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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01:00

트릭컬 [재연재] 1장 Chapter 1. 나무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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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naver.com/trickcal/16510
https://cafe.naver.com/trickcal/16510
https://cafe.daum.net/rollthechess/qGtL/166?svc=cafeapi
 

더_트릭컬.jpg
 

Ch1. 나무의 일기



서장

어느 날 빛이 내렸다.

그 이전의 기억은 있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날의 연속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살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단지 그뿐이었기에 기억할만한 가치는 없었다

 

그러다 ‘너’를 만났다.

쏟아진 빛줄기 속에서 너는 나타났다.

지금껏 자연스럽기만 했던 내 삶에 너는 처음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네가 퇴색되지 않고, 내가 변색되지 않도록.

이것은 너와 나의 이야기다.



1권 1장

처음엔 즐거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존재했다. 뚜렷하게 생각을 할 수 있을 때쯤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아주 커다란 나무였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래서 나무를 만들어냈다. 꽃을 피웠다.

자라난 풀꽃이 들판을 뒤엎고 나무는 숲을 이루었다.

나날이 성장하는 숲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내 의도대로 피어나는 색색의 꽃을 보는 게 즐거웠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새의 이파리를 단 나무가 크는 게 즐거웠다.

숲은 나의 전부였다.

바꿔 말하자면 나에게는 숲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숲을 가꾸는 게 전부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숲 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로지 숲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만들거나 바꿀 수 있었다.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영원하진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해지고 특별할 게 없는 삶은 따분해진다.

나는 점차 질려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점차 숲을 관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관리하지 않더라도 식물은 알아서 빗물과 햇볕을 양분 삼아 자라났다.

손을 놓고 있어도 아무 문제 없다면 굳이 손을 쓸 이유가 없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숲을 가꾸는 동안 전부 해보았으니, 더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만 축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이다.
 

image.png
 

갑자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번개처럼 하얀 기둥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처음 보는 빛의 기둥에 깜짝 놀랐다. 동시에 엄청난 호기심도 생겨났다. 변함없는 하루하루에 질린 나에게 낯선 빛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샤아아-

하지만 빛의 기둥은 번쩍이며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막 신이 나려던 나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겨우 이 지루한 시간이 끝난다고 기대했던 참이었다.

허탈함에 빛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뭔가를 발견한 나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네가 나타났다.

그 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너에게 언어를 배우고 감정을 익힌 지금이지만, 아직도 그때 느꼈던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

나는 호기심에 부풀어 너를 관찰했다.

생김새가 정말 이상하다.

전체적으로 길쭉하게 생겼는데 뒷다리로만 서 있었다. 앞다리와 뒷다리가 다른 모양새였고 몸처럼 길쭉길쭉했다. 그런데 목은 그렇게 길지 않아서 머리와 몸의 간격이 짧았다.

가죽도 이상해서 얼굴 가죽과 몸 가죽의 색깔이 달랐다. 그게 피부가 아니라 옷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아무튼 너는 숲에 있는 어떤 식물이나 동물하고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

“■■? ■■ ■■?”

그때 네가 처음 듣는 소리를 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신기해서 계속 네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나타난 자세 그대로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다 일어나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툭툭 건드리거나 나뭇잎을 뜯어서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움직이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싫증 난 건지 지친 건지 모르겠다. 너는 그저 주저앉아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 ■■■■…….”

다시 뜻 모를 이상한 소리를 냈다. 뭔가 의미가 있는 건지 몰라서 너에게 더 집중했다. 그땐 네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다 보니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 너하고 직접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네가 내는 소리가 단순한 울음소리 같진 않았다. 마치 상대방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소리 같았다. 지금까지 내 숲에서 그런 존재는 없었다. 오로지 나만이 그러했다.

나와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지난날 동안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다.

“■, ■■■……. ■■ ■■■…….”

그때 네가 자기 배를 문지르며 힘없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내어 인사했다.

“…….”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잘못된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인사했지만 무시당했다. 몇 번이고 더 시도해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깨달았다. 문제는 너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

나는 보통 본체인 나무에 깃들어 지낸다. 때로는 의식을 내보내어 정신체 상태로 숲을 돌아다녔다. 숲의 존재들은 정신체 상태인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너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너와 비슷한 형태로 실체화했다. 최대한 소리도 비슷하게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했으니까 적어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딱!

돌멩이를 던지는 게 인사 방법일까?

돌멩이에 얻어맞은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통각이 없으니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나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인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서 비슷한 모습도 만들었다.

그런데 돌멩이를 맞았다.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서러웠다. 그전까지는 서럽다는 감정도 몰랐고 눈물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인간과 비슷한 몸을 만들어서 그런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나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부끄럽다거나 숨겨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 내 모습에 너는 꽤 당황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 미안해.”

그저 소리로만 인식되었던 네 말이 처음으로 똑똑히 들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음이 멈췄다. 서러웠던 감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처음부터 가졌던 왕성한 호기심이 다시 샘솟았다.

네 말이 뭘 뜻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똑같이 따라 했다.

“미, 미안해?”

“응. 미안.”

“응. 미안……?”

“미안.”

“미안해? 미안……? 해? 미안?”

“……응?”

나는 ‘미안’과 ‘미안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몰랐다. ‘해’를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런 내가 이상했는지 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풉! 푸후훗!”

그러다 이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고는 돌멩이에 맞은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상하게도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과 웃음에 내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푸훗…… 풋, 푸후.”

나는 어설프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네가 웃는 걸 따라 했다. 뭔가 즐거운 행동이었다.

나는 웃었고 그런 나를 보며 너도 다시 웃었다. 이번엔 자그마한 숨죽인 웃음이 아니라 대놓고 크게 웃는 웃음소리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숲이 온통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너와의 첫 만남은 나에게 웃음이었다.

가끔 너에게 돌멩이를 맞았던 머리가 아려올 때도 있지만 말이다.



2권 2장

“네 이름은 뭐야?”

나는 언어를 아예 몰랐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너는 많이 답답해했고, 그래서 너에게 말을 배웠다.

아주 기본적인 말만 배웠을 때쯤 네가 그렇게 물었다.

“……?”

“이, 름. 이름 말이야.”

“이름?”

그동안 나에겐 말을 따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네가 말을 하는 게 신기해서 무조건 따라 하다가 습관이 들어버렸다.

내가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네가 다시 물었다.

“계속 ‘얘’니 ‘너’니 이렇게 부르긴 불편하잖아. 내 이름은 ‘애린’이야.”

“에린?”

“애. 린. 어이가 아니라 아이.”

“에, 에? 어이? 아이?”

“……참, 설명해봐야 소용없지. 하긴 무슨 상관이래. 어차피 듣긴 매한가지인데. 그래, 에린이라고 하자. 외국인 느낌도 들고 낙원 같아서 좋네.”

“에린. 에린. 에린.”

나는 ‘에린’을 계속 중얼거렸다. 왠지 좋은 느낌이 드는 발음이었다.

“예, 예, 예. 그래서 네 이름은 뭐야?”

네가 계속 물었지만 나는 이름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좋다고 ‘에린’을 반복해서 내뱉기만 했다.

“이름? 에린.”

“에린은 내 이름이 에린이고. 어…… 설마 이름이 뭔지 몰라?”

그제야 에린이 문제를 알아차렸다. 에린의 눈썹이 약간 휘어지고 이마 가운데 부분에 주름도 생겼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 반응에 내가 뭘 잘못 대답한 건지 걱정되었다. 또 돌멩이를 맞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에린이 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소. 나. 무.”

“……?”

다행히 손가락이 나를 찌르는 일은 없었다. 손가락은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나뭇잎이 뾰족한 나무였다.

에린이 다시 말했다.

“소. 나. 무.”

“소나무?”

“좋아, 잘했어.”

그다음으로 손가락이 발밑의 꽃을 가리켰다. 빨간색이나 분홍색을 주로 띄는 솔방울만 한 꽃이었다.

“코. 스. 모. 스.”

“코스모스.”

나는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습관대로 에린의 말을 따라 했다. 내가 제대로 발음할 때마다 에린이 칭찬해 주었다.

그런 행동을 몇 번 정도 더 반복했다. 그런 다음 에린의 손가락이 본인을 가리켰다.

“에. 린.”

“에린!”

나는 간신히 에린이 말한 이름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게 신나서 나도 모르게 네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런 날 보고 에린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도 전처럼 따라 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내 입에서는 웃음소리 대신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이름……?”

나는 이름이 없다.

에린의 손가락이 가리킨 이 숲의 모든 게 다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다.

그 사실은 꽤 충격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저 이름 모를 꽃에도 이름이 있고 언제부터 자랐는지 모를 나무에도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나만 이름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떨어트려서 땅만 바라보았다. 마음이 울적했다. 그러고 있는데 에린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이름을 모르는…… 아니, 아니지. 그동안 이름이 없었던 거야?”

“…….”

왠지 소리 내어 대답하기가 싫어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인정하기 싫은데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내 눈앞에 갑자기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없으면 내가 지어줄까?”

나뭇가지를 따라서 잡은 손으로, 손에서 팔을 타고 얼굴로, 그렇게 바라보게 된 에린의 얼굴은 안심하라는 것처럼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쓱쓱.

나뭇가지가 움직이며 땅에 무엇인가를 그렸다. 에린은 땅에 내가 알지 못하는 걸 그리며 중얼거렸다.

“좋아! 그러면 음…… 나무니까 ‘라임 오렌지’로? 아냐, 이건 좀 아니지. 그럼 뭐가 좋을까……?”

흙바닥에 나뭇가지가 몇 번씩이나 그림을 그리고 지웠다. 그런 행동 끝에 마침내 단어 하나가 완성되었다.

ELDER

그게 그림이 아니라 글자라는 사실은 나중에 배웠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 왠지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린은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무 흔한가? 뭔가 늙어 보이는 것도 마음에 안 드네.”

그렇게 말하더니 바닥에 그린 그림을 나뭇가지로 쓱삭 훑었다. 지우려는 시도였는데 나뭇가지가 애매하게 긁혀서 딱 네 번째인 E라는 글자만 지워졌다.

ELD’ R

“응? 엘드……르? 오, 어감 괜찮네. 엘드르 어때, 엘드르?”

“엘드르?”

“응. 엘드르. 네 이름이야.”

소나무와 코스모스를 가리켰으며 마지막으로 에린 자신을 가리켰던 손가락이 이제는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엘드르!”

나는 소리쳤다. 너의 이름을 외쳤던 소리보다 더 컸다. 너무 기뻐서 내 이름을 반복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엘드르! 엘드르! 엘드르!”

“쿡쿡. 그렇게 좋아?”

나는 아직 이름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네가 어떻게 나무와 꽃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물에 사는 생선들의 이름이 왜 전부 ‘붕어’인지도 모른다.

전혀 다르게 생긴 나무인데 같은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내 이름은 엘드르다.



3권 4장

나와 다르게 에린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게 많았다.

처음 에린을 보았을 때 옷을 피부로 착각했었다. 인간은 그런 옷이 있어야만 체온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옷만 있다고 끝나지 않았다. 추운 날에는 불의 온기가 필요했다. 또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음식과 물도 먹어야 했고, 음식은 불로 구워서 먹어야 하는 게 더 많았다.

참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에린은 그런 게 인간이랬다.

어쨌든 에린이 이 숲에서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게 필요했다. 그런 에린을 내가 도와줄 수 있었고, 이건 그 계기가 되는 일이었다.

“아, ■■!”

에린이 들고 있던 나무를 집어 던지며 크게 소리쳤다. 처음 듣는 말이어서 그런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무서운 느낌이 들어서 움찔했다.

에린은 집어던졌던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들고 노려보았다.

“왜 안 되지? 만화책 보면 금방 되던데.”

에린은 곧게 뻗은 나뭇가지를 더 큰 나무토막에다 계속 비벼댔다. 나는 에린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하는 게 재밌어서 구경했다.

에린이 불을 피운 건 3일째였다.

“아아아악!!! ■■!”

그리고 불이 꺼진 건 3분 만이었다. 불을 피우자마자 소나기가 내리더니 불을 꺼트렸다.

에린은 내가 이제껏 듣지 못한 큰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불 꺼진 나무토막을 호쾌한 발차기로 날려버리더니 죄 없는 나무를 주먹으로 퍽퍽 소리 나게 후려쳤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다가 오랜만에 돌멩이를 맞았다.

에린은 덜덜 떠는 나에게 웃으며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엘드르.”

“응?”

“해봐.”

“응……?”

“불 피우라고.”

“으응……?”

에린과 지내는 동안 나는 눈치라는 개념을 배웠다. 그러므로 까딱 잘못했다가는 나도 방금 에린의 주먹에 얻어맞은 나무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

맞으면 아프진 않은데 서럽다. 서러우면 눈물이 났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나뭇가지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에린처럼 나뭇가지를 서로 비비지는 않았다.

에린의 목적이 불을 피우는 것이라면 나에겐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나에겐 바라기만 해도 이뤄지는 힘이 있다.

방금 소나기가 꺼트렸던 불이 다시 피어오르길 바라자 곧바로 불길이 일었다.

“어, 어? 부, 불이다! 불이야!!”

“엘드르 가능해. 불 만들어.”

“꺄아악! 엘드르 짱! 우윳빛깔, 엘드르! 최고존엄, 엘드르! 사랑해요, 엘드르!”

격한 환호성을 지르며 에린이 날 꽉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었지만 에린은 신경 쓰지 않고 날 껴안은 채 방방 뛰었다.

나는 나무처럼 땅에 한참 동안 박혀있었다. 원래 본체가 나무지만 말이다. 에린이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마법! 마법이야! 대단해, 엘드르! 마술 트릭 아니지? 영화에서나 보던 걸 내 눈으로 볼 줄은 몰랐어. 이거 잘만 활용하면 원래 세계의 물건을…….”

뒷말은 혼잣말로 중얼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에린이 불을 피운 이 힘을 ‘마법’이라고 했다. 에린의 세상에서도 내가 쓴 힘과 같은 게 존재하는 모양이다. 정말 에린은 모르는 게 없었다.

에린이 말한 대로 이 힘을 ‘마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에린은 나무를 더 모아 모닥불을 만들고 그 곁에서 몸을 녹였다. 에린의 얼굴이 흐물흐물하게 늘어졌다.

“엘드르. 혹시 불 말고 다른 것도 만들 수 있어?”

“다른 거?”

“음, 그러니까…….”

에린은 열심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림이 움직이는 네모난 상자라거나 먼 곳에서 말해도 소리가 전달되는 이상한 물건 등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대부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열심히 들었지만 에린이 원하는 물건을 전혀 만들어 주지 못했다.

신나서 떠들던 에린은 결과에 실망했다. 하지만 금방 회복해서 복잡한 물건 대신 간단한 것들을 설명했다. 더울 때 선선한 바람이 불거나 시원한 물이 나오는 정도였다.

“엘드르. 할 수 있다.”

에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다. 신이 나서 마법을 사용했다.

에린의 의도대로 물과 불을 만들 수 있도록 자연의 힘을 모은 존재를 아예 창조해버렸다.

에린이 원하면 언제든지 불을 일으키고 물을 뿜어낼 수 있는 존재가 만들어졌다.

“와~! 이거 완전 부르스타랑 정수기네.”

에린이 그렇게 말했기에 내가 창조한 마법 생명체의 이름은 ‘부르스타’와 ‘정수기’가 되었다.

그 둘 외에도 바람과 땅의 속성을 지닌 생명체를 더 만들었다. 각기 ‘선풍기’와 ‘트랙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이 경험으로 나는 ‘정령’의 개념을 잡았다. 이 이야기는 길어지니 뒤에서 자세히 쓰겠다.

아무튼 나는 정령 외에도 마법을 사용해 에린이 여러 물건을 만드는 걸 도왔다.

에린은 움막이라고 부르는 작은 집을 허물고 나무를 잘라 새로 집을 지었다. 가구라는 제각각의 모양을 지닌 물건도 만들어서 집 안에 채워 넣었다.

살 곳이 만들어지자 에린은 또 다른 시도를 했다.

나무 열매 따위를 이것저것 따와서 요리를 만들었다.

“엘드르, 엘드르. 이거 먹어봐. 이번엔 자신작이야. 지난번처럼 먹는다고 녹진 않을 거야. 아마…….”

“…….”

목소리에 자신이 없다.

에린은 꼭 본인이 먹기 전에 나에게 먼저 권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음식을 먹는다는 개념이 낯설었다. 나는 먹지 않아도 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보라색의 요리를 거절했다.

치익!

요리가 탁자에 살짝 흐르자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지금 생각해도 거절하길 잘한 것 같다.

그렇게 에린과 나는 재미있으면서도 조금은 아찔한 시간을 보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에린은 처음 이 숲에 떨어졌을 때 보여줬던 우울한 모습을 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따금 에린이 외로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러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외로워하는 에린을 내가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4권 2장

어느 날 새끼늑대가 나타났다.

저런 게 이 숲에 있었나 싶어서 의아해하는데, 에린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흥분해서 날뛰었다.

“어머, 얘, 너 뭐니? 왜 이렇게 귀여워? 응? 엄마는 어디 가고 혼자 왔어? 엄마 올 때까지 언니랑 놀까? 이리 와 봐. 우쭈쭈!”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저 말을 내뱉은 걸로 기억한다. 에린에게 말을 꽤 배웠는데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새끼늑대는 에린과 날 보더니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다가왔다. 음식 냄새라도 맡고 온 걸까? 요즘 에린의 요리는 나무를 녹이지 않고 냄새도 좋으니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이 숲의 짐승도 에린처럼 평소의 나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날 알아보는 짐승의 반응은 꽤 신선했다.

“꺄아아아악! 이 눈망울 좀 봐! 얘, 너는 이름이 뭐니? 응? 언니한테 살짝 알려주라.”

에린이 너무 좋아하는 모습에 약간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내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에린은 새끼늑대를 막 쓰다듬고 껴안으며 놀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마침 들고 있던 음식을 주었다. 새끼늑대가 살짝 혀를 댔다가 바로 켁켁거리며 뱉었다.

역시 냄새만 좋아졌지, 위험도는 그대로인 모양이다.

딱!

마음껏 웃다가 간만에 돌멩이에 맞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은 나를 내버려 둔 채 에린은 켁켁대는 새끼늑대에게 조용히 말했다.

“빵은 싫어? 네가 말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네. 아하하하.”

왠지 건조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에린은 새끼늑대를 꽉 껴안았다. 그 모습이 조금 슬퍼 보였다.

하지만 잠시 그랬을 뿐, 우울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에린은 금방 활기차게 변해서 새끼늑대와 놀았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에린은 외로워하고 있었다. 새끼늑대와 노는 걸 보고 확실하게 알았다. 그저 내 앞에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에린을 도와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에린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에린이 지쳐 쉬는 동안 새끼늑대를 데려왔다. 에린은 늑대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법 생명체를 만들 때처럼 정신을 집중해서 늑대에게 힘을 쏟았다. 에린처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도록 상상하면서 말이다.

새끼늑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바짝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조금씩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다란 주둥이가 줄어들고 짤막했던 네 다리가 길어졌다. 허리가 짧아지더니 앞다리와 뒷다리의 모습도 변했다. 골격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image1.png
 

“끼잉?”

새끼늑대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늑대가 본래 내던 울음소리보다 인간이 늑대 흉내를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 같이 보고 있던 에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우-!

그때 커다란 늑대가 나타났다. 새끼를 찾으러 온 어미 늑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어미 늑대는 모습이 변한 새끼늑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반가워하며 뛰어가는 새끼늑대에게 어미 늑대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캬앙!

“안돼!”

빠르게 뛰쳐나간 에린이 겨우 새끼를 공격하려던 어미를 막았다. 에린이 팔을 휘두르자 어미 늑대는 새끼에게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고 도망쳤다.

“…….”

에린은 멀어지는 어미 늑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미 늑대가 완전히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상태였다.

새끼늑대는 어미가 사라진 곳을 향해 낑낑거렸다. 에린의 시선이 새끼늑대를 보았다가 나에게로 향했다.

피는 흐르지 않지만, 차갑게 식은 느낌이 들었다.

에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돌멩이를 맞지도 않았고 어떤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알 수 있었다.

에린이 화났다.

아마도 내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에린의 침묵이 무서워졌다. 에린이 이대로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내, 내가 해결할게, 에린! 네가 여기 있어서 내 힘이 제대로 안 나온 거 같아. 집에 들어가서 쉬고 있으면 내가 다 해결해놓을게!”

에린은 계속 나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등을 돌리고 집에 들어갔다.

나는 곧장 새끼늑대를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했다. 에린에게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정말 그래서였던 건지 모르겠다. 다만 정말 이번에는 제대로 해야겠다며 집중했다.

마법을 쓰니 역관절이 곧게 펴졌다.

또 마법을 쓰니 남아 있던 등과 다리의 털이 빠졌다.

계속 마법을 쓰니 뭉툭했던 코가 오똑하게 솟고 눈이 가늘어졌다.

늑대가 점점 인간에 가까워졌다.

마법을 쓸수록 인간처럼 변했다.

어떻게 보아도 이젠 늑대가 아니었다. 짐승이라고 부르기조차 힘든 모습이었다.

더구나 원래 목적이었던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했다. 목의 구조가 인간처럼 바뀌었다고 해도 그 안에 있는 건 여전히 새끼늑대였다.

안절부절못하며 새끼늑대를 보다가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인간처럼 변한 새끼늑대는 에린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마법을 쓸 때 에린처럼 말하기를 바랐는데, 모습 자체가 에린처럼 변했다. 설마 내 본심이 그러길 바란 걸까?

모르겠다.

커다란 의문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마음속에서 에린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 자각했다.

고민에 빠진 나는 새끼늑대를 잠시 잊고 말았다.

후다닥!

다급한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새끼늑대가 숲속으로 사라진 이후였다.

나는 새끼늑대를 찾기 위해 힘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능력을 사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 힘을 써도 될지 모르겠다. 방금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이번에도 실패할 수 있다.

힘을 쓰면 안 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실체화한 몸으로 직접 숲을 헤매었다. 밤이 새도록 새끼늑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새끼늑대를 찾지 못했다.

날이 밝은 뒤에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잠들어있을 시간이었지만 에린은 일어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끼늑대는? 어떻게 됐어? 엄마는 다시 찾아준 거야?”

“…….”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새끼늑대가 도망가서 못 찾았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에린이 나에게 실망하는 게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에린의 시선을 느끼며 간신히 작은 목소리를 냈다.

“잘, 갔어…….”

“그래? 하아~ 다행이다. 진짜 걱정했다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네 힘 막 쓰면 안 돼. 알았지?”

완전히 내 말을 믿는 건지 에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내 귀로 들어와 가슴 속에서 돌로 변했다.

속이 막혀 답답했지만 티를 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저 외로움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에린이 떠올랐다.

에린은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도 에린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내 행동은 당연했다.

긴 생각 끝에 겨우 한 단어를 내뱉었다.

“응.”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이 대답을 가장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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