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컬 [재연재] 2장 Chapter 1. 요정의 터 (2)
출처 | https://cafe.naver.com/trickcal/16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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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2. 나무의 관찰
1. 요정의 터 (2)
여왕이라 자칭한 요정과 다른 요정들에게 내가 기념식수와 같은 존재라는 걸 이해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깨달을 때까지 무릎 꿇고 손들게 했더니 하루도 안 되어서 다들 내 이름을 외쳤다.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나무줄기를 뻗어 거꾸로 매달아주니 더욱 효과가 좋았다.
요정들은 내가 그들을 창조한 존재라는 사실을 얼마 안 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날 기념식수라고 부르는 것도 그만하게 만들었는데,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서 대신 세계수님이라고 불렀다.
그런 사소한 일이 해결되고 나서 나는 차근차근 요정이 만들고 발전시킨 문화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왕관을 쓴 여왕 요정이 내 전속 가이드가 되었다.
“제 이름은 ‘아셀린’이에요.”
“뭐라고? 이름?”
“아. 셀. 린. 이요.”
내가 반문한 걸 잘못 이해했는지 아셀린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난 이름을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이름이 있는 게 신기해서 반문했는데 말이다.
근데 이것도 놀랍네. 난 에린이 이름을 지어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는데, 얘들은 스스로 이름을 만들어 붙였어. 이런 문명까지 만들어내고.
“왜 이름을 붙일 생각을 했어?”
“이름이 없으면 서로 부르기가 애매하더라고요.”
“이름은 어떻게 붙였어? 누가 지어줘? 무슨 규칙 같은 게 있어?”
“어, 글쎄요? 전 그냥 갑자기 머릿속에 자기 이름이 떠올랐어요. 아마 다른 애들도 그럴걸요?”
“갑자기 떠오른다고?”
“네! 음, 마치 새 요정들이 나타날 때처럼요!”
깜박하고 있었는데 요정들 수가 잠든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난 요정에게 그런 능력을 부여해준 적이 없었다.
에린은 가족을 설명해주면서 인간에겐 남성과 여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나에게 인간은 오직 에린 뿐이었기에 남성에 대한 개념을 잡지 못했다. 따라서 내가 만든 생명체는 전부 에린을 본뜬 여성이었다.
“그러면 새 요정은 누가 만드는 거지? 어떻게 탄생한 거야?”
“네? 어, 그건 당연히…….”
아셀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나와 관련이 있는 건가?
“괜찮으니까 말해봐.”
“저는 기념식…… 세계수님이 만드시는 줄 알았어요.”
“뭐?”
“새로운 요정은 세계수님 주변의 꽃에서 피어나거든요. 그래서 저는 세계수님이…….”
뒷말은 생략한 채 다시 나를 보는 아셀린. 눈빛이 따갑다.
아셀린이 더 설명해주길, 내 본체 가지에 열매가 맺혔다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처음 보는 꽃이 피어나고 그 속에서 새 요정이 태어난다고 한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내가…… 잠든 사이에 만들어낸 건가?”
갑자기 잠든 사이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전부 에린이 나오는 꿈이었다. 내가 꿈에서 에린을 보는 사이에 그 영향이 밖으로 드러난 걸까? 사실이든 아니든 꽤 당황스럽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아셀린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세계수님이 저희를 만든 게 아닌 건가요? 왜 그렇게 당황하세요?”
“아, 어, 응? 그,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한다고 그랬어. 당연히 너흰 내가 만들었지! 응, 당연히!”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만들겠어? 내가 만든 건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 뿐.
아셀린은 다소 이상하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내가 확신하자 금방 넘어갔다.
나는 화제를 바꿔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아셀린은 자신이 아는 한 최선을 다해 답변해주었다.
요정은 나와 많이 닮아 있었다. 역시 나에게서 태어나 그런 걸까? 마법을 잘 다룬다는데, 마법을 가르쳐준 정령보다 훨씬 잘 다룬다고 한다. 정령이 단순히 불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면, 요정은 불을 다양한 온도와 형태로 만들어서 각종 편리한 마법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에린의 모습도 닮았다.
인간처럼 집과 옷을 필요로 했고 음식도 먹어야 했다. 음식을 안 먹는다고 죽진 않지만 배가 불러야만 마법을 쓸 수 있단다.
잠을 자는 것도 그렇고 인간처럼 에너지를 충전할 수단이 요정에게는 필요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셀린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요정들이 신기해하며 하나둘 따라붙더니 나중엔 마을 요정 전부가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요정들은 자신들이 만든 옷이나 음식 등을 자랑하듯 나에게 권했다. 아우. 아무리 나 좋다고 몰려왔다지만 좀 부담스럽다.
그때 바글바글한 요정들 사이에서 수수한 옷차림의 요정 하나가 툭 튀어나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엘드르시여! 저를 당신의 종으로 거두어주소서!”
“응? 종?”
하인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셀린은 그 요정을 보고 당황하면서 뭔가 부끄러운 눈치로 슬며시 말했다.
“저 애는 신경 쓰지 마세요. 세계수님. 전부터 좀 과하게 구는 애가 하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애는 쓸데없이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상하게 굴거든요. 매일 세계수님 근처를 배회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고…….”
아셀린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데 수수한 차림의 요정이 억울해하며 말을 끊었다.
“당연하지! 어떻게 봐도 기념식수님은 평범한 나무가 아니잖아!? 크기부터가 일반 나무가 아니라고! 기념식수님을 평범한 나무 취급하는 너희가 이상한 거야!”
또 기념식수란다. 나무줄기에 확 매달아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내가 대단하다고 외치는 아이에게 그러긴 미안해서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이 아이에게 흥미가 생겨 물어보았다.
“내가 특별한 나무라고 생각한 게 너 혼자야?”
“저, 저에게 친히 말씀을 해주시다니! 저와 뜻을 같이하는 요정들이 더 있습니다, 엘드르시여!”
“오, 그래? 그러면 너희는 내 주위를 돌면서 뭘 했어?”
“기념식수님 주변의 잡초를 뽑고 물을 주며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식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 어…… 날 찬양했다고?”
“기념식수님께서는 저희를 태어나게 해주시고, 배불리 먹을 풍족한 양식과 집을 지을 광활한 땅을 내려주시었으며, 아침에 저희를 깨우는 태양과 밤에 저희를 재우는 달을 만들어 주셨음으로 당연한 찬양을 바치었습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기분이 좋은 정도를 넘어서서 부담감이 확 밀려왔다. 인간을 만들려다가 실패해서 내버려 둔 아이가 날 이렇게 찬양하다니.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만해, 메이르. 세계수님께서 놀라셨잖아. 그리고 세계수님이 기념식수라고 부르지 말라고 한 거 잊었니?”
“시, 실례했습니다. 식, 세계수님! 당신의 미천한 종의 실수를 부디 용서해주시옵소서!”
내가 화낼 때 아셀린이 그랬던 것처럼 수수한 옷의 요정이 머리를 땅에 박을 기세로 숙였다. 그 모습에 아셀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저것 보세요, 세계수님. 확실히 좀 이상하죠?”
“응? 음, 뭐…… 일단 넌 어서 일어나. 기념식수라고 부른 거 용서할 테니까.”
내가 손짓하자 수수한 옷차림의 요정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세계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미천한 종은 엘드르님이 깨어나시길 꿈에서조차 염원했나이다! 그런데 이리 친히 강림하시어 미천한 종의 믿음을 확인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음, 그러니까? 어…… 이름이?”
“오오! 보잘 것 없는 저의 이름조차 물어보시다니! 당신을 따르는 미천한 종, 메이르이옵니다, 엘드르시여!”
“그래, 메이르. 조금 진정하고 들어봐. 나는 있지, 그냥 잠을 자다가…….”
“엘드르님께서 말씀하신다! 미천하고 아둔한 것들을 위하여 우리의 창조주이신 세계수님이 말씀하시니 모두 귀를 씻고 경청하라! 엘드르시여! 부디 부족한 종들을 위하여 깊은 말씀을 내려주시어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얘 뭐야? 진짜 좀 무서운데?
도저히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메이르는 내 말을 바라고 있으면서 자기가 할 말만 다 했다. 이런 메이르의 믿음은 솔직히 소름 끼쳤다.
어떻게 해야 이 부담스러운 아이를 넘길 수 있을까?
“아, 그래! 이렇게 하자.”
“말씀하십시오, 엘드르시여! 당신의 종복은 어제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다들 무릎을 꿇고 세계수님의 말씀을 받들어라!”
메이르가 버럭 소리치자 실제로 몇몇 요정들이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지 않더라도 주변에 모인 요정들이 모두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왜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거지? 날 떠받드는 건 좋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너희들이 굳이 내 주변을 가꿀 필요는 없다. 설령 너희가 없다 할지라도 난 언제나 이 모습 그대로일 테니.”
첫 마디에 메이르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좀 부담스럽긴 해도 나 좋다는 애가 그러니 마음이 쓰여서 말을 덧붙였다.
“물론 하고 싶다면 그걸 막을 생각도 없다. 스스로 그러길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하지만 이런 문제로 서로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을 잘 때 시끄러운 소리에 깨고 싶진 않거든.”
그러자 메이르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이 아이는 정말로 나를 믿음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모양이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드르시여! 그러하다면 당신의 미천한 종이 어떻게 당신을 모셔야 하는지 일러주시옵소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여 주신다면 이 몸이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그런 거 없는데? 방금 한 말이 원하는 거 전부인데? 또 뭘 더 말해줘야 얘가 만족할지 모르겠네.
나는 요정들이 보다 쓸모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말한 대로 나는 보살핌이 필요 없으니까. 나에게 뭘 해도 나는 문제 없……진 않네. 마법 바른 도끼는 아팠지.
“그럼 말하마. 일단 내 주변에서 도끼를 치웠으면 좋겠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리고 내 주변에 평생 머무르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너희들 자신
의 삶을 살도록 해라. 그러다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때면 언제든 내 밑동으로 와서 잠이라도 한숨 자고.”
그런대로 내 생각을 잘 표현한 거 같다. 내가 말을 마치자 주변은 조금 전보다 더 조용해졌다.
“그것이 끝이옵니까?”
“끝인데?”
그러자 메이르가 벌떡 일어나 요정들을 향해 양팔을 활짝 펼쳤다.
“들어라! 엘드르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끼를 없애라! 매사에 힘을 쏟아라! 잠으로 기도하라! 이것이 엘드르님의 전언이자, 신언이다! 모두 성심으로 이 말을 따르라!”
응?
“아, 아니, 잠깐만! 뭔가 내 말을 오해한 거 같은…….”
“시간이 없어! 내 첫 과업으로 도끼를 없애야 해!”
메이르는 신이 나서 어디론가 달려갔다.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뒤라서 그런지 금방 내 시야에서 놓쳤다. 몇몇 요정들이 메이르를 따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남겨진 요정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이해한다. 솔직히 나도 그러니까.
조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데 아셀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봐요. 제가 이상하다고 했죠?”
“응. 세 번째로 말하는 거야.”
그 세 번이 부족하지 않을 만큼 이상한 아이였다.
아셀린이 말문을 트자 다시 요정들이 나에게 선물을 들이밀었다. 금방 시끌벅적해졌고 나는 내 실수를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요정들에게 파묻혔다.
- 트릭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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