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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컬 [재연재] 4장 Chapter 4. 방주 (1)

by lbygxk posted Aug 2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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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cafe.naver.com/trickcal/16999
https://cafe.naver.com/trickcal/16999
https://cafe.daum.net/rollthechess/qGtL/190?svc=cafeapi
 

더_트릭컬.jpg


Ch4. 황무지의 왕


1. 방주 (1)

 

메이르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아셀린과 달리 기억의 공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옛 요정의 탄생과 엘드르가 잠에서 깨어난 일, 그리고 도끼 사건까지 정말 많은 걸 들었다.

“잠들었다가 처음 황무지에서 눈을 떴을 때는 시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그 벌을 받는 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그 시련이 너무 길더군요.”

메이르의 말은 차분했다. 은근히 격조가 있는 어투를 사용하는 게 지구에서 보던 신앙인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정중하게 한다고 해도 그 안에 서린 증오는 가려지지 않았다.

“시련을 헤쳐나갈 아무런 계시도 없었습니다. 그저 죽은 땅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죠. 다가가려고 해도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엘드르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저의 죗값이 얼마나 치러졌는지, 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엘드르를 믿지 않아?”

“제 외모를 보시지요. 저는 하나도 저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투에서 상처를 입은 적이 없으니 가능하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대로입니다.”

“그럼 믿는다는 이야기지?”

“믿음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엔 적절하지 않군요. 그분은 저의 모든 것이니까요. 저의 믿음은 물론이고 의심이나 분노, 사랑, 증오, 그 모든 것을 그분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거 좀 무서운데.”

광신도가 대체로 저런 유형이지 않았나? 레인은 살짝 메이르와 거리를 띄웠다.

메이르는 그걸 눈치챘지만 내색하지 않고 편안한 얼굴로 긴 복도를 계속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아셀린의 동굴에서 보았던 문과 비슷한 석문이 있었다. 메이르가 살짝 손을 대자 가볍게 문이 열렸다.

문밖으로 어두운 황무지의 풍경이 펼쳐졌다. 레인에게는 그 광경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한 발짝 내딛자 어색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높은 요새의 난간이었다.

“그리하여 저는 신께 다가갈 방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방주입니다.”

“방주? 그러고 보니 아까 방에서 여기가 방주라고 했지. 그런데 아무리 봐도 요새나 성 같은데?”

“엘드르께서는 생명의 접근을 허용치 아니하셨습니다. 생명을 지닌 자는 자신의 발로 엘드르께 다가갈 수 없지요. 하지만 이 방주는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생명이라 할지라도 이 돌 안에 있으면 그분이 계신 숲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요.”

“진짜로?”

“긴 세월이었습니다. 실험하기엔 충분히 길었지요.”
 

더트릭컬04챕01.png
 

레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난간에 기대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약간 배처럼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앞이 배의 선두처럼 뾰족하고 갑판도 제대로 있었다.

“일단 배라고 치자. 이걸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저희에게 남아 있는 마법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어…… 너희는 마법을 겨우 쓸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이렇게 큰 걸 움직일 수 있다고?”

“작더라도 많은 힘이 모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대충 알겠네. 어째서 너희가 괴물이 된 주민을 모았는지.”

“괴물이 되었다고 해도 그 마법의 힘은 사라지는 게 아니더군요. 그리고 저희를 제외한 다른 주민들은 모르지만, 괴물은 의외로 많은 걸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셀린이 데리고 있는 태초의 정령들은 엄청난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지요.”

“태초의 정령?”

“이곳이 숲이던 시절, 서쪽 산에 살며 저희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존재입니다. 그분께서 가장 먼저 창조하신 생명이고, 이곳에서 가장 먼저 타락해버린 괴물이지요.”

“괴물이라……. 네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누가 더 괴물인지 난 헷갈리는데?”

레인은 공격적으로 말했고 메이르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레인님께서 저를 보는 시선이 대부분의 주민과 비슷하겠지요.”

“…….”

“이미 각오했습니다. 모두를 말로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강경한 방법을 써야 했지요. 그렇게라도 저의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도끼 불태운 게 얼마나 큰 죄라고…….”

“신의 말을 곡해하고 그릇된 행동을 했으니 커다란 죄이지요.”

메이르는 말을 마치고서 레인처럼 난간에 기대었다. 다시 투구를 쓴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눈에 신경을 집중해서 본 뒤에야 멀리 큰 나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주 부는 황무지의 바람을 느끼며 메이르는 침묵했다.

레인은 조금 전에 도발한 걸 사과할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곰곰이 생각하니 납치당한 입장인데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요.”

생각이 정리되어서일까. 메이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레인인 이유를 아십니까?”

“너희의 꿈에 나온 구원자니까?”

“아니라는 걸 아시면서도 그렇게 답하시는군요. 저희는 꿈에 나온 구원자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레인이라는 이름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라는 감정만 있지요.”

“하아. 또 뭘 말하려고?”

“사실 우리가 꾸는 꿈은 신의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분의 자식이기에 그분의 바람을 우리가 꿈으로서 보는 것에 불과하지요. 왜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구원자의 꿈을 꾸겠습니까? 당신을 기다리는 건 우리가 아닙니다. 신입니다.”

“……개 같네. ■■.”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무섭게 들리는군요.”

레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욕지거리를 내뱉을 정도로 그녀의 머리는 복잡했다. 메이르의 말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 것 같으면서도 또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 차분한 말속에 스며있는 증오가 무엇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겠다.

“이제 저의 목적을 아시겠습니까? 제가 어째서 당신이 협력하리라고 믿는지 아시겠지요?”

“그래. 너무 확실하게 알아서 머리가 빠개질 정도다.”

“아하하! 저 나무는 당신을 이곳에 떨어트린 원흉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이곳에 가둔 원흉이지요. 당신은 황무지를 구원하고 싶고, 저는 동족에게 속죄하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협력에 이보다 명확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방법의 차이는 있겠지.”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씀 마십시오. 힘으로 황무지를 통일하려 하시지 않았습니까? 분명한 목적 아래 힘의 강압은 필요악입니다.”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랑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 다르거든? 은근슬쩍 같은 선상에 놓으려고 하네?”

레인은 손을 확 뻗어서 메이르의 갑옷 가슴께를 붙잡았다. 단단한 철갑옷에 우스울 정도로 손가락이 가볍게 파고들었다.

“야. 내가 널 도와주길 원한다면 너도 날 도와.”

“제가 없으면 그분께 가지 못할 텐데요?”

“내가 없어도 넌 갈 수 없어.”

“그렇지요.”

“난 이 황무지의 주민 모두를 구할 거야. 이 방주라면 황무지의 주민 모두를 태울 수 있겠지?”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 만들었으니까요.”

“하나도 남김없이, 괴물이 되었건 바닥에 버려져 있건, 모두를 태워.”

“그러겠습니다.”

“몸이 아프든 괴물이 되어가든 차별 없이 식량을 나눠줘. 살아 있으면 적어도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게끔 해줘.”

“그것도 따르겠습니다.”

레인은 메이르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메이르는 앞섬을 바로 하려다가 입고 있는 게 갑옷이라는 걸 떠올리고 무안해진 손을 내렸다.

그렇게 내려진 손을 레인이 붙잡았다.

“약속. 원래 새끼손가락 걸어야 하는데 그 장갑? 건틀릿이라고 했나? 아무튼 그거 두꺼워 보이니까 그냥 악수로 약속하자.”

“아하하. 좋습니다. 약속하지요.”

레인은 메이르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엘드르를 향한 분노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분노도 메이르에게 뒤지지 않았기에.

 

방주는 열심히 황무지를 돌아다녔다. 레인의 요청대로 황무지의 주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방주에 태웠다.

방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스스로 찾아오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찾아내어 모두 태웠다.

방주에는 놀랄 정도로 많은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주민을 태우고 한참을 운행해도 부족하지 않을 양이었다.

그동안 레인은 메이르가 부탁한 일을 했다.

방주에는 대장간도 있었는데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다. 황무지의 지하에서 발견한 광석으로 만들었다는데, 마법을 잘 모르는 레인이 느끼기에도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메이르도 그 광석의 정체는 모른다고 했다.

아무튼 메이르는 거기에 힘을 불어넣어달라고 했다. 구원자의 힘이 세계수의 힘을 거부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레인은 그 일을 하며 자신이 가진 힘을 육체 외의 다른 방도로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가령 마법처럼 힘을 쏘아낸다거나 초자연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지만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힘은 이미 갖춰져 있고 의지를 담기만 하면 되었다. 레인은 이 상황에서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그러는 사이 방주는 마지막 주민을 태웠다. 아셀린의 마을에 마지막으로 들러서 지하 동굴의 괴물까지 전부 태웠다.

레인은 메이르와의 대화를 상기하며 괴물을 찾았다. 태초의 정령이 변한 괴물들은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그러다 아셀린이 이 방주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괴물과 함께 올라탄 마을의 주민을 붙잡고 물었다.

“아셀린 못 봤어?”

“여왕은 레인님이랑 같이 떠났잖아요?”

“마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거야?”

“떠난 이후로 본 적 없어요.”

마을 주민의 말에 레인은 초조해졌다. 왜 아셀린을 잊고 있었을까? 본인이 상인에게 쓰러진 이후에 정중하게 옮겨져서 아셀린도 그랬으리라 속단했다.

레인은 최근에 수련하던 대로 힘에 집중해보았다. 아셀린을 떠올리며 그녀의 존재를 힘으로 느껴보려고 했다. 힘을 이런 식으로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 금방 적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아셀린을 찾아냈다. 아셀린은 이미 방주에 탄 상태였다. 단지 주민들이 머무르는 상층 구역이 아니라 방주의 동력이 있는 하층 구역에서 느껴졌다.

“…….”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레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하층 구역으로 내려갔다.

레인을 막아서는 이들은 없었다. 구원자를 막는 존재가 이 방주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하층 구역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가로막혔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켜. 내가 누군지 몰라?”

“대장님께서 아무리 구원자님이라도 들여보내지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메이르가? 그러면 무조건 날 막겠다는 거네? 대화는 소용없다는 거지?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때려눕히는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

당황한 문지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구원자를 막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 거기다 구원자의 힘이 어느 정도 인지를 아니, 아무리 막아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안다.

잠시 고민하던 이들은 입구에서 비켜났다.

레인은 주저하지 않고 최하층 구역으로 들어갔다.

최하층 구역은 온통 흙더미였다. 마치 땅과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 아셀린의 기운이 느껴졌다.

레인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삽을 쓰는 것보다 훨씬 비효율적이지만, 그녀는 구원자의 힘으로 흙을 사정없이 파냈다.

“우……우으…….”

아주 희미한 신음이 방주의 굉음을 뚫고 레인의 귀에 꽂혔다.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설마 하던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땅을 파내는 손이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파 내려가던 레인의 손이 멈췄다.

누구인지 모를 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손이 마치 살아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허우적거렸다.

멈췄던 레인은 다시 땅을 팠다. 전처럼 과격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손 주변의 땅을 파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방주와 하나가 된 것처럼 묻혀있는 주민이었다.

얼굴에 작은 관이 연결된 마스크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그것을 벗겨내니 단 냄새가 가득한 즙이 흘렀다. 주민들이 식량으로 먹는 열매와 같은 냄새였다.

“아셀린이 아냐…….”

이곳에 묻힌 이는 이 주민만이 아니다.

아셀린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찾기 위해서 힘을 펼쳤다. 무수하게 많은 생명이 그녀에게 포착되었다.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메이르가 모은 수많은 동족과 괴물들. 그들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

“아.”

짧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는데 그냥 언어도 되지 않은 감정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레인은 다시 아셀린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정신없이 흙을 파냈다. 마침내 파묻혀 있던 아셀린을 꺼내었을 때, 그녀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레……인?”

“미안! 미안해, 아셀린…….”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었다. 흙내 가득한 그녀의 볼품없는 몸을 안고서 우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헤어지기 전보다 훨씬 괴물에 가까워진 몸이 느껴졌다.

그러고 있으니 등에 손길이 닿았다. 여전히 따스했다.

“무사…… 했구나. 난,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은가. 레인은 그녀를 마저 흙더미에서 파냈다. 방주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레인이 힘을 불어넣자 팍 하면서 연결부위가 떨어졌다.

아셀린을 품에 안은 채 레인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다음 목적은 명확했다.

“메이르.”

 

쾅!

메이르의 검은 갑옷이 일그러졌다. 난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갑옷에 레인의 손이 파고들었다. 레인은 메이르의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다.

“메이르!!!”

“아, 반응을 보니 이제야 아셨나 보군요. 말씀해드릴 테니 진정하십시오, 구원자시여.”

“닥쳐! 왜, 아니, 어째서! 그딴 짓을 한 거야! 도대체 왜!?”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방주를 움직이려면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아직 멀쩡한 이들은 저 숲에 가서 신세계와 싸워야 하니, 멀쩡하지 않은 이들을 동력으로 활용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이 개자식이!”

쾅!

레인은 분노에 차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메이르의 얼굴을 스쳐 지나쳤다. 그리고 메이르가 부닥쳐 있는 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수리하려면 한참 걸리겠군요.”

스쳤을 뿐인데 투구가 반으로 갈라져서 떨어졌다. 드러난 메이르의 얼굴에 당혹감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주먹에 머리가 터질 뻔 했는데도 말이다.

“마법으로 움직이는 거라며! 그래서 주민들을 열심히 설득해서 모았잖아! 굳이 그렇게 살아있는 동족을 생매장해야 했어!? 응?”

“우리가 가진 자원은 한정적입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애들을 여기로 오게 설득했는지 알아? 다 같이 살 수 있다고…… 괴물이든 괴물이 되기 직전이든…… 다 살 수 있다고…….”

“살아는 있지 않습니까? 이 방주의 동력이 되어도 죽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원래부터 자신을 잃은 자들은 상관없고, 어차피 자신을 잃을 자들인데, 무엇을 그리 화내시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렇다고 아셀린을…… 멀쩡한 아셀린까지 그 안에 집어넣은 거야?”

“여왕의 마력은 특히나 강합니다. 한때 우리를 이끌었던 자이니 가장 강한 마력을 지녔지요. 그런 자원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깨어 있을 때마다 저에게 반대하는 여왕을 활용할 길은 동력원밖에 없었습니다.”

“넌 미쳤어!”

“저 스스로는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다는 경험을 돌이켜보니,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군요. 하지만 제가 미친들 어떻습니까. 저희의 목적을 이루는데 제가 미쳤다는 사실 따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미쳤으면 더 좋지요.”

“뭐……?”

“그래야 다들 저를 미워할 테니까요.”

레인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녀의 손에 붙잡혀있던 메이르는 바닥에 떨어져서 넘어졌다.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난 메이르는 엉망이 된 의자를 털고 그 위에 앉았다.

레인은 메이르의 행동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너 혹시 마조니 뭐니 하는 변태야? 아니면 남한테 미움받는 거 즐기는 관종이야?”

“처음 듣는 말이지만 그 의미를 알 거 같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진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끄고. 어디 한 번 지껄여봐. 내가 지금 왜 네 대가리를 깨지 말아야 하는지 잘 설명해야 할 거야."

여전히 레인은 주먹을 풀지 않고 있었다. 벽을 박살 낸 바로 그 주먹이다. 메이르는 짧게 숨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지키는 숲에는 결계가 있습니다. 마법을 뚫고 다가온 생명체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건 레인님의 힘으로 뚫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계수 그 자체입니다.”

“…….”

레인은 나는 듣기만 할 테니 넌 열심히 입을 움직이라는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 메이르도 레인의 반응을 바란 게 아닌지라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가 계획대로 신세계에 도달한다고 해도 세계수의 힘을 당해낼 순 없습니다. 그분은 이 세계의 창조주시고 우리의 부모시기에 그 힘은 가늠할 길이 없지요. 그래서 이 방주를 세계수에 갖다 박을 셈입니다.”

“……?”

“정확히는 방주에 흡수된 마력으로 세계수의 생명을 끊어버린다고 해야겠군요.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는 방주와 하나가 되어 세계수를 죽여버릴 작정입니다.”

메이르의 원대한 계획에 레인은 헛숨을 들이켰다.

이 미치광이가 숨기고 있던 건 그녀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세계수를 죽인다고?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계획을 준비했을까. 하나도 변이되지 않은 메이르의 곱상한 외모가 그 세월을 증명했다.

레인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말아쥔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러면 넌 어떻게 되는데?”

“아마도 레인님이 말하는 죽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 일은 방주를 설계하고 제작한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차피 사라질 존재니 제가 모든 동족의 원망을 산 채 사라진다면, 남은 동족들이 더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되겠지요.”

메이르는 긴 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잠시 끊었다. 투구가 부서져 그대로 드러난 메이르의 얼굴에 처음 보는 피로감이 엿보였다.

“제가 도끼를 불태웠기에 모두가 버려졌습니다. 이 황무지를 만든 원흉은 저입니다. 동족 모두에게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속죄해야 합니다. 모두를 위해서.”

“…….”

“제가 사라지면 동족은 저를 원망할 겁니다. 속였으니까요. 그만큼 레인님을 따르겠지요. 그 과정에 과거의 여왕인 아셀린의 존재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의 마력도 탐났지만 사실 존재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난 그런 도움 따위 바란 적 없어.”

“네. 저의 독단입니다. 저 혼자서 죄를 짊어지려고 저지른 짓입니다. 레인 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며 악독한 제가 레인님을 속이고 우롱했습니다. 죄인은 메이르 하나입니다.”

“…….”

엘드르의 뜻을 마음대로 오해해서 동족을 힘들게 했고, 그 결과로 동족 모두가 이 버려진 땅에 유폐되었다. 메이르는 그 죄책감을 계속 안고 지냈다.

그러니 어떻게 잃을 수 있을까. 아무리 길고 긴 세월과 척박한 환경도 그녀의 마음을 꺾지 못했다.

오로지 동족에게 사죄하고 신에게 묻기 위해, 그녀는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당신은 저희의 빛입니다. 버려진 우리에게 내려진 최초이자 최후의 구원자입니다. 당신은 모두의 희망을 모으소서. 원망은 모두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아…….”

레인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격하게 끓어올랐던 감정이 진정되었다.

메이르가 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런 스토리는 레인에게 낯설지 않았으니까.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죽겠다는 클리셰는 만화나 소설의 단골 소재다.

“내가 다 부끄러워…….”

온몸에서 돋은 닭살 때문에 레인은 부르르 떨었다. 중간부터는 듣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 있지, 메이르. 내가 원래 세계에 있을 때 본 게 좀 많거든. 그런데 꼭 뭐 있어 보이려고 자기가 모든 죄를 끌어안니 어쩌니 하는 악역들이 있더라. 솔직히 있지, 음. 그게 좀 많이…… 부끄럽네.”

“……무슨 말씀을?”

메이르는 레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레인은 손을 내저으며 계속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내가, 어…… 그게, 네 각오는 알겠는데, 있지. 우습게 보는 건 아니고…… 후우! 잠시만 정리 좀 하고…….”

레인은 자기 얼굴을 손바닥으로 찰싹거리며 때렸다. 원래부터 붉었던 뺨이 좀 더 빨갛게 변했다. 겨우 부끄러움을 달래고 할 말을 생각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싫어하는 선생이 하나 있어. 한 학생이 잘못하면 그 학생만 벌주는 게 아니라 반 전체에 벌을 줬거든. 그러면 다른 학생들이 그 원흉인 학생을 탓해. 웃기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벌을 준 건 선생인데 말이야.”

“……?”

“내 말은, 그 신이라는 새끼가 선생이랑 다를 게 뭐냐는 거야. 야! 솔직히 니가 잘못했으면 너만 벌줘야지! 왜 다른 애들까지 여기 가둔 건데? 어! 그런 놈은 네가 도끼 불태우지 않았어도 뭔가 꼬투리 잡아서 벌줬을 새끼야.”

레인은 그대로 걸어가서 얼떨떨해 있는 메이르의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다른 애들이 이렇게 된 데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단 말이다. 넌 애들 도끼 뺏고 불태운 것만 미안해하면 돼! 나머지는 네 잘못이 아니라 저 빌어먹을 나무 새끼가 잘못한 거니까! 알겠냐!?”

“예, 예?”

“아이씨. 이 멍청아! 이렇게 말해도 이해 안 돼? 저 새끼 탓하라고, 저 새끼! 믿음이고 나발이고, 지가 만든 애들 나몰라라 내팽개친 새끼가 정상이냐?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애가 잘못했다고 버려? 그건 부모 자격 없는 새끼지.”

“저기, 레인님? 조금 진정하시고…….”

“부모는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버리고, 자식새끼는 다 제 탓이라고 나머지 자매들 죄를 다 자기가 떠안겠다고 지랄하는데 내가 진정하겠냐? 어?”

레인에게 붙잡힌 메이르는 박력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어쩌지도 못하고 압도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반대로 메이르의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레인이 다그쳤다.

“쓸데없이 나에게 떠넘기지 마! 쓸데없이 네가 떠안지도 말고! 와 씨! 말하다 보니까 빡치네. 내가 이딴 멍청한 놈한테 속아서 휘둘리고 있었다니.”

레인은 메이르를 머리를 가볍게 툭 치고는 부서진 의자에 가서 털썩 앉았다. 양손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며 몸을 기대어 있는 모습에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째서인지 모르게 공기가 묵직했다. 살벌한 얼굴과 흉흉한 눈빛도 있었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가 메이르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야. 넌 잘못한 게 없……진 않고 좀 잘못하긴 했어. 근데 전부 네 잘못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딴 쓸데없는 희생정신 같은 건 버려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메이르는 얼떨떨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전부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게 당연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저 레인이라는 구원자는 그게 아니라고 해줬다.

“제가…… 이 죄 많은 제가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하는 거다.”

“…….”

검은 갑옷에서 톡톡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에 맺혔다가 갑옷 위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레인은 다시 부끄러움이 되돌아왔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초롱초롱한 눈은 집어치우고 최하층에 들어가 있는 애들 다 꺼내. 괴물이 됐건 말건 일단 방주 정지시키고 죄다 꺼내라고. 그리고 꺼낸 애들 포함해서 주민들 싹 다 모아.”

“왜……요?”

“왜는 무슨 왜야? 내가 땡깡 부리면서 덤으로 이 방주 다 때려 부수는 꼴 보기 싫으면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메이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방주가 멈추어선 안 된다거나 괴물까지 모을 필요는 없다고 반대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평생 짊어진 죄책감을 때려 부순 구원자의 말이다.

그 말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따르겠는가.

“아휴~ 부끄러운 건 다 내 몫이지. 나도 참,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 뭘 할지 짐작도 못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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