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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 건국사) 0-2 편 : 1582~1583년, 건주 아타이의 반란 2편

by 미하엘세턴 posted Jun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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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숙임.PNG

 

(삽화 출처 : 네이버 웹툰 칼부림)

 

아타이의 난 2부에서는 1582년에 명나라를 향해 반기를 든 아타이가 마침내 몰락하고 참살당한 구러성 전투의 전개를 보다 상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구러성 전투를 다룬 사료들은 후금과 청의 태조계 실록(무황제실록, 고황제실록, 만주실록)과 기전체 사서인 명사, 청사고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사료에서 나타나는 구러성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결말은 사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다만, 이들 사료들을 모두 추합하며 순서를 짜맞추면 어느 정도 그 전말이 드러난다. 이 글에서는 그 전말에 대해 약소하고 간략히 다루어 볼 것이다.

 

이전 편에서 이미 서술했듯 아타이는 1574년경 명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이성량에 의해 토벌당하고 1575년 처형당한 아구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로 얼마간 잠자코 힘을 기르다가, 1582년부터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의 요동총병 이성량, 그리고 그가 이끄는 명나라 요동 방위군은 아타이와 그의 세력이 감당하기엔 너무 강한 상대였다. 1582년 조자곡 전투에서 아타이는 대패했고 결국 본인의 본거지인 구러성으로 도망친다.

 

1583년 아타이는 본인의 동생 아하이와 함께 다시 거병하여 요동의 혼하 일대를 겁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량을 분노케 만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성량은 대대적으로 토벌군을 구성하고 친명파 여진족 향도들1까지 동원하여 아타이의 구러성과 아하이의 샤지성으로 진격한다. 그것은 1583년 2월의 일이었다.

 

머지 않아 구러성과 샤지성은 이성량이 동원한 대군에 의해 포위된다. 이때 구러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력이 온전한 상태였으나 샤지성의 경우 전력이 약 절반 이하로 감소해 있었는데, 샤지성 거주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군민이 명군의 공격을 맞이하기 전에 성을 빠져나가 도피했기 때문이었다.2

 

이런 상황에서 이성량은 본인이 구러성 공격을 지휘하고 본인 휘하의 요양부총병 진득의에게는 샤지성 공격을 맡기고자 했다. 아타이가 난의 주동자이기도 했으나, 구러성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온전한 상황에서 이성량 본인이 지휘하는 토벌군 주력이 구러성을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뒤 이성량은 각 성을 포위하고 있는 양군에 공격을 명하여 공성전을 개시하였다. 공성전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샤지성 공격을 맡은 진득의는 샤지성을 함락하는데에 성공했다. 아하이는 전투 과정에서 전사했고, 샤지성의 군민들은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샤지성은 그렇게 빠르게 무너졌지만 구러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구러성은 화공(火攻)을 비롯한 갖은 공격에도 꽤 긴 시간을 버텼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때는 전투 시작 시기로부터 약 이틀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고 한다.3 당시 건주여진의 성보 수준과 명군의 화력을 생각해 보자면 상당한 선전이었다. 아타이 본인이 필사의 각오로 버틴 것이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러성은 최종적으로 함락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성량이 작정하고 덤비는 상황에서 아타이가 계속해서 버티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구러성은 전투 이틀여 만에 함락당했고, 아타이는 살해당했다.

 

그런데 구러성의 최후는 사료마다 그 묘사가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묘사가 갈리는데, 하나는 '속임수에 의한 함락', 또 하나는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함락'이다.

 

후금의 만문사료인 겅기연 한의 이전 좋은 기록(현행전례)에 의하면 구러성의 방어가 튼튼한 탓에 결국 성에 있던 말단인을 '아타이를 죽인 자에게 성을 줄 것이다'고 속여 그로 하여금 아타이를 죽이게 하여 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와 아버지 탘시 역시 명군의 향도로 나선 여진족 추장, 니칸 와일란의 간계에 의해 명군(이성량)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4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은 현행전례에서 더 나아가서, 구러성이 함락되지 않자 분노한 이성량에게 겁박받은 니칸 와일란이 성안의 군민들을 선동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타이를 배신하게 하였고, 그로서 아타이를 제거했다고 한다. 아타이가 제거되자 이성량은 성안 사람들에게 문을 열게 하여 구러성을 함락했는데, 그와중에 니칸 와일란이 명군을 교사하여 기오창가와 탘시를 죽였다고 한다. 현행전례에서는 아타이를 제거하기 위한 속임수를 쓴 주체가 확실하지 않은 반면, 여기서는 확실히 니칸 와일란이 주체임이 드러난다.

 

청사고 태조본기 역시 기본적으로 위의 서술을 따르지만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니칸 와일란이 아타이의 장정들이 아니라 '아타이 본인'을 속였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명사 이성량 열전,  청사고 왕고 열전 등에는 구러성이 '직접적인 공성을 통해' 함락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타이 본인 역시도 전투중 전사하였다고 서술하고있다.

 

이성량 열전에는 간단히 이성량이 출정하여 구러성을 화공, 아타이를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5, 왕고 열전에는 그보다 자세하게 이틀여에 걸친 화공을 통한 공성과정 속에서 아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전자의 '속임수를 통한 함락'과 후자의 '무력을 통한 직접적인 함락'중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등에서 니칸 와일란의 계책으로 인해 아타이가 죽고 구러성이 함락된 것은 누르하치의 초창기 숙적이자 원수인 니칸 와일란의 비겁성을 강조하기 위한 후금~청 사관의 의도적인 편집으로 보이며, 실제로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들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현행전례'에는 비록 니칸 와일란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고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공격측인 명측의 비겁성을 강조함으로서 이 전투에서 죽은 아타이의 억울함을 부각한다.7 더불어 니칸 와일란의 기오창가와 탘시에 대한 살인교사는 그대로 나오면서 니칸 와일란의 비겁함 역시도 부각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면 아무래도 명사의 이성량 열전과 청사고 왕고 열전의 서술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8그러나 이것 역시 결국 추정에 불과하다. 전자의 '속임수를 통한 함락' 역시 여전히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진실은 누구도 확단치 못한다.

 

 

어찌되었건간에 구러성은 그렇게 무너졌고 아타이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부친인 탘시와 조부인 기오창가 역시도 명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기오창가와 탘시가 왜 그 현장에 있었는지, 그들이 정확히 누구의 뜻에 의해 죽은 것인지는 사료마다 달라 확답할 수 없으나(앞서 말했듯 그들 역시 이성량의 향도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역시도 확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들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었음은 확실하다.

 

이 사건 이후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그 배상에서 더 나아가 니칸 와일란을 죽이게 해달라고 명나라에 청원하였다. 누르하치는 니칸 와일란이 자신의 부친과 조부를 죽이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이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명나라로서는 그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누르하치는 30여명이 채 안되는 동지들, 몇 안되는 동맹자들과 함께 '부친과 조부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준비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녕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

 

아래는 각주

 

 

 

1.후금~청의 사료는 이 향도로 오직 니칸 와일란만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탘시와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는 아타이에게 시집을 보낸 본인의 조카-손녀를 구하기 위해 구러성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들 역시도 명군의 향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2.『만주실록』 만력 11년, 『청태조실록』 만력 11년. 아마도 명나라 토벌군을 상대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음을 파악한 아하이가 피난을 원하는 이들을 내보내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3.『청사고』권222 열전 9 왕고 열전,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등에는 구러성이 버틴 시간은 명시되지 않으나 이 사료들에서도 구러성이 상당히 긴 시간을 버틴 것으로 묘사된다.

4.『현행전례』, 이시바시 다카오 저작 『대청제국』에서 재인용

5.『명사』권238 열전 126 이성량 열전

6.『청사고』권222 열전 9 왕고 열전, 진첩선에 의하면『명사기사본말』에도 해당 구절이 거의 똑같이 반복이 되어 있다고 하나 필자는 해당 구절을 찾지 못하여 왕고 열전만을 인용한다.

7.아타이는 누르하치의 사촌누이의 남편이기도 했다.

8.청사고 태조본기의 경우 누르하치의 본기이니만큼 태조실록의 묘사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니칸 와일란이 속임수를 쓰는 대목이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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