 나서야 누리고 있던 것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하죠. 이번 기회를 잘 살려 보는 게 좋지 않을 지….”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맨하탄 카페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쥐고 있던 것의 가치… 라.”

 

고요해진 교실 안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타키온. 그녀는 미지근한 홍차를 들이켰다.

 

“… 맛없군.”

 

차만이 아니다. 요 근래 섭취하는 모든 것들이 불만족스럽다.

 

모르모트군과 만나기 전까진 전부 직접 했던 일이고 그걸 다시 할 뿐이다. 원상 복구나 마찬가지일텐데 어째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걸까….’

 

역체감, 이라는 건가….”

 

타키온은 깨달았다. 모르모트이자 잡일꾼이라 여기던 이 남자는 이제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걸 말이다. 그가 해준 밥이 아니면 안된다. 그가 끓여 주는 차가 아니면 부족하다. 그가 다려 주는 옷이 아니면 어색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그가 있어야만 한다. 문득 타키온의 뇌리에 트레이너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 스쳐갔다.

 

당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거치적거리는 잡일에 귀한 시간이 소모되지 않도록, 길을 닦는 보이지 않는 일꾼이 되고 싶어요.”

 

새삼 떠올려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야.’

 

자신을 위해 인간 빗자루, 살아있는 로봇 청소기가 되겠다는 발언. 살면서 이것보다 기억의 남는 멘트는 들어본 적 없다. 그 어떤 트레이너가 저런 소릴하며 담당이 되어달라 한단 말인가. 막상 뱉고 나서 본인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새파래진 얼굴로 식은 땀을 흘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 …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게 해주겠다더니, 존재감이 너무 커졌잖은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그네스 타키온. 지금 유일하게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이는 안타깝게도 입이 터져라 각설탕을 문 채 졸도해버린 상태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건이 터지고 3개월 반이 지났다.

 

저기… 선생님, 다리는 어떤가요?”

 

-딸깍 딸깍

 

마우스를 딸깍이며 모니터를 유심히 보던 의사는 환자 쪽으로 화면을 돌리고는 말했다.

 

잘 붙었네요. 이 정도면 오늘 깁스 풀어도 되겠어요.”

 

의사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고하세요.”

~ 건강하세요~”

 

데스크 직원과 인사를 나눈 남자는 곧장 출구로 향했다. 휠체어나 목발 없이 걷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걸음걸이에 어색함이 있었지만, 남자는 쉬거나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어!’

 

부푼 마음을 안고 나아간 그는 오랜만에 스스로 교실 문을 열었고….

 

, 트레이너군 왔나? 드디어 자신의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됐군. 축하하네.”

 

난장판이 된 교실에서 아그네스 타키온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말끔했는데….’

 

말끔함의 흔적도 남지 않은 교실을 보며 트레이너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타키온 이건 대체…?”

핫핫하! 오늘은 학생회가 채워놓은 구속이 풀리는 기념비적인 날 아니겠나! 미뤄놨던 실험을 몰아서 하려다 보니… 약간, 아주 약간의 계산 착오가 있었네.”

“… 온 사방에 날리는 이 녹색 가루들이 그 계산 착오로 인한 건가요?”

맞다네!”

“… 이 매캐한 냄새도?”

그렇다네!”

그럼 저 소파를 덮은 산더미 같은 가루도…?”

바로 그렇…!”

으으으… 아!”

 

돌연 가루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으악!”

 

깜짝 놀라 주저앉을 뻔한 트레이너를 재빠르게 붙잡은 타키온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가루를 좀 뒤집어 썼다지만, 아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라면 어떡하나. 잘 보게 트레이너군.”

아는 사람이라고? 그게 무슨… 설마 저거 맨하탄 카페?!”

, 키온… 당시이인…!”

호오, 분명 의식을 날리기에 충분한 양이었는데… 역시 인간을 기준으로 한 양으로는 부족했던 건가?”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카페를 보며 타키온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렸다.

 

당장… 학생회에, 이 사실을….”

그건 곤란하다네.”

?!”

 

학생회로 향하려는 카페에게 정체 불명의 약물을 먹이는 아그네스 타키온. 채 두 걸음도 못 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맨하탄 카페는 쓰러졌다. 일련의 과정을 보고 얼어버린 트레이너에게 타키온은 달래듯 말했다.

 

, 지금 먹인 건 수상한 게 아니라네. 일전에 자네에게 실험했던 자양강장제를 개선한 것이지. 좋은 효력은 더욱 늘렸고, 기분을 고양 시켜 날뛰게 만드는 부작용 또한 사라졌다네.”

“… 그럼 카페의 상태는 왜 저런 건지 설명해 줄래?”

, 그것 말인가? 기존의 부작용은 사라졌지만, 먹고 나면 30초 내로 정신을 잃고 섭취한 시점에서 대략 1~2시간 분량의 기억을 잃어버리더군.”

 

그거 단기 기억상실을 유발한다는 소리 아니야?’

 

-드르륵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트레이너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사이 타키온은 창문을 열었다.

지금 방 안을 채운 이 가루들은 녹차 잎 성분을 베이스로 15가지의 원료를 섞어 만들었다네. 피부 미용과 두피 및 모발 개선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물건이지만, 기관지라든가 호흡기에 다량 들어가면 붓거나 종양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 있지.”

그런 건 미리 말해줬어야지!”

 

코를 막으며 당황하는 트레이너에게 타키온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핫핫하! 내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실험을 할 리가 없잖은가. 모르모트군, 가서 홍차나 끓여오게나.”

타키온, 이 상황에서 티 타임은 좀 그렇지 않아?”

이 가루들은 테아닌과 카페인에 분해되는 성질이 있다네. 이것들이 많이 들어있는 게 뭐지?”

“… 홍차?”

알아들었으면 당장 차를 끓이러 가게나.”

 

-풀썩

 

맨하탄 카페를 옆에 있는 소파에 대충 던져놓은 타키온. 자신 역시 그 근처 있던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며 분주한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감상하는 그녀. 답지 않게 상냥한 표정을 지은 타키온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상이라는 건… 참 좋군.”

개소리… 웁?!”

 

분위기를 깨는 흑발 소녀를 다시 잠재운 그녀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리운 홍차의 향 때문인지, 트레이너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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