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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1 01:00

트릭컬 [재연재] 3장 Chapter 3.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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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naver.com/trickcal/16922
https://cafe.naver.com/trickcal/16922
https://cafe.daum.net/rollthechess/qGtL/186?svc=cafeapi
 

더_트릭컬.jpg

Ch3. 버려진 땅


2. 구원자 (2)

“레인님.”

겨우 아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정중한 요청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몇몇 주민들이 벌떡 일어났다.

“안 돼! 그걸 보면 구원자도 우릴 버릴지 몰라!”

“분명히 우리에게 실망하고 말 거야!”

주민들의 의견에 레인은 오류를 정정해줬다.

“실망해야 할 정도로 기대하고 있지도 않은데. 먹을 거 모자란다고 다짜고짜 처리하려고 들던 양반들이 이제야 이미지 관리해 봤자지.”

“…….”

신랄한 말에 아셀린을 막으려던 주민들이 시무룩하게 입을 닫았다.

아셀린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레인에게 손짓했다. 레인은 다른 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셀린을 뒤따라갔다.

“아셀린.”

“예.”

“너만 정상인 거냐? 아니면 다른 애들이 정상인 거냐?”

“……다른 아이들이 다 저런 모습이니 지금은 제가 비정상이지 않을까요?”

“원래는 저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네. 으음. 그러면 다른 애들도 너처럼 이름이 있어?”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아요. 이곳에서 살아갈 때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네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야?”

“다들 저를 그렇게 불러줬어요. 제가 예전에는 저들에게 대표자였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여왕이라고 불렸지.”

“…….”

아셀린은 말없이 웃었다. 조금 전에도 보았던 마른 미소다. 사람 마음을 참 불편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레인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말했다.

“야. 너도 말 까.”

“예?”

“말 놓으라고. 들어보니까 아무리 못해도 나보다는 오래 산 거 같은데, 존댓말 계속 들으니까 불편해.”

“그럴 순 없어요. 구원자님께 제가 어떻게 말을 놓겠어요?”

“없긴 뭐가 없어? 그냥 놓으면 되는 거지. 구원자고 나발이고 난 하나도 안 끌리거든? 그냥 네가 날 도와주려고 했던 기억 때문에 가만히 듣고 있는 거라고.”

“……저 때문에요?”

“난 구원자 같은 용사 놀이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 없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만 찾아서 돌아가면 그만이야. 그래도 날 도와주려고 동족과 맞섰던 너를 나 몰라라 할 순 없으니까, 지금 이렇게 따라가는 거야.”

“구원자님은…… 착하시네요.”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네. 아무튼 난 친구 도와준다는 심정으로 너 따라가는 거니까, 내가 불편해하는 거 보기 싫으면 편하게 대해줘.”

“후후후. 응. 그럴게.”

아셀린은 레인을 작은 크기의 굴 입구로 데려갔다.

땅을 파서 만든 지하 동굴이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나왔다.

“우린 여기에 먹을 걸 저장해. 지하에서는 열매가 오랫동안 안 상하고 유지되거든.”

좁은 통로 옆으로 작은 공간들이 숭숭 뚫려있었고 그 안에 열매가 쌓여 있었다. 마치 음식을 저장해 놓은 개미굴을 보는 것 같았다.

“아까 열매를 빨리 옮기라고 한 곳이 여기였구나.”

“응. 일단 이 안쪽에 들어와서 입구를 지키면, 어지간해서는 안으로 쳐들어오지 못하거든. 이번엔 다행히 네가 있어서 안 뺏겼지만.”

“그렇다고 해도 열매가 별로 없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이해해. 내가 정신을 놓고 빤히 바라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긴 하니까.”

“…….”

“말을 놓으라고 했지, 눈으로 욕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뭐 그래도 아까처럼 쓴웃음 짓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낫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꽤 깊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아셀린이 어느 통로 앞에서 멈춰 섰다. 돌을 우악스럽게 깎아 만든 단단한 문 앞이었다.

“이걸 써. 네 모습을 보면 놀랄지도 몰라.”

아셀린은 자신의 후드를 건네줬다. 레인은 되묻는 대신 얌전히 후드를 둘러썼다. 아셀린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에 들어가서 큰 소리를 내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아셀린은 힘겹게 문을 열었다. 문 속은 아무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암흑 그 자체였다. 그 어둠이 익숙한지 아셀린은 능숙하게 벽에 걸려 있는 막대기를 찾아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아셀린이 든 막대기 끝에 작은 불이 일더니 횃불이 되었다.

레인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아셀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

“응. 예전만큼은 못해도 아직 이 정도는 가능해. 아니지. 겨우 이 정도만 가능해.”

“마법이라…….”

레인이 아직 놀라 있는 동안에 아셀린은 검은 방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딘가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쿵-! 쿵-!

 

그러자 듣기에도 불안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횃불 빛에 반사된 그것의 표면은 비늘이 가득했다. 개와 비슷한 길쭉한 얼굴에 기다란 목, 말과 곤충을 섞어 놓은 듯한 얇은 4개의 다리가 있었다. 걸을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이었다.

비늘 때문인지 덩치 큰 도마뱀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어딘가가 익숙했다.

레인은 그 기묘한 익숙함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마……?”

“역시 알아보는구나. 마음을 포기한 아이들이야.”

괴물이라고 불리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미약한 촛불 같은 안광을 뿜어내는 눈이, 그들이 주민과 같은 동족이라 말했다.

“포기했다고?”

“밖에서 이야기했지? 심하게 다치거나 굶거나 삶을 포기하거나…… 그러면 이렇게 돼. 아마도 네가 말한 ‘죽음’이 우리에겐 이런 의미일 거야.”

“…….”

“너무 힘들어서…… 혹은 너무 아파서…… 생각을 멈추고 희망을 버리면…… 괴물이 되거든.”

마을을 공격했던 습격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체 어딘가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거나 비늘이 돋은 모습. 그 상태가 온몸으로 퍼진다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지금 이 황무지의 모두가 점점 이렇게 되어가고 있어. 우리도 예전엔 너처럼 생겼다고 말했지? 황무지에서 포기하는 게 많아지면서 이렇게 변한 거야.”

“…….”

레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은 복잡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입을 열고 내뱉을 말이 없었다.

아셀린은 침묵하는 레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횃불에 비친 레인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보였다.

아셀린은 다가온 괴물을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어주었다.

“꼭 우리 동족만 이렇게 된 건 아냐. 이곳에 있는 아이 중에는 우리와 다른 존재도 있거든.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를 돌보고 보살펴줬던 불덩이와 물 같은 아이들이었어.”

“불, 물?”

“바람도 있고 흙도 있었지. 마법……을 아마도 그 아이들에게 배운 것 같아. 응, 맞아. 네 덕분인지 모르겠는데 기억나네. 정령이라고 불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마법을 배웠어. 그리고 우릴 보살펴줬지.”

“정령…….”

레인은 멍하니 정령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시선이 온몸에서 불을 일으키고 있는 괴물에게 향했다. 분명 신체가 변형되기만 한 괴물과 다른 느낌이 드는 괴물이었다.

“가장 먼저 변한 건 이 아이들인…… 잠깐!”

레인은 그 괴물에게 다가갔다. 아셀린이 위험하다고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레인은 멍하게 괴물에게 손을 뻗었다.

“주…… 이, 인…… 느어, 니이…….”

괴물을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불길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냈다. 놀란 아셀린이 다가와 말했다.

“가끔 저렇게 소리를 내는 아이도 있어. 하지만 어떤 뜻이 담긴 건 아니고 습관처럼 내뱉는 것뿐이야. 예전의 자신은 모두 잃었거든.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러니까…… 위, 위험하다니까!”

아셀린이 말하는 도중에 레인은 괴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불타오르는 괴물은 근처에만 가도 몹시 뜨거웠다. 단순히 접근만 해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데, 직접 손을 대면 어떻게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화륵!

 

하지만 레인은 평온하게 불타오르는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은 불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어떻게……?”

“글쎄.”

레인은 가볍게 대꾸하고선 손을 뗐다.

“보여주고 싶은 건 이게 다야?”

“어? 으, 응.”

“그러면 나가자.”

레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셀린은 남은 괴물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급하게 레인의 뒤를 따라갔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몰라도, 레인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밖으로 나온 레인과 아셀린을 반긴 것은 불안해하는 주민들의 시선이었다. 혹시라도 정말 버려지는 건 아닐까 싶어 물어보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었다.

굴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이 아니꼬워 보였는데, 안에서 본 괴물처럼 변해간다는 사실을 아니 마냥 그렇게만 보이지도 않았다.

“뭘 봐? 눈깔아. 할 말 있으면 하든가.”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이 든 것도 아니지만.

레인의 위협에 주민들은 스르르 멀어졌다. 레인은 주민들을 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셀린, 너도 고생 많았겠구나.”

“응…….”

저런 걸로 고생을 인정받아봐야 하나도 안 기쁘다.

그런데 주민들이 물러가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포박된 습격자들이었다. 습격자들은 굴 근처에서 무릎을 꿇은 채 레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흰 뭐야?”

“구원자님. 저희를 살려주세요!”

“공격할 땐 언제고 잡히니까 살려달래? 어차피 여긴 죽지도 않는 세계라면서? 남들 괴롭힌 만큼 고생하는 게 어때?”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저희는 어떻게 해도 좋아요. 하지만 저희 마을만은 살려주세요!”

“마을?”

습격자들은 그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마을에 늙고 병든 노모와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들이 남아 있다는, 흔해 빠진 도적들의 레퍼토리였다.

물론 이 세계는 여성밖에 없으니 그런 가족관계는 아니고, 그저 같은 마을의 주민들이 굶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가 왜?”

“구, 구원자님이시잖요?”

“구원자면 다 도와줘야 해? 나한테 창 던지고 칼로 찔렀는데? 내가 구원자 아니면 어쩔 뻔했어? 그냥 맞아서 팔다리 잘렸겠지. 괴물이 됐을지도 모르고. 근데 도와달라고? 당신의 양심, 어딘가 떨어트리지 않았나요?”

“그, 그건…… 정말 저희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을 주민 모두가 굶고 말아요!”

잡힌 습격자들은 엉엉 울면서 빌었다. 레인은 계속 빈정대는 태도를 유지했지만, 습격자들도 지치지 않고 매달렸다. 그 끈질김에 질린 레인은 아셀린을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레인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해.”

“내 마음은 내 마음이고. 네 생각이 뭐냐고.”

“……지금의 나라면 무시할 거야. 하지만 내가 너라면 도와줄 거 같아.”

“좋은 대답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내 눈으로 너희 마을을 확인해봐야겠어. 도와줄지 말지는 그다음에 결정할게.”

“구원자님!!”

레인의 말에 습격자들은 격하게 감동했다. 도와준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 반응이 민망해서 레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레인이 다른 마을로 간다는 말에 주민들이 불안해했다. 하지만 직접 나서서 말을 거는 주민은 없었다. 그들은 레인에게 말을 거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아셀린에게 말하니, 아셀린도 같이 간다면서 안심시켜줬다.

레인은 아셀린과 습격자 중 대장 격인 자를 데리고 떠났다. 습격자가 마을로 안내했는데, 지금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습격자를 묶은 줄을 손에 쥔 채 걸어가며, 레인은 아셀린과 대화를 나눴다.

“아까 네가 나라면 도와주겠다고 한 말은, 내가 가진 힘 때문에 한 말이지?”

“지금의 난 도와줄 힘이 없지만, 너한테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막상 난 귀찮은데 말이지. 난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만 찾으면 그만이야. 네가 그 말 안 했으면, 혼자서 저 쓸데없이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을걸?”

“네가 구원자라서 다행이야.”

“다행은 무슨. 진짜 구원자라면 힘든 사람 보고 지나치지 않고 자기가 바로 나서서 해결하려고 했겠지. 너희들이나 저놈들 사정 듣고 안쓰러워서 막 발 벗고 도와주려고 하고. 난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

“그래. 후후후.”

아셀린은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왜 웃는지 모르겠다. 빤히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레인은 시선을 돌렸다.

길에는 말라비틀어진 초목의 흔적만 보였다. 그러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사람의 몸통만 한 크기였는데 마치 괴물이 되다 만 것처럼 생겨서 삐쩍 말라 있었다.

“저건 뭐야?”

“…….”

아셀린은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습격자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생겼네. 흠…….”

의아하게 바라본 레인이었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것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자세히 살펴보기엔 너무 기괴하게 생겨서 기분 나빴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마을에 도착했다.

“…….”

이 마을에는 아셀린의 마을보다 조금 적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 같이 다리가 없다.

그리고 삐쩍 마른 얼굴과 팔에 비해서 비정상적으로 배가 부풀었다.

 

아그작. 아그작.

 

돌을 씹어 먹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다리가 없는 주민들은 마른 흙을 씹어먹고 있었다.

“저희…… 마을이에요.”

습격자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레인은 뭔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설명해봐.”

“저희도 처음부터 음식을 훔치지 않았어요……. 다른 애들처럼 열매를 따며 살았어요. 그런데 항상 음식은 모자랐죠. 그래서 다툼이 일어났어요. 가끔, 아주 심하게 다툰 날에는 누군가 다쳤어요. 그리고 정말 운이 나쁘면…….”

뒷말은 삼켰지만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다.

“그래서 다른 마을의 식량을 훔친 거야?”

의외로 습격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지 않았어요. 원래는 이 마을이 없었거든요. 다 다른 마을 출신이에요. 그 마을에서 다치면 열매를 모으기 힘들어지고, 그만큼 짐이 되어 버려요. 아예 괴물로 변하면 모르지만요. 그러니까 다치면 쫓아냈어요.”

“…….”

“쫓아낸 이들도 있었지만 불쌍하게 여긴 이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다친 아이와 멀쩡한 아이가 마을을 떠났죠. 그러다 비슷한 처지를 만나고 만나서…… 이 마을이 만들어졌어요. 그러다…….”

“그만. 더 말 안 해도 돼.”

레인은 손을 들어 습격자의 말을 막았다. 더 듣지 않아도 어떤 과정으로 저들이 도적이 됐는지 알겠다.

레인은 천천히 마을로 걸어갔다.

인기척에 마을 주민들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습격자를 보더니 지친 얼굴에 잠시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습격자와 묶은 줄을 든 레인을 보고서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레인은 그들이 먹던 흙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진흙같이 고운 흙을 개어서 말린 것이다. 어릴 적에 모래사장에서 비 온 뒤에 만들던 진흙 공이 생각났다. 이걸로 소꿉놀이를 하며 먹는 시늉을 하다가 진짜 살짝 먹어본 적이 있었다. 흙의 텁텁한 맛에 바로 뱉어내고 울었다.

이런 걸 살기 위해서 먹는다. 그저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 그렇게 속에 들어간 흙은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배에 남았다. 비정상적으로 부푼 배의 원인이다.

나무껍질도 보였다.

비가 왔을 때 긁어낸 것일까. 다리가 없어 손으로 나무까지 기었을 것이다. 나무에 열린 열매를 따려고 해도 딸 수 없으니 뭐라도 먹을 걸 챙겨야 했다.

거친 겉껍질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속껍질을 벗겨냈다. 빗물이 스며든 나무껍질을 아주 오랫동안 입에 넣으면 어떻게든 먹을 수 있게 된다.

레인은 그 과정을 모른다. 그녀에게 있어 나무껍질을 먹는 건 역사 시간에나 얼핏 들었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래도 굶을 때 뭐라도 먹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들린 나무껍질에서 물이 스며 나왔다.

입에 대어 보았다. 도저히 먹기 힘들 정도로 쓴맛이 난다.

“아셀린.”

“응.”

“이걸 보여주고 싶었어?”

“…….”

신체가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은 주민들. 괴물이 되기 싫어서 억지로 삶을 부여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눈물이 새어 나왔다.

레인은 본인이 먹으려고 들고 왔던 열매를 꺼냈다. 여기에 입이 수십 개인데 고작 열매 하나로는 부족하겠지만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습격자를 풀어주고 열매를 건네줬다.

“알아서 나눠줘.”

“구원자님…….”

습격자가 어떤 표정으로 열매를 받아드는지 보지 않았다.

죽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 조금은 알겠다. 다가온 아셀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죽음’이 뭔지 말해줬을 때, 참 부럽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으니까. 그냥 끝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도 있겠네. 충분히.”

“이제 왜 우리가 그토록 구원자에 매달리는지 알겠어?”

“약간…… 아주 약간은 알겠다.”

아셀린은 레인의 어깨를 살짝 토닥거려주었다.

레인은 열매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수십 조각으로 나누는 습격자를 지켜보았다. 하나하나 정성 들여 자른 자그마한 조각을 주민의 입에 나눠주었다.

맛이나 보려고 한 번에 다 먹어 치운 그 열매였다.

“아씨! 한국에 있을 땐 후원 같은 거 하나도 안 했었는데……. 아아아! 짜증 나!!”

평범한 여학생에게는 지나친 짐이었다. 레인은 있는 대로 짜증을 냈지만,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울다가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 황무지에 너희 동족이 많다고 했지?”

“아마 네가 본 것보다 백배는 많이 있을 거야.”

“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

“나도 몰라. 흩어진 지 오래되었고, 저마다 사정이 다르니까. 우리보다 훨씬 형편이 좋은 애들도 있을 테고, 여기서 네가 본 것보다 더 끔찍한 애들도 있을 거야.”

“여기보다 더 끔찍하다고……?”

“이 마을에 오면서 네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했던 물체 기억나?”

바위도 아닌 것이 꼭 되다 만 괴물처럼 생겼던 게 떠올랐다. 순간 레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셀린은 쓰디쓴 미소를 다시 지었다.

“팔다리가 잘려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움직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지만 괴물이 되기는 싫은, 그렇게 살아만 있는 동족이 바로 그런 모습이야.”

“읍! 우윽! 우웨웩!”

레인은 참지 못하고 토했다. 열매밖에 먹은 게 없으니 반쯤 소화된 열매가 그대로 토해졌다. 입이 썼다. 역류한 위액이 너무 썼다.

하지만 아셀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죽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더 끔찍한 짓도 할 수 있어. 차마 말로 하기 역겨운…… 그런 짓도 벌어져. 먹을 걸로 동족을 사고파는 일도 있으니까. 너는 그런 세상의 구원자가 된 거야.”

“학! 하악! 하아하아…….”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레인은 입에 남은 것들을 뱉어내며 숨을 골랐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샘솟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입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아직도 떨림이 남았지만 억지로 진정시켰다.

아셀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원자는 대단하구나. 나라면 도망쳤을 거야.”

“솔직히 지금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 역시 넌 착한 거 같아.”

“……이런 상황에서도 참 오그라드는 말을 하네.”

레인은 어깨를 다독이는 아셀린의 손을 붙잡았다. 형태가 일그러진 손이었지만 따뜻한 온기는 남아 있었다.

“미안해, 아셀린.”

“왜?”

“난 이곳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흐느끼진 않았지만 떨림이 남은 목소리였다. 아직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억누르며 진득한 감정을 내뱉었다.

“새로운 세상에 오고, 큰 힘이 생기고, 원주민은 유치하고…… 우습게 봤어. 그래서 미안해.”

“괜찮아. 돌아갈까?”

“그래.”

마을에서 옮긴 발걸음은 지하 동굴에서 나올 때보다 조금 더 무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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