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컬 [재연재] 2장 Chapter 2. 엘리아스 숲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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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2. 나무의 관찰
2. 엘리아스 숲 (5)
“그냥 잘까?”
앙!
짧은 한 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뭐 얘한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막상 대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내 존재가 잊혀질 때까지 다시 자는 건 좀 그렇지? 이미 세계수가 밝혀진 마당에 내가 잔다고 해서 아이들이 멈출 것도 아니고. 언젠가 진실에 도달할 거야.”
코코는 내 말을 듣는둥마는둥 절벽 아래의 마녀 마을을 구경했다. 펑펑 소리가 터지며 화려한 불꽃이 막 튀는 게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안에서는 마법으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모습이겠지만 멀리서 보니 장관이다.
에린이 그랬던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코코와 나는 한참 동안 마녀들의 불꽃놀이를 지켜보며 답 없는 문답을 이어갔다.
“내가 그냥 정체를 밝히는 게 옳은 일일까?”
끼잉-
코코가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배고프니 통조림을 따달라는 뜻일까?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는지. 나는 마지막 남은 사료 통조림을 까서 코코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코코는 사료를 먹지 않았다. 대신 앉아있는 내 다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그대로 배를 드러내고 벌렁 누워서 잠들었다.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나도 너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까?”
잠든 짐승에게선 평소처럼 짖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의미를 발견한 건, 원래 들었던 소리도 내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서 들었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울리며 살고 싶었다. 에린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숨기는 것 없이……라고 하기엔 내가 좀 숨긴 게 있었지. 찔리네.
아무튼 그런 관계. 날 우러러보면서 찬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못했을 땐 언제든 돌멩이를 날려서 나한테 뭐라고 해줄 수 있는 관계.
나는 친구를 원한다.
“하지만 그랬다가 예전처럼 되면…… 그러면 어쩌지?”
반드시 역사가 반복되리란 법은 없었다. 인간은 실패에서 성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다. 나는 인간인 에린의 친구고, 그런 에린에게서 배웠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든 코코를 천천히 세심하게 쓰다듬었다.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호흡에 맞춰 천천히…….
코코가 깨어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잠을 푹 잔 코코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나도 몸을 일으켰다. 마침 마녀의 마을에서 폭발음과 번쩍거리는 불빛이 잦아들었다. 분쟁이 끝난 모양이다.
이제 이곳도 나도 정리되었으니 그만 지상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코코가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저 패턴이 익숙해진다. 나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코코가 향한 곳은 마녀들의 궁전이었다. 문이 부서지고 아무도 없어서 과연 궁전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심되었지만 말이다. 코코는 궁전 안으로 뛰쳐들어가더니 가장 안쪽 복도에 굳게 잠겨있는 문까지 이르렀다.
그 앞에서 사료창고나 프리클의 집을 발견했을 때처럼 문을 벅벅 긁었다. 안에 먹을 게 있는 모양이다.
“풉! 푸후훗! 넌 참 여전하구나, 코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웃은 다음 나는 문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때 복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코코?”
내 목소리는 저렇게 얇지 않았다. 요정의 목소리처럼 경박하지 않았고 마녀처럼 의뭉스럽지도 않았다. 수인처럼 단순하지 않고 정령처럼 원초적이지 않으며 유령처럼 장난기가 감돌지도 않았다. 그저 친구에게 건네듯, 가볍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코코!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얼마나 찾았다구! 코코!!”
엘프 도시에서 마주쳤던 그 인간이었다. 인간은 코코를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껴안았다. 하지만 코코는 뭔가 답답한지 인간의 품에서 발버둥을 치며 빠져나왔다.
“왜 그래, 코코? 이제 나랑 집으로 가자! 여기 일은 다 끝났어.”
집으로 간다고? 어떻게?
놀라서 인간과 코코를 보고 있는데 다른 존재들이 뒤따라 나타났다. 요정, 수인, 엘프, 정령, 유령에 마녀들. 그리고 머리에 뿔이 달린 처음 보는 종족도 함께였다.
도대체 저 인간은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야?
내가 놀라든 말든 코코는 그저 문을 벅벅 긁어대기만 했다. 인간은 그런 코코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지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문 뒤에 먹을 게 있어? 열어줄까?”
인간이 문을 열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마녀들이 깜짝 놀라며 말렸다.
“안돼! 그 문을 열면 안 돼!”
“왜?”
“여왕님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이 방에 뭐가 있어서?”
“숲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그런 사악한 존재가 있다고 했어!”
난 그런 거 만든 적 없는데? 하긴 잠든 사이에 만들었으니까 뭘 만든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코코를 찾을 때 궁전까지 뒤져봐도 마녀 하나 말고는 별달리 느껴진 게 없었단 말이야. 도대체 뭐가 있단 거야?
“아, 무슨 헛소리야! 그냥 열어봐.”
에르핀이 말리는 마녀들을 밀쳐내며 나섰다. 요정의 여왕은 마녀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문을 마법으로 열어제꼈다.
열린 문 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보였다.
그리고 코코는 내가 보아왔던 그 여느 때처럼 용맹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앙! 앙!
“코코! 같이 가!”
인간이 코코를 따라 뒤따라가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끄르르르륵-!
들어가려던 인간이 멈칫하면서 굳었고 주변 모두가 얼어붙었다. 나도 솔직히 조금은 긴장했다.
“끄르륵…….”
길쭉한 손톱에 깡마른 손이 바닥을 긁으며 나타났다. 마녀들이 큰일 났다며 날뛰기 시작했다. 문을 연 에르핀도 겁을 먹었는지 딸꾹질을 해댔다.
으슥한 어둠을 가르며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 사라따아……. 살았어어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몇 달 동안 방에 갇혀 폐인이 된 마녀들의 여왕 벨리타였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사실 이 방은 벨리타의 비밀 간식 창고였고, 다른 마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한 거라고 한다. 코코는 나와 인간이 짐작했던 대로 먹거리가 있는 것을 찾았을 뿐이고.
나는 계속 모습을 감춘 채로 상황이 정리되는 걸 기다렸다가 인간을 따라갔다. 온갖 숲의 주민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그동안의 일을 떠들어댔다.
긴 이야기였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간은 엘프의 차원 이동 장치를 작동시켰을 때 요정의 숲에 나타났고, 같이 떨어진 코코를 찾으며 여행하는 동안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그리고 이젠 잃어버렸던 코코를 찾고 숲의 문제도 해결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요정과 마녀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인간을 돕는다고 나섰다.
그런데 정작 인간을 불러온 엘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또 숨기고 있는 걸까. 하지만 속에 생각을 감추고 있는 건 엘프만이 아니겠지.
나는 요정들처럼 인간을 도와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과 엘프처럼 막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에린 이후로 수천 년 만에 새로운 인간을 만났다. 그리고 이 숲에서 가장 귀여운 코코도 함께였다. 이 아이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겨우 절벽 위에서 정리했던 생각이 인간에 의해서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 문제와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 별개다.
나는 여러 종족과 어울리며 웃고 떠드는 인간을 보았다. 내 감정이 뚜렷해졌다. 나는 오래전부터 저 인간처럼 되고 싶었다. 내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함께하고 싶다.
결심을 했으니 이제는 용기를 낼 차례다.
앙!
“으앗! 죄송합니다! 코코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막 달라붙어요.”
인간은 코코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 나는 실체화해서 인간의 앞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내가 보이자마자 바로 코코가 날 알아보고 달려든 것이다.
“괜찮다.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녀석이니까.”
복슬복슬한 코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인간이 되물었다.
“아, 혹시 코코가 사라졌을 때 돌봐주신 분인가요?”
“약간은. 사료 통조림 따개로 잘 부려 먹더구나.”
“으아아…… 코코,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된다고 했지? 우리 코코가 많이 귀찮게 굴었죠? 죄송합니다.”
“하는 짓이 귀여워 놀아주는 게 즐거웠다. 그 문제는 괜찮으니 더 사과하지 말거라. 오히려 사과는 내가 해야겠지.”
“네?”
코코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인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에린과 서로 마주 보았을 때를 추억하며. 이번에도 그때와 같기를.
“이 세상에 코코와 널 불러온 건 나다.”
“네에? 뭐, 뭐라고요?”
“조금은 긴 이야기가 될 테니 편히 앉아라.”
나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정체까지 포함된 이야기였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은 빼놓았다. 아직은 밝히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이를테면 에린에 관한 이야기나 엘프의 차원이동장치에 대해서다. 나는 내 힘의 알 수 없는 작용으로 우연히 인간과 코코가 이 숲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정보를 뺐을 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인간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간혹 짧은 감탄사만 할 뿐 어떤 질문도 없이 이야기에 집중했다.
“당장은 널 돌려보내 줄 수 없다.”
사실이었다. 방법은 알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나는 뒤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뭔가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다.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기장 맨 마지막을 적을 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더라?
역시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 말을 생략했다. 에린을 집에 돌려보내 준 이후의 기억은 끔찍했다. 친구를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다.
진실을 모르는 인간은 내 설명을 듣더니 쉽게 납득하는 듯 보였다.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마.”
언젠가는.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인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꼬리를 늘였다. 나는 긴장해서 인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말 요정들에게 한 번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나요?”
“하……! 하하! 없지. 없었어. 뭐 지금처럼 보통 요정인 척하고는 몇 번 있었지만.”
“그럼 지금 저랑 같이 가요! 다들 한창 신나게 놀고 있을 텐데 같이 가서 놀아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 그럴까?”
인간은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비록 에린과 모습은 달랐지만 에린이 많이 겹쳐 보였다. 같은 인간이어서 그런지 자세히 보면 조금 닮기도 했고…….
“그런데, 음……. 뭐라고 부르죠? 신님? 세계수님? 아니면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요?”
“나, 나는…… 엘드르. 엘드르라고 부르면 된다. 넌?”
“저는 ○○라고 해요!”
○○. 내 숲에 찾아온 두 번째 손님.
그녀의 손에 이끌려서 나는 숲의 주민들에게 소개되었다. 나의 존재를 눈치챈 아이들도 있었고 처음 알게 된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엘프들의 시선이 조금 따갑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 않고도 이들 속에 살아갈 수 있으니까.
친구와 놀고 있을 어느 호박밭의 유령처럼.
Ch3. 버려진 땅
1. 빗줄기 (1)
비가 내렸다.
외롭게 홀로 죽어가던 땅이 있었다. 그 땅은 항상 메말라 있었으며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잔뜩 드리워 햇볕조차 목말라했다. 가뭄에 갈라져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에 비가 내렸다.
어쩌다 이렇게 비가 올 때면 땅에 잠시나마 생기가 돌았다. 마법처럼 꽃과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겨우 피어난 생명은 어떻게든 다음을 남기려 애썼다.
황무지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처럼 비가 내릴 때만 양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죽어버린 땅에서 먹을 것이라고는 비 내릴 때 맺힌 열매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서 식물은 열매를 맺었고, 살기 위해서 주민들은 열매를 수확했다.
주민들은 하나라도 더 열매를 따기 위해서 빗속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다음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르고 또 얼마나 굶을지 알 수 없었다. 주민들은 그 생김새만큼이나 아귀처럼 열매를 탐했다.
그러다 한 주민이 손을 멈췄다.
덩달아 다른 주민도 발을 멈췄다.
그렇게 점점 멈춰서는 이들이 많아지더니 결국 모두 멈춰버렸다. 비가 내리는 동안 하나라도 더 열매를 따야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꽃이 활짝 피었다. 그 꽃밭에 누군가가 잠든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황무지의 주민들은 처음 보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했다.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그들의 옛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식량을 수확할 생각도 잊은 채 누군가를 둘러싸고 지켜보았다.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을 이 죽은 땅에서 보내며 잊고 있었던 추억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 명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염되기 쉬웠다. 꽃밭에 눈물과 흐느낌이 흐드러지도록 피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잠든 누군가를 깨웠다.
“아이씨…… 머리 아파. 자는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질질 짜고 있어?”
눈을 뜬 누군가는 몸을 일으키며 짜증 난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주민들은 멀리 떨어지며 몸을 숨겼다.
“어?”
그녀는 주변을 보고 당황했는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사방에 피어난 꽃과 내리는 비, 경계하는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반겼다.
몸을 숨긴 주민 중 몇몇은 낯선 이가 자신들과 똑같은 말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주민 하나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갑자기 낯선 곳에서 눈을 떠 당황하던 기색의 이방인이 그 질문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는 넌 누구세요?”
“으, 응?”
“응은 무슨 응. 남이 누구냐고 물을 거면 자기소개부터 하라고 안 배웠어요?”
“…….”
꽤 사납고 날카로운 반응에 주민은 입을 탁 다물었다. 그 반응을 보고 이방인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일어서서 다시 한번 사방을 쭉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곳이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분명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동네는 아니고.”
그녀는 짜증을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주민들은 왠지 모를 기세에 움찔하며 몸을 더 숨겼다. 먼저 말을 걸었던 주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시선이 정확하게 그 주민에게로 향했다.
“야. 거기 너.”
“나?”
“그래요, 너요.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여긴 어디고,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도 모르는데……?”
그녀는 그걸 왜 너희가 모르냐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민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이방인이 갑자기 꽃밭에 나타난 이유를 자신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식량을 모으다가 우연히 발견했을 뿐인데.
하지만 이방인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떴는데 수상쩍은 이들이 둘러싸서 보고 있었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누가 안다는 거야? 너희가 나 납치해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 아냐?”
“우리도 몰라. 우린 그런 일 한 적 없어.”
“모르면 모르는 거지, 정색은.”
“…….”
“쯧.”
혀를 차며 이방인은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처음 눈을 떴을 땐 당황했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방금 대화를 나눈 상대나 멀리서 숨어있는 이들이 수상하긴 해도 납치한 주범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빗줄기가 점차 약해졌다. 황무지의 주민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이방인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대표로 나서서 이방인과 대화하던 주민이 소리쳤다.
“모두 정신 차려! 열매를 더 모아야 해! 비가 그치고 있어!”
그 목소리에 숨어있던 주민들이 다급하게 움직이며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소리친 주민도 가장 가까이 있는 열매를 따려고 움직였다.
갑자기 무시당하게 된 이방인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짜증으로 바뀌기 쉬웠다. 그녀는 나무 열매를 따려는 주민의 어깨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순간 주민이 둘러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며 맨 얼굴이 드러났다.
“야! 무시하지…… 꺅! 뭐, 뭐야? 너 얼굴이……?”
이방인은 깜짝 놀라서 소리친 뒤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주민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뒤틀려있었다.
한쪽 뺨이 일그러진 것처럼 쭈글쭈글했고 그쪽 입술만 유달리 길었다. 코는 한번 부러졌는지 살짝 휘었고 이마에는 이상하게 생긴 뿔이 한쪽만 돌출되어 있었다. 그나마 눈매만 정상이었다.
“보지 마!”
주민은 자신의 얼굴을 낡은 옷의 소매로 황급히 가렸다. 어떻게 보아도 얼굴을 보이기 싫어하는 태도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모두가 몸을 칭칭 감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가 이런 상태라는 뜻일까?
이방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기 추해서는 아니었다.
“미안.”
그녀는 사과하며 재빨리 주민의 후드를 다시 덮어씌워 주었다. 보이기 싫어하는 얼굴을 억지로 봤는데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내가 잘못했어.”
선선한 사과에 주민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이방인은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주민은 그녀가 다시 씌워준 후드를 푹 눌러쓰며 몸을 돌렸다. 바로 움직이지는 않고 돌아선 상태로 말했다.
“네가 고대인인지 신세계의 주민인지 모르겠지만…… 굶기 싫으면 너도 어서 열매를 모아. 곧 비가 그칠 거야.”
그 말만 남기고서 주민은 다시 열매를 따러 갔다.
남겨진 이방인은 다시 움직이는 주민들을 보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말이 호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알겠다.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저 호의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으으……. 어쩔 수 없네.”
앓는 소리를 낸 다음 그녀도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주민의 말대로 비는 금방 그쳤다.
비가 그치자 거짓말처럼 식물들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말라버린 식물은 금방 푸르른 생기를 잃고 샛노란 빛을 띠었다.
태양 빛을 가릴 정도로 하늘에 가득한 잿빛 구름은 얼핏 먹구름과 닮았지만 비를 머금지 않았다. 그저 햇빛을 가려 죽은 땅을 계속 죽일 뿐이었다.
빛과 물이 없는 땅은 금방 죽음에 잠식되었다.
“이래서 열매를 빨리 따려고 했던 거구나.”
이방인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 전 비가 내릴 때만 해도 생기 넘치던 식물들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마른 나뭇잎을 툭 건드리니 재처럼 바스러졌다. 누가 봐도 기형적인 환경이다.
비가 그치자 주민들은 딴 열매를 가지고 모였다. 낯선 이에게 정신을 빼앗겼던 탓일까. 그들이 수확한 열매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거라면 일주일 정도밖에 못 먹어.”
“원래 먹던 양에서 좀 더 줄이면 안 될까?”
“이미 한계까지 줄였는데 얼마나 더 줄이잔 얘기야?”
다음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른다. 어떻게든 그때까지 버텨보려고 하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일주일 만에 비가 다시 내린 경우는 그들의 오래된 기억에도 없었다.
절망 속에서의 토론은 대부분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말다툼이 되고 곧 싸움으로 이어진다. 그런 분위기에서 누군가 조용하게 말을 꺼냈다.
“어차피 먹을 게 없다면, 먹을 입이라도 줄이면 되지 않을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모였다.
“냠! 이거 좀 시긴 해도 생각보다 맛있네.”
이방인은 별다른 걱정 없다는 듯이 방금 따온 열매를 베어 물고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태도가 주민들을 자극했다.
저 열매 하나가 하루를 버틸 식량인데 그걸 벌써 다 먹어 치웠다.
“우리가 열매를 이것밖에 못 딴 건 저 녀석 때문이야.”
“맞아! 저 애만 없었더라도 훨씬 많이 모았을 거라고.”
서로에게 향하던 분노가 이방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이미 주민들은 이방인에게 모든 잘못을 덤터기 씌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시선에 이방인은 먹던 열매의 씨를 퉤 뱉어냈다.
“뭐래. 곤히 잠든 사람 구경한다고 정신 팔 땐 언제고 내 탓이야? 누가 구경하랬나, 참. 나한테 말 건 저 애가 그러면 몰라도 나머지는 다 멀찍이서 숨어있던 주제에.”
주민들을 신랄하게 비웃으며 이방인은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주민을 가리켰다. 처음 말을 걸어줬던 주민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 주민은 황급히 후드를 손으로 끌어내렸다. 원래도 거의 보이지 않던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면서도 그 주민은 입을 열었다.
“진정해. 저 아이 잘못이 아니라는 건 다 알잖아? 저 아이는 자기가 딴 걸 자기가 먹은 것뿐이야.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하지만 저 녀석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구경할 일은 없었어!”
주민들이 버럭 외친 소리에 이방인이 피식거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네, 네. 갑자기 잠든 채로 나타난 제 탓이고요. 잠들어서 님들 구경거리가 된 제 잘못이네요. 아이고. 제가 아주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방인이 과장된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말과 행동이 안 그래도 과열된 주민들을 자극했다.
“뭐라고! 자기는 멀쩡하다고 우릴 무시하는 거야!?”
“외모로 무시하는 건 아니고 그 안에 든 걸로 무시하는 건데, 용케 그 머리로 무시하는 건 알아차리네? 오오. 보기보다 똑똑케?”
그 모습에 주민들이 화가 나서 달려들려고 했지만 제일 먼저 말을 걸었던 주민이 막아섰다.
“제발 그만! 이렇게 우리끼리 다퉈도 식량은 늘어나지 않아! 다들 진정하고 우선 식량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긴 다음에 이야기하자.”
간곡한 말에 주민들은 행동을 멈췄다. 이방인도 혀를 내밀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주민들의 태도가 어린애들 같아서 놀려주려고 했는데, 막상 자신도 유치하게 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좀 부끄러워졌다.
나선 주민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주민들이 열매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쳇. 자기가 아직도 여왕인 줄 아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방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여왕이라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다툼을 중재했던 주민이 다가왔다.
“저 애들이 덤비면 어쩌려고 그렇게 놀린 거야?”
“별생각 없었는데? 그냥 징징대는 게 짜증 나서 덤비면 한 대 때리려고 했지. 그리고 진짜 싸운다고 해도 왠지 질 거 같지 않았거든.”
“겁이 없는 걸 보니까 정말 고대인이거나 신세계에서 온 모양이네.”
“조금 전에도 그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고대인? 신세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어? 그리고…… 아니다.”
이방인은 애초에 너희는 사람이냐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뒀다. 얼굴이 드러났을 때 부끄러워서 가리려고 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다행히 주민은 그런 기색을 전혀 못 느낀 모양이다. 오히려 후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니. 그보다 남이 누구냐고 물을 땐 자기소개부터 하라고 누가 말했지?”
“응. 내가 말했지.”
누군가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이 빤히 바라보는데도 뻔뻔하게 마주 보았다. 순순히 말해줄 의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기 싸움에서 밀린 것은 주민이었다. 다른 주민들은 물론이고 이방인 때문에 많이 지쳤다. 이런 사소한 일로 힘 빼고 싶진 않았다.
“하아……. 내 이름은 아셀린이야.”
“아셀린?”
“그래, 아셀린. 아무튼 난 내 이름 말해줬어. 이제 물어도 되지? 넌 이름이 뭐야?”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방인이 장난스럽게 대꾸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느낌에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셀린을 확 잡아당겨 품에 안으며 몸을 돌렸다.
팍!
짤막한 창이 아셀린이 서 있던 자리에 꽂혔다. 뒤이어 다른 주민들의 비명이 울렸다.
“습격이다!”
- 트릭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