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컬 [재연재] 1장 Chapter 1. 나무의 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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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1. 나무의 일기 (2)
5권 4장
이번엔 내 힘에 관한 이야기다.
새끼늑대 사건 이후로 에린은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르치려 들었다. 기본적인 언어부터 시작해서 추상적인 개념까지 세세하게 가르쳤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내 실수 때문인 걸 아니까 지겨워도 참았다. 그리고 배우는 동안 에린과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고, 내가 이해할 때마다 기뻐하는 에린의 모습을 보는 게 좋기도 했다.
이번에 가르쳐 주는 개념은 ‘친구’였다.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
“미안.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쿡쿡쿡.”
가끔씩 에린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장난을 치며 혼자 웃었다. 내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도 숨죽여 웃곤 했다.
“방금 건 농담이고, 엘드르 너는 내 친구야.”
“친구가 뭐야?”
“친구라는 건 말이지……. 어,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친구는 뭘까?”
에린은 당당하게 설명하려다가 멈칫하더니 생각에 빠졌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에린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에린은 마침 숲에서 뛰노는 토끼 한 쌍을 보고 가리켰다.
“아, 재들 보이지? 쟤들처럼 둘이 즐겁게 노는 사이를 친구라고 하는 거야.”
정답게 뛰어놀던 토끼들이 같은 풀을 뜯어 먹다가 서로 입이 닿았다. 풀은 이미 다 먹었는데도 입이 계속 움직여댔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어보았다.
“친구는 저런 걸 하는 거야?”
“…….”
에린의 얼굴은 내가 처음 볼 정도로 빨갛게 변해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괜찮아? 어디 아파?”
“어, 아, 아니…….”
“그러면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어?”
“그, 그것도 아니, 아니, 아닌 게 아니지. 잘못 이해한 건 맞는데, 어, 그러니까……. 후아! 후우우우…….”
에린은 계속 얼굴이 빨개진 채 허둥대며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에린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조금 차분해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있지, 저건 친구가 아니라…… 그 뭐야 연인! 그래, 연인 관계라고 하는 거야. 그게 뭔지는 알지?”
그런 에린의 모습이 꽤 재밌었다. 다만 돌멩이를 또 맞고 싶진 않아서 마음속으로만 웃었다.
토끼 다음으로 에린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핀 꽃을 예시로 들었다. 저렇게 서로 돕는 게 친구란다. 참고로 기생식물이었다.
몇 번의 예시를 더 들은 후에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친구가 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너랑 나 같은 관계인데, 이게 또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렵네. 예를 들어도 하필 이상한 것들만 걸려서…….”
“그럼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잖아? 토끼나 꽃처럼 하면 돼?”
“……일단 그건 친구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둘게.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그리고 친구라는 게 무작정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어려워. 너는 친구를 어떻게 안 거야?”
“그게…… 음, 잘 모르겠다. 그냥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안 거 같기도 해. 친구란 게 ‘우리 이제부터 친구 하자.’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친구인 경우가 많았어. 학교나 학원에서도 그랬고.”
약간은 알 것 같았다. 에린은 우리가 이미 친구라고 했다.
함께하면 기쁘고 상대방이 좋고 서로를 위할 수 있는 관계. 그걸 친구라고 하는 모양이다.
“자, 알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끝내자. 후아…….”
에린은 흥분이 가라앉기는 했지만 뭘 더 가르쳐줄 정신은 없어 보였다. 갑자기 보내는 게 미안했는지 머리를 정리해주겠다며 머리핀이라는 것을 꽂아 주었다. 머리핀이 무엇인지 뭐에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에린이 준 것이라 좋았다. 여기에 에린은 ‘빵’이라는 음식도 줬다.
요즘은 동물들도 빵을 잘 받아먹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먹지 않았다. 머리핀처럼 에린이 주니까 받았을 뿐이다.
에린과 헤어진 나는 내 본체가 있는 공터로 향했다.
에린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혼자서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에린에게 제대로 된 친구를 더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모여.”
에린을 위해 그동안 만들었던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땅, 불, 바람, 물의 정령들. 에린은 왜 마음의 정령이 없냐면서 국룰 위반이라고 따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다 모인 정령들에게 약간의 지능을 부여했다.
지능이 생긴 정령들은 처음엔 서로 잘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 점차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특히 물과 불은 가벼운 다툼을 벌이더니 나중엔 서로를 없앨 것처럼 싸웠다.
지난번 새끼늑대 사건 때도 느꼈지만, 이미 만들어진 존재를 변화시키는 건 위험했다. 만약 그때처럼 바로 언어능력을 부여하려고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
두 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서 새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온전히 내 힘만으로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바로 새로 만들 생명체의 조건을 생각했다.
에린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지성이 필요하다. 에린이 귀여운 걸 좋아하니 예쁘장하게 만들면 더 좋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에린을 좋아하고, 에린이 주는 것들을 아껴야하겠다. 외롭지 않도록 친숙한 성격까지 갖춘다면 완벽하다.
무엇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도망친 새끼늑대 같은 경우를 또 만들어낼 순 없었다.
여러 조건을 되새기며 힘을 집중했다. 두 손을 모아 작은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힘을 불어넣었다
화악!
손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뭔가가 생겨나더니 점점 커지는 게 느껴졌다. 힘을 계속 불어넣다가 끝났다는 느낌이 들자 슬며시 손을 펼쳤다.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는 훨씬 작은 아이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순간 이번에도 인간처럼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때 새로 태어난 아이가 내 손가락을 이리저리 건드렸다. 뭐하나 싶어서 바라보니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베시시 웃었다.
그 순간 에린이 어린 동물을 보고 왜 귀엽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귀엽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다.
외모는 인간을 닮았지만 나를 좋아하고 따른다. 약간의 실수는 있어도 내가 생각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 계획은 성공이다.
신이 나서 아이를 더 만들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아이까지 만들어진 후에야 멈췄다.
너무 신을 냈다.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여전히 힘은 남았지만 잠시 쉬고 싶었다. 그러자 막 태어난 아이들이 내게 달라붙어서 놀기 시작했다.
내 머리카락을 묶어서 그네처럼 탔다. 어깨 위에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지나치게 달라붙어서 살짝 튕겨내자 울먹거리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는 꼴이 어린 동물처럼 뻔뻔했다. 한 녀석은 동물처럼 털이 북실하다. 그러고 보니 생긴 게 다들 조금씩 다르다.
관심사도 다른지 어떤 녀석은 내 품에 파고들어 에린이 준 동전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고, 한 녀석은 그네를 태워주느냐 빠진 머리핀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다. 한 놈은 에린이 준 곰 모양 열쇠고리에 깔려서 움직이질 않는다. 다친 건가 해서 살짝 들어 올려 보니 곰 모양 열쇠고리에 매달려 딸려 오는 걸 보고 다시 바닥에 놓아뒀다.
날 가지고 노는 게 귀찮지만 귀엽기도 해서 놀게 내버려 뒀다.
내가 가만히 있자 아이들은 더 신나게 놀았다.
나는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몇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을 발견했다.
뭐라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꿍얼대며 서로 의사소통을 했다. 성격도 조금씩 다른 듯 금세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도 하나가 아파하면 나머지가 걱정해줬다. 언어나 감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건 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린에게 받았던 빵을 잘게 쪼개어서 나누어줬다. 처음에 경계하던 아이들이 빵을 한입 베어 물더니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볼을 잔뜩 부풀리고 빵을 먹는 게 귀여웠다. 빵을 다 먹은 아이들은 배가 부른지 하나 둘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아이들을 보면 에린도 기뻐할 거라고 확신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에린을 찾았다.
아직 잠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고 작은 상자에 담아서 데려갔다. 잠든 아이들을 본 에린은 마치 ‘요정’ 같다며 좋아했다. 마법과 정령에 이어 새로운 이름이 정해졌다.
에린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나도 따라 웃었다. 반응을 보니 이번엔 실수하지 않은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자 신이 나서 요정들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다 떠들어댔다. 에린은 맞장구쳐주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그러는 사이 밤이 되었다.
아이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정들을 깨우기 위해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를 따라서 에린도 아이들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순간 에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둡게 변했다.
불안함이 커져 마음이 불편했다.
“어서 일어나. 에린이 보고 싶어 해.”
조금 더 거칠게 아이들을 깨워보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아예 몸을 잡고 흔들려던 내 손을 에린이 딱 붙잡았다.
“그만해, 엘드르.”
“하지만 애들이 아직 안 일어나는데…….”
“소용없어. 이미 죽었어.”
슬픈 목소리였다.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놀다가 지쳐서 오래 잘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린은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왜 안 일어나는 거야? 죽으면 안 일어나?”
“…….”
어두웠던 에린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아직 에린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었지만, 죽는다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아차렸다.
“에린?”
“넌 죽는다는 게 뭔지 몰라?”
나는 에린에게 잡혔던 손을 풀고 다시 요정들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죽음이 뭔지 몰랐다.
“엘드르, 그만해.”
“죽는다는 게 뭐야?”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의아함보다는 슬픔이 담긴 목소리였다. 에린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내가 실수한 걸 혼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슬픈 것처럼 느껴졌다.
에린은 나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잘 들어 엘드르. 죽는다는 건…….”
왜 손가락에 닿은 요정들이 깨어나지 않는지 설명해주었다. 손가락 끝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와 다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말해주었다.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에린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마음이 갑갑해졌다. 어느새 아이들을 건드리던 손가락도 멈췄다. 손끝에 닿은 아이들의 체온처럼 나도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에린은 나를 마주보길 멈추고 시선을 숲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난 이 숲에서 죽는 걸 본 적이 없어. 어느 것도 말이야.”
에린은 죽음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다.
“숲에 죽은 나무가 하나도 없었어. 나무는 오래 사니까 그럴 수 있다지만 꽃까지 전혀 시들지 않은 건 이상해. 심지어 동물들이 사냥하는 모습조차 본 적이 없어.”
“그게 네가 말한 ‘상식’이야?”
“그래. 식물은 죽어서 다른 식물의 양분이 되고, 동물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 원래는 그런 거야. 그런데…….”
숲을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에린이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되물었다.
“배고프지 않으려고 서로 죽인다는 거야?”
“응. 내가 전에 잡았던 붕어처럼…….”
“그건 ‘먹는’거랬잖아! 그게 왜 ‘죽는’거야!?”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본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먹으려면 죽어야 하니까.”
그런데도 에린은 꾹 눌러 담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에린의 말대로 이 숲에는 죽음이란 개념이 없다. 요정들이 이 숲에서 처음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에린이 오고 나서 벌어진 일이었다.
숲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죽음은 나쁜 거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니까…… 결코 좋은 건 아니야.”
“…….”
입을 다물었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조금 전부터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던 불안감이 뚜렷하게 정체를 드러냈다.
불안감을 생각으로 정리하고 언어로 다듬었다. 그 끝에 겨우 말로 꺼낼 수 있었다.
“에린.”
“왜?”
“너도…… 죽어?”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에린이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응. 나도 죽겠지. 언젠가는 말이야.”
내가 계속 불안하게 여겼던 건 이별이었다.
죽으면 에린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다시 홀로 떨어져 지루하게만 보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동시에 죽음을 이 숲에 데려온 에린이 겁났다.
“너 때문이야!”
나는 그곳을 박차고 나왔다. 실체화된 몸을 풀어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에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에린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죽음이 내린 숲에서 너를 홀로 남기고 나는 도망쳤다.
6권 2장
눈이 내렸다.
언제나 푸르던 숲이 빛바랜 낙엽을 떨구더니, 어느새 앙상한 나뭇가지에 하얗게 얼어붙은 비가 쌓였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풍경이다. 에린이 오기 전까지는 낙엽도 눈도 없었다. 모두 에린이 이 숲에 가져왔다.
죽음과 함께 말이다.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에린을 찾지 않았다. 몸을 실체화하지도 않았다. 변해가는 숲을 되돌리기 위해서 힘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에린을 잊은 적은 없었다.
단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어린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많은 풀과 나무가 얼어 죽는데도 버티고 있었다. 잘 보니 밑동에 익숙한 천이 묶여 있었다. 에린의 옷이었다.
한동안 묘목에 정신을 빼앗겼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에린이 일부러 이 숲에 죽음과 겨울을 몰고 온 게 아니다. 애초에 에린이 원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죽음에 겁먹은 내가 에린의 탓으로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바로 몸을 실체화시켰다. 오랜만이지만 바로 어제 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몸이 만들어졌다. 그대로 곧장 에린이 지내던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못을 자각함과 동시에 걱정이 생겼다. 몸을 만드니 추위가 느껴졌다. 옷을 찢어서 묘목에 묶었다면 어떻게 이 추위를 버티고 있을지 모르겠다. 불의 정령만으로 충분할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외로워하던 에린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도와주려고 했었는데, 정작 내가 외롭게 만들고 말았다.
어느새 에린의 집에 도착했다.
미안함 때문에 집 앞에서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에린. 에린!”
오랜만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에린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데 자그마한 불똥 하나가 툴툴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주인님은 지금 없는데요?”
부르스타란 이름의 정령이었다. 그런데 말을 한다.
“뭐, 뭐야? 너, 너 왜 말을 해?”
“주인님이 가르쳐 줬는데요?”
“에린이? 그럼 에린은 지금 집에 없어? 어디 간 거야?”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요. 요즘은 며칠 동안 계속 이 시간쯤에 동쪽으로 나가긴 했는데요.”
“동쪽……이 어디야?”
“해 뜨는 방향인데요.”
부르스타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모르는 것까지 에린이 가르쳐준 모양이다. 살짝 샘이 났지만 중요한 건 에린이 동쪽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나는 곧장 부르스타가 말해준 방향으로 향했다. 눈밭 위에 에린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며 에린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에게도 이유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변명이었다. 사과부터 해야 한다. 생각이 마무리될 때쯤 에린을 찾았다.
“에린…….”
에린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고서 작은 천쪼가리를 어린나무에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커다란 늑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린이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엘드르?”
“에린…….”
“잠시만 기다려. 다 끝났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에린은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나만 긴장했다는 생각에 조금 무안했다. 에린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에린 옆에 있는 늑대도 신경 쓰였다. 어디서 본 느낌이 들었다. 늑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에린의 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에린은 묘목에 천을 다 묶은 다음에 손을 털며 일어났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됐겠지.”
“에린. 그동안 내가…….”
“잠시만. 아직 일이 남았어. 마침 잘 왔네. 나 따라와, 엘드르.”
에린은 내 말을 자르더니, 내가 따라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늑대가 따라갔고 나는 멍하니 있다가 허둥지둥 뒤따랐다.
금방 작은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에서 어린 늑대들이 몇 마리 뛰어놀고 있었다. 어린 늑대들은 에린과 커다란 늑대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들었다.
어린 늑대들을 쓰다듬어 준 에린은 언덕 위에 있는 작은 흙더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털었다.
나는 어색하게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린이 계속 흙더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생명이 죽었을 때 이렇게 땅에 묻고 흙을 덮어줘. 인간만 그러는데 가끔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해. 단어로는 ‘무덤’이야.”
“무덤…….”
에린은 아직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왜 거짓말을 했어?”
“…….”
추웠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새끼늑대를 인간으로 만들었을 때처럼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여긴 네가 인간처럼 만들었던 새끼늑대의 무덤이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혼자서 숲을 떠돌다가 죽었더라. 내가 처음 발견해서 여기 묻어줬어.”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잿빛 구름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고향의 겨울도 이렇게 추워. 눈이 펑펑 내릴 때는 땅이 막 얼어붙거든.”
“어…….”
“그래도 그렇게 문제는 아니야. 따뜻한 옷도 많았고 집에선 보일러 빵빵하게 틀었거든. 엄마가 손 시리다고 손난로랑 핫팩 항상 챙겨줬고, 아빠는 촌스러운 빙판용 부츠까지 사줬다니깐. 언니는 잘만 신고 다녔는데 난 못 신겠더라고.”
에린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많이 나왔지만 잠자코 들었다. 새하얗게 언 한숨이 나왔다.
“좀 촌스러워도 신을걸. 그거 안 신는다고 아빠가 서운한 표정 짓는 게 왜 이렇게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핫팩 똑바로 챙기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그렇고. 언니는 조카 낳을 때 됐다고 나한테 심부름 막 시켜댔는데…… 이젠 그것조차 그립네. 아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느새 눈이 쌓인 어깨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에린은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더 이상 에린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한동안 에린은 그렇게 있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자, 이제 궁상 끝! 오랜만이야, 엘드르! 보고 싶었어!”
다시 일어난 에린은 예전처럼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얼떨떨하며 안겼다.
가끔 에린은 일부러 밝은 척을 했다. 안 좋은 감정을 억지로 털어내려는 듯이 말이다. 그때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다시 밝게 웃어서 좋았다.
에린은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내가 사과할 틈도 주지 않으며 에린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수동적으로 답변만 하던 나도 하나둘 내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한 일이 많았던지라 할 말도 많았다. 점차 내 이야기도 많아졌고, 어느새 우리는 예전처럼 친하게 떠들어댔다. 마치 예전처럼 되돌아온 것 같았다.
다만 여전히 눈이 내렸다.
6권 6장
빛의 기둥에서 에린이 나타났던 장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내 힘과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아마도 이 힘 때문에 에린이 이곳에 왔을 것이다.
그러니 이 힘을 이용하면 에린을 돌려보내 줄 수 있다.
에린을 돌려보낸다는 생각은 꽤 이전부터 했다.
외로움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는데, 새끼늑대의 무덤 앞에서 소리 없이 울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물론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에린이 나타난 뒤로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심지어 죽음을 알고 혼자 토라져서 박혀있을 때조차 예전의 의미 없는 날들에 비하자면 훨씬 가치가 있었다.
그래도 에린을 돌려 보내줘야 한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에린과 만나서 노는 시간만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연구하면서 보냈다. 에린을 돌려보내기 위한 힘의 흔적만 발견했을 뿐이지, 다른 건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단순히 내가 바라기만 해서 이뤄지지 않았다. 어디로 돌려보낼지 정확한 좌표를 찾아야 하고, 그곳까지 보낼 힘을 모아서 쏟아부어야 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데요?”
“내가 널 만들었으니까.”
정령들도 데려와 연구를 거들게 시켰다. 다른 아이들은 시킨 대로 하는데 부르스타는 꼭 한마디씩 툴툴거렸다.
“주인님 도우라고 날 만들었지, 엘드르님 도우라고 만든 건 아닌데요?”
“하라면 해.”
“그러면 먹을 거 주세요. 주인님이 열정페이는 나쁜 거니까 꼭 최저시급을 주장하라고 했는데요.”
“…….”
정말 에린에게 많이 배운 모양이다.
나는 에린이 만들었던 빵을 기억하고 그대로 복제해서 나눠줬다. 이 애만 줄 순 없어서 다른 애들에게도 주니 다들 열심히 연구를 도왔다. 단순한 아이들이다.
어느덧 눈이 녹고 숲이 초록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를 여는 방법을 찾아냈다.
통로를 여는데는 많은 힘이 필요했다. 아무리 나라도 한번 열면 한동안 힘을 회복해야 할 정도였다. 어차피 에린만 돌려보낸다면 다시 열 필요가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다.
성공이 기쁘긴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기뻐하지는 못했다. 해냈다며 손을 맞잡고 둥가둥가하는 정령들 속에서 나는 쓰게 웃었다. 죽음을 설명하던 에린의 미소가 이해됐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부르스타가 에린에게 물었다.
“주인님, 주인님. 전에 주인님이 원래 살던 곳에는 생일이란 게 있다고 말했잖아요? 자기가 태어난 날이 생일이라고요.”
“와, 맞아. 잘 기억하고 있네? 우리 부르스타, 똑똑케!”
“엣헴. 제가 주인님 닮아서 똑똑하긴 한데요. 그 생일이라는 날에 다른 사람들이 축하한다고 선물 준다고 했죠?”
“응. 그러고 보니 곧 내 생일이네? 혹시 지난번에 내가 말했었어?”
“주인님 생일에 누가 선물 주면 참 기쁘겠네요?”
“그렇지. 하지만 말로만 축하해줘도 기쁠 거야. 내 생일까지 신경 써주고, 우리 부르스타가 최고다!”
에린은 꺄르르 웃으며 불의 정령을 껴안고 볼을 비볐다. 불의 정령도 좋은지 나에겐 보여주지 않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돌려보내 주기로 마음먹었지만 말도 꺼내지 않고 있던 나보다 부르스타가 나았다.
에린의 생일이 되었다. 의외로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나는 에린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다. 에린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엘드르.”
에린이 팔을 들어 올리자 순간 움찔했다. 하도 맞아서 그런지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 모습에 에린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훗! 그, 그동안 내가 많이 때렸지? 미안해.”
사과하며 에린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고마워.”
그동안 에린이 나를 안을 때마다 긴장해서 굳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도 같이 에린을 마주 안았다. 에린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따뜻했다.
나를 껴안은 에린의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팔은 떨리지 않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얼굴을 파묻은 어깨가 축축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품에서 빠져나온 에린은 울면서 웃었다.
“잊지 못할 거야, 엘드르. 너와 이 숲, 그리고 모두. 영원히 잊지 않을게.”
에린은 그렇게 떠났다.
6권 종장
네가 떠난 숲은 허무했다.
여러 생명체를 새로 만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무엇으로도 너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다시 예전처럼 변했다.
너를 보내준 게 후회되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널 붙잡았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일도 질려서 이전처럼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네 말이 기억났다.
인간은 잠을 잔다. 잠을 자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회복된다. 그러니 내가 지치고 힘들 때면 잠을 자보라고 했다.
네 말을 따라서 자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언제나 옳았다.
에린.
시간이 너를 지우진 못하지만, 너와 함께했던 흔적은 지워간다. 이대로 잠들면 내 안의 너도 지워질지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글을 남겼다.
이만 자야겠다.
여기서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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