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컬 [재연재] 2장 Chapter 2. 엘리아스 숲 (4)
출처 | https://cafe.naver.com/trickcal/16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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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2. 나무의 관찰
2. 엘리아스 숲 (4)
한참을 헤맨 끝에 엘프들이 시청이라고 부르는 장소에 도착했다. 요정들과 인간이 나를 스쳐 지나갈 때 시장을 만나니 어쩌니 하는 말을 했던 걸 기억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고, 단순히 마력 중화 장치만 없애기로 했던 내 마음이 엘프 종족 전체를 이 숲에서 쫓아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진화하기 충분했다.
시청 앞에는 내가 찾는 이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이랑 만나고 싶다니까!”
“죄송하지만 시장님은 바쁘셔서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요정 여왕 에르핀과 엘프 시장 비서 아멜리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요정 사절이라고 속일 때도 다섯 번이나 퇴짜를 놓았던 그 비서다. 여왕도 저렇게 퇴짜 놓다니. 저 한결같은 모습은 존경스럽네.
그들은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애써서 참고 일기장을 찾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분명 고대 잔나무의 책이라고 했지.
여기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고대 잔나무는 내가 옛 숲을 버리고 이곳에 새로 뿌리를 내릴 때, 먼 지역도 수월하게 관리하도록 심어놓은 일종의 마력 중계소였다. 그걸 요정들이 잔나무라고 불렀다.
잔나무가 품고 있는 내 마력에 본능적으로 이끌렸던 것일까. 숲의 종족들은 잔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었다. 엘프들도 내 마력을 뽑아내기 위해서인지 잔나무 근처에 자리 잡았다.
아무튼 요정들은 잔나무마다 내 일기장을 한 권씩 묻어뒀다. 그게 무슨 신성한 책이라고…….
시장과 만나겠다고 아웅다웅하는 아이들 뒤로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내가 심어놓은 잔나무였다.
근처로 다가가서 살펴보니 수많은 전선이 잔나무에 연결되어 있었다. 역시 잔나무에서 마력을 뽑아 쓰고 있었구나. 이렇게 하나도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니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잔나무 근처를 파내자 얕게 묻어진 석함이 나왔다. 석판을 열자 내 일기장이 나왔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 기억이랑 일기장 모양이 너무 다른데? 크기는 같지만 이렇게 누르스름하지 않았고 너덜너덜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책을 펼쳐보니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어떤 부분은 책장이 서로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았다.
왜 이렇게 변한 거지?
비록 내가 쓴 내용이 부끄러워서 깨어난 다음에 일기장을 펴 본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망가지길 원한 건 아니다. 에린과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적은 책이니까.
망연자실한 내 눈에 마구 연결된 전선이 들어왔다. 설마 엘프들이 마력을 뽑아 쓰는 바람에 책이 이렇게 된 건가?
나는 일기장을 다시 석함에 넣고 닫았다. 어차피 저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면 찾아도 내용을 모를 거다.
상실감을 떨치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 도시를 나가자. 내 힘을 쓸 수 없는 도시 밖으로 나가야 뭐든 할 수 있다. 나는 복잡한 골목을 헤매며 도시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엘프들이 아무리 마력을 뽑아 썼다고 해도 책 하나 보존하지 못할 정도로 내 힘이 약해진 걸까? 만약 원흉이 엘프가 아니라고 한다면 다른 책들의 상태는 어떨까?
혼란스러운 머리처럼 길도 혼란스러웠다. 아무 의미 없이 길가에 세워진 기둥인 줄 알았던 게, 사실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야 겨우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자, 이제 어쩐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추측일 뿐이니 실제로 다른 일기장을 확인해 봐야겠지. 그럼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잔나무가…… 정령들이 사는 마을이네.
발걸음이 사라지며 내 존재는 단숨에 정령의 마을로 향했다.
엘리아스의 정령은 엄밀히 말해 2세대 정령이다. 처음 만든 정령들은 잠들어버린 옛 숲 근처를 배회하며 그 아이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이곳의 정령은 정령이라는 형태만 같을 뿐이고 옛 정령들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의 정령은 나와 에린을 돕고 보조하는 일종의 하인이었다. 반면 도와줄 대상이 없는 새 정령들은 주체적인 성격이 강했다.
정령은 자기 영역이 침범당하는 걸 싫어해 올라오기 힘든 높은 산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때때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 싶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공격하기도 했다.
특히 바람과 불의 정령은 숲의 다른 존재들에게 공격적인 태도였다.
“저 끔찍한 엘프들을 용서할 수 없다! 모조리 몰아내자!”
일기장을 찾으러 산을 오르는 중에 불의 정령들이 씩씩대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몰라도 목적은 엘프와 싸우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아마도 엘프가 잘못한 게 맞을 거다. 엘프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모든 정령이 다른 존재들에게 적대적인 건 아니었다. 온순한 성격의 땅 정령과 밝은 성격의 물 정령이 항상 싸움을 중재해왔다. 이번에도 그 아이들 스스로 사태를 잘 정리할 것이다. 별일만 없다면 말이다.
산 중턱에 외롭게 서 있는 잔나무는 찾기 쉬웠다. 요정이 제단이라 부르는 석함도 금방 찾아서 일기장을 꺼냈다. 손에 들기가 겁날 정도로 많이 훼손된 일기장을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책을 다시 석함에 넣고서 그 옆에 주저앉았다. 석양의 빨간 빛이 숲에 드리워 잔나무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놓았다.
지나간 시간처럼 아무리 내가 힘을 쓰고 노력해봐야 이미 망가진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하다면 어차피 망가질 추억을 나는 왜 남긴 걸까?
네가 퇴색되지 않고 내가 변색되지 않도록?
허무함과 공허함이 내 마음을 채웠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이참에 그냥 다 없애버려야겠어!”
내가 언제 소리 내어 말했나? 아닌데? 이거 내 목소리 아냐. 애초에 나 실체화도 안 했어.
깜짝 놀란 나는 증오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의 정령 하나가 절벽 끝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령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떤 건물에 엄청난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방금 지나간 불 정령들의 목적지가 저곳이었나 보다.
“하지만 다 없애버리는 건 좀 심하지 않아?”
“아니야! 내 생각이 맞아! 다 없애버리는 게 맞아!”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맞는 거겠지, 뭐.”
응? 저기 바람의 정령 혼자 있는 거 같은데 다른 목소리가 들리네? 뭐지? 쟤가 이중인격이거나 내가 환청이 들리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가 모습을 감추고 있나?
정신을 집중해서 바람의 정령 근처를 살펴보자 뿌연 형체가 아른거리는 게 보였다. 좀 더 집중해보니 확실한 모습이 갖춰줬는데 정령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존재였다.
하지만 정령과 미묘하게 다른 기운이네. 정령은 불이나 물 같은 물리적인 힘이 기원이지만 지금 저 녀석의 기원은 그런 게 아니야. 좀 더 추상적인…… 감정인가?
몸을 숨긴 채로 바람의 정령에게 말을 건 존재는 숨죽여 웃음을 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만 내가 잠든 사이에 만들어진 새로운 존재가 내 흥미를 자극했다.
의외로 새로운 존재의 정체는 간단하게 밝혀졌다. 정령으로 변해서 정령들에게 물어보니 ‘유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과정에서 내 정령 변신이 어색해 ‘유령은 호박밭 무덤으로!’라는 소리를 들은 건 덤이다. 정령과 유령이 사이가 안 좋은 걸 알았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자.
유령의 도시는 역시나 잔나무 주변에 있었다. 일기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유령의 도시로 향했다.
도착한 나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유령의 도시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칙칙한 분위기의 늪지대에는 지독한 안개가 깔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긴다.
데구르르르.
가만히 있는 내 눈에 호박 하나가 굴러가는 게 보였다. 바람에 날린다고 하기엔 이상한 모양새다. 나는 홀린 것처럼 호박을 따라갔다.
호박은 호박밭에서 멈췄다. 마을 입구 바로 근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요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유령 하나가 신나게 호박을 굴리며 놀고 있었다. 유령은 땅에 박아 세운 나뭇가지 위에 호박을 꽂았다.
“이제 너도 내 친구야, 헤헤헤! 얘도 내 친구고, 쟤도 내 친구야!”
에린. 문득 네가 그립구나. 흑.
유령 근처에는 비슷하게 만들어진 호박 허수아비가 수십 개는 더 있었다. 유령은 호박 허수아비에게 귀를 기울이며 깔깔 웃었다.
“응? 뭐라고? 좀 더 크게 말해줘! 하나도 안 들리잖아! 헤헤헤!”
나는 차마 더 바라보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덮었다. 하지만 열린 귀로 계속해서 혼자서 떠드는 유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혼자 떠들고 혼자 생각하면서 노는 게 애처롭지 않은가? 아무도 듣지 않는데 혼자 떠드는 일은…… 내가 숲의 아이들을 살피며 하는 짓이네. 아무도 날 볼 수 없지만 내 행동은 저렇게 보이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하는 행동은 잘못되지 않았다. 아이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려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기억한다. 나는 예전의 실수를 바로잡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
유령의 도시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나에겐 아무 문제 없었다. 엘프처럼 마력을 막은 게 아닌 이상 나의 숲은 내게 무엇도 숨기지 않았다.
늪 어딘가에서 반쯤 땅 밑으로 꺼져있는 잔나무를 발견하자 한숨이 나왔다. 잔나무는 부분 부분이 썩어가고 있었으며 책이 담긴 석함도 늪 아래로 꺼져있을 터였다.
우선 잔나무를 치료해보려고 손을 댔지만 나무에 생기가 돌수록 늪이 나무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잔나무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석함을 꺼내는 데 집중했다.
내 힘으로 늪 아래를 살펴보니 뭔가가 많이 묻혀있었다. 나에겐 별달리 힘든 일이 아니기에 하나하나 살피지 않고 한꺼번에 늪 밖으로 꺼냈다.
황금빛을 띤 동그란 무언가들이 석함과 같이 나타났다.
호박이다.
호박이 여기서 왜 나와? 허수아비 놀이하다가 질려서 여기까지 도망친 거니?
잡생각을 지워버리며 호박을 살펴보자 호박 덩굴이 잔나무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호박과 잔나무라…….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겨우 이해했다. 잔나무가 스스로 늪에 적응하도록 변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정 마을의 잔나무는 처음 심을 때보다 훨씬 커졌고 정령 마을의 잔나무도 굳건하게 변했다. 마력을 뺏긴 엘프 마을의 잔나무만 그대로였을 뿐이다. 내 마력을 받은 잔나무니 생존을 위해 변했다는 게 납득되었다.
의문이 해결되자 나는 미련 없이 석판을 열고 일기장을 꺼냈다. 늪에 묻혀있어서 기대했는데 역시나 책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잠시 책장을 넘기다가 그대로 석함에 다시 넣었다.
석함을 원래대로 파묻으려다가 멈췄다. 늪 아래에 있으면 아이들이 찾기 힘들겠지? 어차피 봐도 너무 훼손돼서 못 알아볼 거, 찾기라도 쉽게 놔두자.
나는 아까 지나쳐 온 유령이 생각났다. 힘을 사용해 석함을 들고 그 유령이 있는 호박밭으로 향했다. 호박밭 근처에 석함을 얕게 묻은 뒤에 유령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혼자 호박과 떠들고 있었다.
조금은…… 장난을 쳐 줄까? 요정과 인간이 내 일기장을 찾는데 도움도 줄 겸…….
“안-녕.”
호박이 어눌한 말투로 유령에게 인사했다.
“와! 안녕? 안녕안녕! 안-녕? 어? 으아아! 너, 너너 말 할 수 있어!?”
“안-녕.”
“바, 반가워!”
“반-가-워.”
간단한 한마디 말에 유령은 하늘이 떠나가도록 기뻐했다. 이제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 친구와 놀 수 있겠지. 그게 비록 마법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말이야.
나는 세 번째 일기장을 찾은 후로 더 이상 일기장에 연연하지 않았다. 다른 책들도 낡아서 헤져있을 게 뻔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책이 그런 상태가 되었느냐다.
엘프의 도시를 빠져나올 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엘프가 힘을 빼앗아서라고 생각하기엔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고, 내 힘이 약해졌다기엔 당장 나에게 느껴지는 게 없었다.
혹시 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게 아닐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중요한 무언가…… 응?
코코아?
세상에. 내가 코코아를 잊고 있었다니! 그 귀여운 손님을 따라서 엘프 마을까지 갔는데 어떻게 잊고 있을 수가 있지? 내가 너무 내 일에 정신이 팔렸나 봐. 아직 괜찮겠지? 설마 다치진 않았을 거야.
당황한 나는 온 정신을 집중시켜서 숲의 모든 존재들을 느꼈다. 숲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하나 감각에 걸렸다.
코코아가 갈 수 없을 하늘부터 시작해서 땅속까지 모든 존재를 살폈다. 이렇게 찾고도 없다면 엘프의 마을에 아직 있다는 뜻일 거다.
산 위에서 정령과 요정이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땅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게 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순간 관심이 생겼지만 코코아의 똘망똘망한 눈을 생각하며 집중했다.
짤막한 네 다리로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발소리.
찾았다.
장소는 지하?
아주 넓은데 거대한 동굴이거나 지하공동 같았다. 주변으로 수많은 구조물이 느껴진다. 동시에 많은 생명체도…… 도대체 저기가 어디지?
감각을 집중하다가 매우 익숙한 걸 발견했다. 아이들이 거울 보는 게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다.
그것은 내 본체의 뿌리였다.
그렇다면 저긴 마녀의 마을이겠구나.
밤에 태어나고 요정과 갈라져 땅속에서 자신들만의 종족을 이룬 마녀. 마녀들은 내 뿌리에 달달한 양분을 뿌려주며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존재였다.
가끔씩 지상의 아이들(주로 요정)을 짓궂게 골려줘서 시끄럽긴 해도 자기들만의 선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요정에게서 갈라져 나와서인지 마녀에게도 여왕이 존재했다. 마녀 여왕은 짬처리나 하는 요정 여왕과 다르게 모든 마녀를 휘어잡았다. 마녀 여왕의 한마디가 곧 마녀 전체의 법이 되었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녀 여왕이 실종된 상태다. 그런지라 마녀 마을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구심점이 없으니 서로 날뛰었고 새로 마녀 여왕을 뽑는다고 더욱 싸워댔다.
지하 공동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한 마법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코코아를 찾았다. 코코아는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책하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기……]“있었어, 코코아?”
나는 코코아 앞에 실체화하며 나타났다. 코코아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헥헥거리며 내민 혀가 두어 번 코를 핥더니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이곳은 위험하니까 나랑 같이 가자.”
끼잉-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니까 그러네.”
이 녀석이 내 말에 반응하긴 하는데 알아듣진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코코아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서 배를 깐 채 누워 있었다. 그 시선은 나를 향했다. 정확히는 내 손이다.
“뭐? 긁어달라고?”
나는 흔들리는 지하공동을 바라보다가 코코아 옆에 앉았다. 정말 무너질 거 같으면 그때 힘을 쓰면 된다. 코코아의 배를 손가락을 세워 살짝 긁어주었다. 부드러운 털 때문에 긁어주는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어디를 돌아다니다 여기까지 온 거니? 분명히 엘프 마을에서 헤어졌는데 마녀 마을이라니…….”
잠시 긁어주던 손이 멈추자 코코아가 다시 일어났다. 녀석은 뱅글뱅글 내 주위를 돌면서 뭔가 표현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게 답답했는지 코코아는 다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렇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꼬신 게 생각났다. 피식 웃으면서 뒤뚱거리는 귀여운 엉덩이를 따라 걸었다.
코코아는 어떤 마녀의 집 앞에서 멈춰 서더니 문을 앞발로 벅벅 긁어댔다. 그러자 한 마녀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아~ 바쁜데 누구야!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바쁜지 안 바쁜지 어떻게 알지 모르겠지만, 문을 연 마녀는 앞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가 고개를 내려 코코아를 발견했다.
“뭐야, 넌? 누가 보냈어? 어라? 잠깐…… 설마 너, 그 녀석이야?”
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헥헥대는 코코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작은 개…… 하얀 솜뭉치…… 맞아! 너 그 녀석이 찾아다니는…… 코코지?”
코코아는 코코라는 말에 신나게 반응했다. 나는 마녀를 향해 안아달라는 듯이 점프하면서 달려드는 코코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코코’가 ‘코코아’의 원래 이름인가? 내가 코코아라고 불렀을 때 좋아했던 이유도 소리가 비슷해서였고…… 그 인간이 찾던 것도 ‘코코’였지.
마녀는 코코를 안아주지 않고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후훗! 어쩌면 널 이용해 시간을 벌 수도 있겠네. 날 따라와, 코코.”
마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코코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음흉하게 웃는 게 수상쩍어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마녀는 코코를 자기 집 한가운데로 따라오게 하더니 잽싸게 벽 쪽으로 붙었다.
“후후훗! 이걸로 그 자식이 널 찾는데 일주일은 넘게 걸릴 거야!”
갑자기 코코가 서 있던 바닥이 갈라지며 큰 구멍이 생겼다. 코코가 허우적대며 밑으로 떨어지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반사적으로 내 힘을 썼다. 다행히 코코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마법? 설마 마법을 쓸 줄 알아? 말도 못 하는 게 어떻게? 엘프들이 분명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데려왔다고 했는데……?”
마녀는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마법이 없는 세상이란 아마도 지구를 말하는 걸 거다. 엘프까지 언급했으니 확실하다. 복잡하게 꼬인 매듭이 하나 풀어졌다.
코코아와 인간은 에린과 같은 곳에서 왔다.
마녀가 누군지도 알겠다. 항상 마녀 여왕의 옆에 붙어있던 마녀들의 2인자, 프리클이라는 이름이었다.
프리클은 유심히 공중에 떠 있는 코코를 보더니 말했다.
“잠깐. 너 혼자가 아니야? 이건 네 마력이 아닌 거 같은데?”
응?
“이 마법…… 이 원시적인 느낌…… 이 압도적인 기운은……?”
원시적……이라고?
살짝 울컥하려는 순간에 프리클이 벽면에서 떨어지며 소리쳤다.
“세계수다! 세계수야!!”
프리클은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집을 뛰쳐나갔다. 저기,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좀 충격인데…….
내가 무섭다는 건 둘째치고 날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프리클은 내 존재를 알고 있다. 엘프들뿐만 아니라 프리클마저 날 눈치챈 것이다.
난 공중에 뜬 코코를 내려놓으며 프리클의 집을 뒤졌다. 집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가 가득했는데 엘리아스 숲을 정복하기 위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코코도 나처럼 집을 뒤졌다. 그리고 구석에 쌓여 있는 통조림을 물고서 나에게 따달라는 듯이 다가왔다. 수인 마을에서 본 그 통조림이었다.
딱!
코코에게 사료 통조림을 까주면서 다른 문서도 살펴보았다. 그중에선 세계수인 나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엘프가 내 힘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준 게 바로 마녀였다.
프리클만이 아니라 마녀들은 오래전부터 나를 연구하고 있었다. 마법의 근원을 탐구하다가 나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내가 만든 아이들이 이렇게 깊이 파고들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걸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괘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대견한 쪽이었다.
그런데 이 내용대로라면 몸을 숨기고 다닌 게 아무런 소용 없는 짓이었단 의미다. 사실상 정체를 들킨 셈이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하아……. 어떻게 할까? 코코아. 아니 코코야.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응?”
손에 든 서류들을 숨긴 뒤 사료를 먹는 코코의 등을 쓰다듬었다. 코코는 사료를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서 날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보았다. 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등만 쓰다듬자 코코는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프리클의 집에서 사료 통조림 몇 개를 챙겨서 나왔다. 코코는 이미 밖으로 뛰쳐나와 걷기 시작했다.
지하공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가 방방 뛰어다니는 코코를 보고 좀 더 뒤쪽에 물러나서 앉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을 결정할 시간이었다.
- 트릭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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