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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4 01:00

트릭컬 [재연재] 3장 Chapter 3. 빗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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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naver.com/trickcal/16889
https://cafe.naver.com/trickcal/16889
https://cafe.daum.net/rollthechess/qGtL/184?svc=cafeapi
 

더_트릭컬.jpg
 

Ch3. 버려진 땅


1. 빗줄기 (2)

 

 

습격자들은 주민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사람과 닮았지만 여기저기가 비틀려서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민들보다 외향적으로 두드러지는 변화가 보였다. 팔이 이상할 정도로 비대해졌다거나 다리가 딱딱한 껍질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의 수는 주민과 비슷했는데, 창이나 칼 같은 무기로 무장했고 조잡한 갑옷 같은 것도 챙겨 입었다.

이방인 덕에 창을 피하게 된 아셀린이 말했다.

“고, 고마워.”

“별거 아냐. 그런데 저쪽 인사가 꽤 과격하네? 혹시 너희 친구야?”

“그럴 리가 없잖아.”

갑자기 나타난 습격자 때문에 주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우물쭈물했다. 도망쳐야 하는데 모아둔 식량을 놔두고 숨을 순 없었다.

습격자들은 그런 주민들 근처로 서서히 다가왔다. 주민들에게 겨눠진 창과 칼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엔 안 숨고 다 나와 있네? 빨리 오길 잘했군.”

“지난번엔 숨은 놈들 찾는다고 힘들었지. 이번엔 안 찾아도 되니까 편하겠어.”

습격자의 말에 주민들의 시선이 이방인에게 모였다. 원망의 시선이었다. 이방인만 없었어도 벌써 식량을 가지고 숨었을 텐데. 안 좋은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니 전부 이방인의 잘못 같았다.

그들의 시선에 이방인은 어이가 없어서 중지를 들어줬다. 뭐만 하면 죄다 자기 탓이다.

그러는 사이에 습격자들이 바로 근처까지 왔다. 주민들은 습격자들에게 대항할 의지가 전혀 없는지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순순히 먹을 걸 내놔.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한두 번 도적질한 게 아닌지 말하는 게 아주 익숙해 보였다. 겁먹은 주민 중에 누군가가 용기 내어 말했다.

“우, 우리가 먹을 것도 없어! 이것까지 뺏기면 우린 다 굶어야 한다고!”

“그건 너희 사정이잖아? 우리도 안 뺏으면 굶어야 해.”

이방인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황을 보면 도적과 주민의 대화인데, 수준이 유치해서 그런지 묘하게 장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안돼! 우리가 간신히 모은 건데 절대 줄 수 없어!”

“그러면 또 줄 때까지 때려야겠네. 히히! 그런데 왜 그렇게 열매가 적어? 고작 그것밖에 못 땄어? 어디다 숨겨 놓은 거지?”

“아냐! 이게 우리가 딴 전부야!”

“이상한데? 너무 적은걸. 만약 숨겨 놓고 거짓말하는 거면 진짜 아픈 꼴 봐야 할 거야.”

습격자들이 무기를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여전히 주민들은 식량을 지키듯 둘러싸고 있었지만, 점점 다가오는 칼날에 겁먹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방인은 그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자신의 머리에 뒤집어씌워지는 걸 느꼈다.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어. 넌 우리랑 생긴 게 다르니까 잘못 걸리면 위험해. 들키지 않게 꼭 가리고.”

아셀린이 자신이 쓰고 있던 후드를 이방인에게 둘러 주었다. 그렇게 보이기 싫어하던 아셀린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일그러진 얼굴에 안심시켜주려는 듯 어색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이방인은 물끄러미 그 미소와 자신에게 둘러 쓰인 후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아셀린이 주민들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그만해! 우리 식량은 하나도 못 내줘!”

“너희가 안 주면 우리가 굶어야 한다고 했잖아. 좋게 말로 할 때 내놓으라고. 안주면 이번엔 진짜로 아플 거야. 너도 나무가 되고 싶어?”

“못 준다고 했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힘으로 뺏어 갈 수밖에! 너희가 선택한 거야!”

습격자들은 창을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창에 찔릴 것처럼 가까웠다. 그런데도 아셀린은 도망치지 않고 창날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이방인은 그런 아셀린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에 머리에 쓰인 후드를 벗었다. 그리고는 아셀린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바로 앞에 나섰다.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산적……은 아니고 도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너희가 나쁜 놈인 건 알겠어.”

“나, 나서지 말라니까!”

당황한 아셀린이 소리쳤지만 이방인은 가볍게 웃었다. 여전히 습격자들에게 시선을 둔 채 그녀가 말했다.

“다른 놈들 생각하면 나서기 싫은데, 그렇다고 너를 내버려 두기엔 양심에 찔리네. 충분히 해볼 만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셀린.”

“……?”

“일단 저놈들 처리하면 되지?”

“응?”

“두들겨 패면 되지?”

“으, 응.”

“오케이.”

이방인은 씨익 웃으면서 아셀린에게 드리워진 창날을 손으로 잡았다. 놀란 습격자가 창을 빼려고 했지만 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놔!”

“싫은데?”

습격자의 요청을 거절한 이방인은 그대로 창날을 우그러트렸다.

“……?”

“뭐지? 이거 왜 부서져?”

창의 주인과 창을 우그러트린 당사자 둘 다 당황했다.

이방인은 본인의 힘이 강해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단순히 창을 붙잡아서 못 움직이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설마 창날을 찰흙처럼 뭉개버릴 줄이야.

만화주인공처럼 갑자기 힘을 각성한 건 신기했지만, 일단 상황부터 해결하고 볼 문제다.

“뭔가 이상하긴 하더라. 너희 딴에는 위협이랍시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냥 아가들이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거든. 하나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이방인은 손에 힘을 줬다. 날이 뭉개진 창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완전히 부서졌다.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힘에 습격자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방인은 창대만 남은 습격자의 창을 다시 붙잡았다.

 

콰드득!

 

“그러니까 우리 어린이. 위험한 거 놔두고 물러나세요.”

“……히끅!”

눈앞에서 창이 가루로 변하는 걸 본 습격자는 너무 놀라서 딸꾹질했다.

이방인은 피식 웃으며 망가진 창을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혼이 나간 것처럼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다른 습격자들에게 손가락을 세워 까딱거렸다.

“자, 했던 말 그대로 돌려줄게. 아프기 싫으면 항복해. 아직 이 언니가 힘 조절이 안 돼서 까딱 잘못하면 아픈 정도로는 안 끝나겠지만.”

주민을 포위하고 있던 습격자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방금 보여준 힘이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외모를 보고 평범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너, 넌 뭐냐? 설마 새로 깨어난 고대인이냐?”

“고대인이 뭔진 모르겠는데, 지금은 내 정체가 뭐냐보단 너희들 대답이 더 중요하거든? 어쩔래? 싸울 거면 시간 끌지 말고 바로 덤비고.”

“…….”

도발에도 습격자들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보여준 힘은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결국 대장 격인 습격자가 나섰다.

“하, 한 명밖에 없어! 다 같이 덤비면 이길 수 있을 거야! 겁먹지 말고 덮쳐!”

“와아아아!”

한 명이 검을 뽑고 이방인에게 달려들자 다른 습격자들도 같이 공격했다. 그들의 매서운 기세에 주민들은 무서워서 몸을 떨었다.

반면 공격을 당하는 이방인은 여유가 넘쳤다.

서너 살 먹은 아이들이 단체로 달려든다고 겁먹을 어른은 없을 거다. 지금 이방인의 심정이 딱 그랬다.

슬로우모션 정도는 아니라도 상당히 느리게 보인다. 조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속도다.

 

탁!

 

다가오는 검의 옆면을 손으로 쳐냈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속도와 힘이 엄청났다. 검을 든 습격자는 중심을 잃고 검을 놓쳤다.

이방인은 그대로 습격자의 다리를 걷어차서 넘어트렸다. 중간에 뿌직 소리가 들렸는데 부러진 건가 싶다.

“아고, 아프겠다. 미안. 힘 조절이 잘 안 되네.”

“아아악!”

비명이 조금 늦게 들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리가 부러져서 고통이 뒤늦게 밀려왔다.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땅에 쓰러졌다.

많이 아파 보였지만 이방인은 시선을 떼고 다른 습격자를 쫓았다.

찔러 온 창을 손으로 잡아챘다. 창을 잡아당겨 상대의 균형을 무너트린 후에 조금 더 약한 힘으로 발을 걷어찼다.

딸려오던 힘에 의해 붕 떠오른 습격자가 다른 습격자와 부딪혔다. 당겨진 창은 뒤로 뻗어나가 다른 습격자의 검을 쳐냈다.

 

깡!

 

창이 검과 부딪치며 둘 다 부서졌다. 검을 든 습격자는 충격에 검을 놓쳤다. 당황하기도 전에 이방인의 손이 팔을 잡아당겨서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사이, 또 다른 창이 찔러오자 발로 찍어 눌렀다. 바위에 깔린 것처럼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습격자는 창을 놓치고 당황하다가 다른 이들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짠 것처럼 습격자가 순차적으로 쓰러져갔다. 어느덧 바닥에 쓰러진 이들이 서 있는 이들보다 많아졌다.

“와…….”

지켜보던 주민 중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다른 주민들과 아셀린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들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탁탁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나둘씩 습격자가 쓰러졌다.

“오. 진짜 영화처럼 움직여지네?”

이방인이 신기하다는 듯 말하며 손을 툭툭 털었다.

격투기를 배운 건 어릴 적 태권도 도장에 다닌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워낙 신체에서 차이가 나니 어린애들처럼 데리고 놀아주는 게 가능했다.

 

덥석!

 

잠깐 멈춰서 감탄하는 사이, 갑자기 다리를 누가 붙잡았다. 쓰러진 습격자 중 하나였다.

평범한 한국의 여학생에게 쓰러진 상대방의 숨통을 끊는다거나 기절시키는 일은 무리였다. 죽이지 않을 생각으로 쓰러트리기만 했다. 덕분에 습격자들의 의식은 멀쩡했다.

“앗!?”

“지금이야! 내가 붙잡고 있는 동안 공격해!”

놀란 이방인은 자신의 발을 붙잡은 손을 밟으려다가 멈췄다. 그녀의 힘이면 손이 완전히 짓이겨질 터였다. 그녀에게 그런 각오는 없었다.

그렇게 당황한 사이 남은 습격자들이 공격했다. 창검이 바로 들이닥치자 이방인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서 막았다.

 

팅!

 

“어라?”

단단한 무기와 연약한 몸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맑고 경쾌했다.

이방인을 베고 찌르려던 창과 검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마치 터지지 않는 풍선을 때린 느낌이었다.

무기를 튕겨낸 그녀의 피부에는 자그만 생채기도 생기지 않았다.

“하나도…… 안 아파?”

무기를 튕겨낸 이방인도 놀라고 공격한 습격자들도 놀랐다. 그 상황에서 빨리 정신을 차린 쪽은 이방인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그녀에겐 잘된 일이다. 그렇다면 이용해야지.

“끝까지 해볼래?”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몰라도 최대한 위협을 해보자. 지금 상황에서 계속 싸우는 건 그녀에게도 불리하다. 협박해서 끝내는 게 가장 좋다.

이방인은 습격자가 처음에 던졌던 창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어깨 뒤로 쭉 끌어당겼다가 전력을 다해 던졌다.

 

쉐에엑!

 

순간 빛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 직후 공기를 찢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날아간 창은 습격자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쳤다.

 

콰아아앙!!!

 

그리고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습격자들을 지나쳐 날아간 창이 언덕에 꽂혔다. 그런데 푹! 하는 효과음 대신에 폭탄 터진 소리가 들렸다. 언덕에 박힌 게 아니라 언덕을 아예 부숴버렸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언덕에서 흙먼지가 커다랗게 피어올랐다.

“…….”

“…….”

습격자도 주민도 그 광경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응? 이거 왜 이래? 뭐지? 그냥 힘껏 던졌을 뿐인데? 저걸 내가 부순 거야? 진짜?”

그리고 당사자는 놀라서 자신의 손과 파괴된 언덕을 번갈아 보았다.

힘이 넘치는 느낌이 있었다지만 이건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무슨 사람이 창을 던져서 미사일처럼 폭발을 일으킨단 말인가?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게 폭발하는 창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히, 히익!”

“그래, 정직한 반응 고마워.”

이방인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만화주인공이 된 거 같았다. 날카로운 무기도 아무런 고통 없이 튕겨내고 창을 던져 언덕을 날려버렸다.

 

철그렁!

 

남아 있던 습격자들이 무기를 손에서 떨어트렸다. 이방인은 계획대로 잘 됐다고 생각하다가 이어진 행동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무릎을 구부리며 이방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습격자만 그런 게 아니다. 주민들도 습격자들처럼 이방인을 향해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너희 뭐해?”

어느새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방인의 발을 붙잡았던 습격자는 거의 바닥을 뚫을 기세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이방인이 당황하고 있는데 주민 중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구원자다! 꿈속에 나오는 구원자가 강림하셨다!”

꿈이 모두의 머리에 떠올랐다. 명확하지 않은 어떠한 기억이지만 그 존재를 바라는 감정만은 분명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그 존재를 되짚었다.

그들이 바란 이는 비와 함께 이곳에 내렸다.

“레인이시여!”

그리하여 그 이름은 레인이 되었다.

“저희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엘리아스 숲에 빛이 내린 날의 일이었다.

 

 


2. 구원자

 

이방인은 자신의 이름이 레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무지 이 황무지에 사는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결국 레인이 포기했다. 그래도 본래의 이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서 크게 거부감은 안 들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른다는 거지?”

“아닙니다! 레인님은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신 겁니다!”

“넌 저리 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빛을 반짝이는 주민을 밀어냈다. 레인은 한숨을 푹 쉬며 아셀린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레인을 챙긴 유일한 존재이자, 지금 그나마 말이 통하는 유일한 상대였다.

“예. 레인님은 저희가 꿈에서 기다린 존재지만, 어째서 이곳에 오신 건지는 몰라요.”

“너희가 말하는 꿈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내용인데?”

“그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아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얼마나 오래됐다고 기억이 잘 안 나?”

“그것도 몰라요. 예전처럼 낮과 밤이 확실해서 날을 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흘러가는 걸 느껴요. 그 시간이 백 년인지 천 년인지…… 모르겠어요.”

“백 년? 천 년?”

“네.”

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사람이 그 시간을 살 순 없었다.

“나는 음, 그러니까 나 같은 존재는 ‘인간’이라고 부르거든.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희도 인간이야?”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과거에는 저희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잊었어요. 하지만 그게 인간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으음. 어렵네. 아무튼 인간은 아니라는 거고.”

외모 때문에 섣불리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는데, 의외로 쉽게 답을 해주었다. 주민들의 외모가 특이하긴 했지만, 바탕은 분명 레인과 닮은 인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 고대인이나 신세계는 뭘 말하는 거야? 나보고 그렇게 불렀잖아.”

“전설 같은 거예요. 고대인은 오래전 잠들었다가 아직 깨지 못한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리고 신세계는…… 닿을 수 없는 먼 곳을 일러요.”

“먼 곳? 그게 어딘데?”

“……그건 조금 있다가 설명해 드릴게요. 아무튼 레인님처럼 외모가 멀쩡한 존재는 이 땅에 없으니까 그런 전설을 들먹인 거예요.”

“그런가? 음. 그런 것치고는 감정이 좀 담긴 거 같던데.”

왠지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레인이 뚱한 눈빛을 보내니 아셀린이 잠깐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저희도 예전에는…… 레인님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건 기억해요. 하지만 이 황무지가 우리를 변하게 만들었어요. 이 황무지도 원래는 푸른 나무랑 풀이 가득한 숲이었는데 말이에요.”

“비가 올 때처럼?”

“예. 비가 올 때마다 자라는 나무와 풀이 과거의 풍경을 떠올리게 해줘요.”

아셀린은 아련한 눈으로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레인도 그녀를 따라 삭막하기만 한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이 숲이었단 말이지?”

“맞아요. 그리고 우리의 숲에는 ‘숲의 신’이 있었어요.”

“신? 뭐 너희를 만들었다거나 세계를 창조하기라도 했어?”

“정확하게 아시네요?”

아셀린의 놀란 반응에 레인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정확하게 맞춰 버렸다.

“됐고. 그래서 그 신이 왜?”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신께서 사라지셨어요. 신만 아니라 숲과 저희의 마을까지, 모든 게 다 사라져버렸죠. 그리고 지금처럼 황무지로 변해버린 거예요.”

“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이나 아셀린이 낸 소리는 아니었다.

주변에는 많은 주민이 함께 있었는데, 그중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주민이 눈물을 보였다. 몇몇 주민도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꼈다.

그 뭐라고 하기 애매한 분위기에 레인은 난감해졌다. 이제 좀 이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는 참인데, 빨리 말하라고 다그칠 분위기가 아니다.

“흐앙!”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대.”

“흐아앙!”

회심의 드립은 실패했다. 애초에 산타가 없는 세상이다.

레인이 난감해하는 걸 본 아셀린이 다른 주민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는 주민을 달래며 멀리 떨어졌다.

“고마워.”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하죠. 숲의 신께서는 아마도 저희에게 벌을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벌?”

“척박한 환경에 버려 놓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깨닫길 원하셨던 걸까요? 저희가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이따금 비를 내려 겨우 제정신만 유지하도록 하면서요. 후후.”

아셀린은 웃었지만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레인은 그 메마른 웃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이 왜 그런 짓을 해?”

“잘은 모르겠어요. 너무 많은 게 기억나지 않아요. 그저 잘못을 저질렀던 게 아닐까 어렴풋이 의심만 해요.”

“뭐 누굴 죽이기라도 했니? 아니면 전쟁이라도 일으킨 거야?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

“신께 뜻이 있었겠죠. 아무튼 그렇게 오래되고 흐릿한 기억만 남은 저희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요.”

또렷한 아셀린의 눈이 레인을 향했다. 직감적으로 그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게 나구나?”

“예. 저희는 잘 때 가끔 꿈을 꿔요. 그런데 그 꿈이 모두 똑같아요.”

마치 꿈을 꾸듯이 아셀린은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외모는 징그러웠지만 그런 아셀린의 모습은 전혀 징그럽게 보이지 않았다.

“꿈에서 항상 누군가를 불러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불러오고 싶어 해요. 잠에서 깨어 서로에게 물어보면 다 같은 내용이었어요.”

아셀린의 말에 동의하는지 다른 주민들도 그녀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정확히 누굴 부르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저…… 레……인? 이라고 했던 것만 알아요. 그리고 그 감정은 정말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만 해요. 그리고 레인님께서 나타나셨죠. 저희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셀린이 다시 눈을 떴다. 계속 아셀린을 응시하던 레인과 눈이 마주쳤다. 꿈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구세주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토록 꿈에서 부르던 존재가 있는데, 내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으니까 내가 바로 그 존재다? 비약이 심한데…… 하지만 의심 가는 게 있으니 부정하긴 좀 그렇네.”

날카로운 칼날에 상처도 안 나는 몸과 언덕을 날려버릴 정도의 힘을 얻었다. 태권도장에 다닌 게 전부인 경력으로 수십 대 일의 전설을 찍었다.

이 힘을 얻었는데도 저들이 말하는 구세주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그 숲의 신이라는 새……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

“……대충은요. 가끔, 아주 가끔 저 짙은 구름이 흩어지는 날이 있어요. 그날에는 아주 먼 곳에 거대한 나무가 보여요. 아마도 숲의 신께서는 그곳에 계신 거겠죠. 바로 그곳을 저희는 신세계라고 불러요.”

“그럼 왜 안 찾아가? 뭐 너희가 찾아오면 죽이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어?”

“죽인다는 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아니에요. 저희도 처음엔 당연히 접근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조금도 가까워지질 않았어요.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나무는 계속 아주 멀리 있었어요. 계속 도전해보는 동족도 있었지만…… 결국엔 모두가 걷길 포기했죠.”

“그 말은 너희 말고도 동족이 더 있단 얘기야?”

“아주 많아요. 지금 이곳에 있는 저희는 일부에 불과해요. 저희의 동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황무지에 흩어져 있어요.”

“그렇군.”

레인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아셀린과 마주 보던 걸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원래 살던 세상에서 사진으로나 보던 가뭄에 갈라진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초록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고 삐쩍 마른 황색의 식물만 간혹 보였다.

“너희들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레인은 아셀린의 자조적인 웃음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안 든다.

“신이라는 새끼가 너희를 여기 버려두고 지 혼자 멀리 토껴서 하하호호 한다는 거지?”

“……에?”

이야기를 간단하게 축약해버린 레인이었다.

정보가 많이 누락 되어서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지금 이렇게 메마른 땅에서 주민들이 불쌍하게 사는 이유가 신에게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았다.

“그래서 구원자,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데리고 벗어나 주길 바라는 거 아냐? 아니면 저 신이라는 새끼한테 한 방 먹여주길 바란다거나?”

“…….”

과격한 표현에 아셀린은 입을 벙긋벙긋하기만 했다. 주변의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셀린은 이성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금방 정신을 다시 잡은 그녀가 조용하게 대꾸했다.

“그러길 바라는지도 모르죠. 말씀드렸던 대로 저희는 막연하게 구원자님을 바라기만 했을 뿐, 정확하게 무엇을 해주시길 바란 건 아니니까요.”

“아무런 확신 없는 꿈 같은 생각에 의지하는 거야? 하긴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이곳의 주민들은 묘하게 정신연령이 낮게 느껴졌다. 아셀린과 대화할 땐 그다지 느끼지 못했지만, 다른 주민들과 대화할 때는 유치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려서 그런 건 아닐 테다. 멍청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단지 이 희망 없는 세상에 물들어서 포기해버린 거겠지.

다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많이 살아 있어? 먹을 것도 많이 모자라고 살만한 환경도 안 되는 것 치고는, 꽤 많이 살아있는 거 같은데?”

다른 어떤 방도가 있는지 궁금해서 물은 것이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어도 어떻게 살아는 지니까요.”

“뭐? 어떻게? 굶어도 안 죽는 거야?”

“죽는다는 게 뭔가요?”

“…….”

레인은 벙 찐 얼굴이 되었다. 흔치 않게 몹시 놀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겨우 진정하고서 물었다.

“이 세계에는 그,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어?”

“저는 몰라요. 아마도 다른 아이들도 모를 거예요.”

주민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인은 인상을 팍 썼다. 그러다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이 고개를 막 좌우로 흔들었다.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였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녀는 아셀린에게 죽음이 뭔지 간단하게 설명한 뒤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그…… 조금 전처럼 싸우거나 하잖아? 그러다 심하면 크게 다칠 거고…… 살기 힘든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되지?”

“그래도 레인님이 말한 것처럼 죽진 않아요. 다만…….”

대화가 끊겼다.

뭔가 아셀린이 더 말하려고 하는 분위기여서 레인은 기다렸다. 하지만 아셀린은 입을 열지 않았고, 그 기묘한 침묵은 다른 주민에게까지 번졌다.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분위기다.

레인은 그런 답답한 분위기가 싫었지만, 저들의 슬픈 과거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침묵에 동참했다. 그녀도 속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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