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릭컬 [재연재] 4장 Chapter 4. 침공
출처 | https://cafe.naver.com/trickcal/17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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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4. 황무지의 왕
1. 방주 (2)
레인의 명령대로 메이르는 모든 주민을 모았다.
동력원이 되었던 주민 중에 아직도 이성이 있는 이들을 회복시켰고, 괴물들도 마법을 사용해서 이끌었다.
거대한 방주 앞 들판에 모든 주민이 모였다. 그들은 팔리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동족들이 나타나자 혼란스러웠다. 많은 수의 괴물을 보고 겁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모은 것은 구원자였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구원자를 기다렸다.
구원자는 방주의 난간에서 나왔다. 모두를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경치는 좋았지만 감상은 그저 그런 정도였다.
레인의 뒤를 따라서 괴물들이 나타났다. 보통의 괴물과 달리 땅과 불, 바람과 물의 기운을 품은 괴물이었다.
괴물은 레인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고, 레인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바람의 기운을 뿜는 괴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들어라.”
조용하게 읊조린 목소리임에도 이곳에 모인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로 크게 퍼졌다. 이게 바람의 힘을 이용한 마법의 일종이라는 걸 눈치챈 이는 적었다.
그저 구원자의 말이 귀에 똑똑히 들림에 감격하는 이가 많았을 뿐이다.
그렇게 이목을 모은 구원자가 말했다.
“나는 너희의 구원자가 아니다.”
혼란이 퍼졌다.
시끄러운 소란이 일대에 퍼졌으나, 레인의 목소리는 그사이를 가로지르고도 남았다.
“하물며 나는 너희의 왕도 아니다.”
메이르와 아셀린이 괴물 사이로 나타났다. 아셀린은 지친 기색이었으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레인 곁에 섰다. 메이르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반대편에 섰다.
하지만 들판의 누구도 그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관심은 오로지 레인에게만 쏠려 있었다.
“나는 그냥 너희들의 미소녀 친구 레인일 뿐이다.”
“……?”
무슨 농담인가 싶어 주민들의 고개가 갸웃했다. 구원자와 왕이 아니라는 말이 퍼트린 소란을 순식간에 가라앉힐 정도의 농담이었다.
“나에게 힘이 있기에 너희의 왕을 자칭했다. 내가 꿈에 나타났기에 너희의 구원자를 자청했다.”
들판이 조용해졌다. 뭐라고 따지고 드는 주민은 없었다.
사실 레인은 왕을 자칭한 적도 없었고 구원자를 자청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레인은 구원자였으며 새로운 왕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너희의 꿈은 나무의 바람에 불과했고 내 힘은 나무의 단편에 불과하다.”
그저 귀를 기울였다. 왕과 구원자 대신 친구라 말한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니 묻는데, 내가 구원자가 아니고 너희의 대변자가 아니라 한들, 너희가 이곳에 처한 현실이 바뀌는가? 너희가 마음에 품은 분노가 사라지는가? 너희가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이 당연해지는가?”
물었으나 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다. 귀로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버려진 이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너희가 왜 이곳에 있는가? 나무가 너희를 이곳에 가뒀기 때문이다. 너희가 어째서 버림받았는가? 나무가 너희를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버림받을 이유가 있는가? 나무가 멋대로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도 너희의 잘못은 없다. 그러하면 잘못은 어디에 있지?”
레인은 손가락을 뻗었다. 그에 맞춰 불의 괴물이 불기둥을 쏘아 보냈다. 바람이 불기둥을 휘감아 더 거세게 불기둥이 나갔다.
구름이 갈리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오랜만에 비친 햇살이 대지를 비추었다.
그리고 저 멀리 나무가 보였다.
아주 커다란 나무였다.
“자식이 잘못했다고 버리는 부모는 없다. 저 나무의 자식들아. 너희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짚어보아라. 무엇이 그토록 부모를 노엽게 했는가? 너희를 버릴 만큼의 잘못을 저질렀는가! 도끼를 훔쳤다고? 불태웠다고? 그러면 피해를 본 나머지는 왜 잠들었는가!?”
목소리가 달아올랐다. 보는 이들의 마음도 달아올랐다.
구원자가 선사한 의문이 그들의 닳아진 정신을 깨웠다.
“저 나무다! 너희의 부모가 너희의 잘못을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버린 것이다! 잘못을 타이르고 얼러서 똑바로 키워낼 자신이 없으니 모든 실수를 파묻은 것이다! 실패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외면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구름이 다시 몰려들었다. 익숙한 어둠이 들판에 도래했다. 희미하게 나타난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흐려졌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버려진 주민들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나무를 잊지 않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버려진 자식이다. 부모의 옹졸함에 외면받은 자식들이다. 우리에게는 자식으로서 주장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왜 우리를 버렸냐고 따져 물을 자격이 충분하다!”
레인은 격하게 이어진 말을 멈췄다. 말이 멈추자 그제야 주민들이 다시 레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모였다. 모두의 정신이 한 곳에 집중했다.
“이것이 우리가 모인 이유이며, 앞으로 나갈 동기다.”
어느새 너희는 우리로 바뀌어 있었다.
레인에게도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식은 아니나 마음만큼은 자식들과 비슷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황무지의 주민들은 레인에게 감화되었다.
그 타이밍에 레인은 굳이 말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다. 왕도 아니다. 나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면 바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에게 구원자와 왕을 바라지마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실컷 우리라고 이야기해놓고서 부모처럼 버리겠다고 말하니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돌아간다고 해서 너희가 버림받는 게 아니란 말이다. 단순히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내가 말했지? 난 너희의 친구일 뿐이야. 친구로서 너희의 아픔에 공감해 울었고, 친구로서 너희의 울분을 같이 풀어주려 했다고.”
잠시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그녀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목적이 있고, 너희는 너희의 목적이 있어. 내가 없다고 해서 너희의 목적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너희의 꿈은 너희의 손으로 쟁취해야 해. 너희가 이 황무지에서 쌓은 설움을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는 말이야.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가.”
멀리 나무를 가리켰던 손가락이 이제 주민을 향했다.
레인은 그들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그녀가 대신 복수해주는 걸로 만족하냐고.
“일어서. 너희의 발로 땅을 디디고 나가. 발이 없으면 손으로 끌고, 팔도 없다면 몸을 굴려서라도 기어가. 그렇게 쟁취하는 거야. 스스로가. 너희 자신이.”
화내던 주민들이 조용해졌다.
“물론 나는 친구로서 너희를 최대한 도울 거야. 앞이 아니라 곁에서. 친구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친구로서.”
레인은 계속 친구를 들먹였다.
그녀는 아셀린과 메이르를 통해 이들이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알았다. 그건 단순히 그녀가 이들을 이끌고 세계수에게 복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버려진 땅에 버려진 긴 시간 동안 마모된 그들의 마음이 다시 살아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녀가 돌아가도 이들이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도움이 필요해.”
레인은 옆으로 손을 확 뻗었다. 가느다란 메이르의 목이 힘없이 턱 붙잡혀서 딸려왔다. 목이 붙잡힌 메이르는 당황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쓰게 웃었다.
“아픕니다.”
“참아.”
짧게 불만을 일축한 레인은 메이르를 앞으로 내밀었다. 매달린 건 아니지만 거의 그렇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주민들의 시선이 메이르에게 모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이 녀석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너희의 원망을 한 몸에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 뭐 들어보니까 너희도 얘를 원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던데. 지금은 어때? 얘를 원망하는 게 아직도 당연해?”
주민들이 웅성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메이르는 원망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그런데 레인이 잘못은 나무에게 있다고 말했다. 의문이 찾아왔다. 나무에게 잘못이 있다면 메이르도 잘못이 있는 걸까?
“아니야!”
누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메이르에게 잘못이 없다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주민들은 정말 그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소리친 주민은 레인이 잠입시킨 메이르의 부하였지만 말이다.
“그래. 이 녀석의 잘못은 도끼를 훔치고 불태운 정도지, 너희를 이 땅에 가둔 건 나무의 잘못이야. 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여기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 너네들 여왕 보이지? 얘처럼 많은 애들이 메이르에게 속아서 방주를 움직이기 위한 동력원이 됐어.”
“……!”
다시 메이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 시선에 익숙한 메이르였지만, 모든 주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조금 거북했다.
꿈틀거리는 메이르의 목을 더 꽉 쥐며 레인이 말했다.
“이 녀석은 자기 나름대로 속셈이 있고, 타당한 이유도 있었어. 이 녀석이 뭐라고 했냐면…….”
레인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메이르와 나눴던 대화를 들려줬다. 그녀가 무엇을 꾸몄고 왜 그랬는지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부끄러움으로 메이르의 얼굴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빨개졌다. 레인이 잡은 목 뒤까지 새빨갛게 변한 게 보였다.
“너도 부끄러움은 느끼는구나? 신기하네.”
“말 걸지 마십시오.”
메이르의 차가운 대답에 레인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메이르를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난간을 잡고 뛰었다.
탁!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문제 없이 들판에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녀는 주민들의 시선에 손가락으로 위에 남은 메이르를 가리켰다.
“메이르를 용서하고 말고는 너희의 재량이야. 친구인 주제에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니까 스스로 판단해. 어떻든 너희 자신의 선택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를 쳤다. 잠시 메이르에게 향했던 시선이 다시 눈앞의 레인에게로 모였다. 그녀는 수많은 시선을 향해 다 받아들이듯 양팔을 펼쳤다.
“그러니까 저 자식 문제는 일단 이 정도로 접어두자고. 지금 중요한 건 방주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야.”
방주의 동력원이 다 빠진 상황이었기에 지금 방주는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커다란 바위 요새처럼 버티고 선 방주를 주민들이 올려다보았다.
“이걸 움직이려면 동력원이 필요해. 아까 말한 대로 동력원이 된다면 너희의 마력을 빼앗겨. 계속 빼앗기다 보면 점점 괴물로 변해버리고 말아. 내 힘은 맞지 않는 건지 힘을 불어넣어도 소용없더라고. 결국 너희가 움직여야 해.”
“저희더러 동력원이 되란 말씀입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맞아. 저놈은 너희의 원망을 사기 위해 독단으로 말없이 집어넣었지. 몸이 불편하면 신세계에 가서 싸울 수 없으니까 동력원으로 사용했어. 그런데 난 원망을 사고 싶은 생각이 없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려는 거야.”
“부탁이요?”
“응. 모두가 조금씩 돌아가며 마력을 불어넣든, 아니면 다른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든, 그것도 너희가 스스로 선택할 문제야. 메이르가 세계수에 방주를 처박으면 힘을 흡수해서 마력을 다시 보충할 수 있다고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아. 그러니 모든 것은 너희의 결정에 맡길게.”
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점프해서 난간으로 올라갔다. 남겨진 이들은 가까이 있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레인 본인이 생각해도 좀 치사한 방법이긴 했다. 야간자율학습이나 비슷하다. 아무리 자율이라는 말이 붙어도 상황상 강제될 수밖에 없다.
“레인님…….”
그것을 아는지 메이르가 얼빠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레인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을 뻗어 얼굴을 긁어내렸다.
“악!”
“뭘 봐?”
“제, 제게 말이라도 미리 해주셨으면…….”
“닥쳐. 너같이 못 믿을 놈한테 미리 말했다가, 또 자기혐오로 은근슬쩍 뭔 짓을 꾸밀 줄 알고?”
가볍게 입을 막은 레인은 난간 아래를 바라보았다. 서로 이야기하는 주민들의 눈은 전과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누군가는 자청해서 들어가겠다고 나섰고, 누군가는 완전히 들어가지 않더라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그 광경을 구경하며 조금 기다렸다. 이제 마무리를 지을 차례였다.
레인은 정령 원형의 네 괴물에게 손을 댔다. 괴물들은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흘러들었고 네 괴물은 마법을 토해냈다.
콰아아-!
거대한 불이 솟았다. 바람이 불을 기둥으로 만들고 습기가 그 주변을 에워쌌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은 상승기류를 만들었고 잔뜩 깔린 잿빛 구름이 짙게 변했다.
주민들은 떠들던 것을 멈추고 입을 벌린 채 구경했다.
뚝.
한 방울의 비가 떨어졌다.
한 방울이 두 방울이 되었고, 두 방울은 열 방울이 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바라고 바라던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버려진 땅에 새싹이 돋아났다.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초록으로 물들었다. 꽃이 피었고 열매가 맺혔다.
땅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지진처럼 규칙적인 진동이 아니었다. 꿀렁거리는 땅은 어디까지나 열매가 맺힌 나무에 한정되었다.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졌고, 떨어진 열매가 주민들에게로 굴러갔다.
네 괴물이 만들어낸 마법의 향연에 주민들은 경악을 넘어서 경외했다.
비가 내린다.
“구원자도 아니고 왕도 아니야.”
비가 말했다.
“그저 너희들의 친구로서 말할게.”
먼저 메이르가 무릎을 굽혔다. 이어 아셀린이 무릎을 굽혔다. 주민들을 보던 레인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는 주민들에게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니, 친구가 말한다니까. 야! 무릎 꿇지 마! 에이씨! 멋있게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망쳤잖아. 아, 아무튼!”
그녀를 향해 모든 주민이 무릎을 꿇었다. 그 위로 짜증과 당황이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를 버린 부모에게 복수하러. 우리가 잃은 과거를 보상받으러.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러.”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내렸다.
“가자, 친구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황무지에서 왕이 탄생했다.
2. 침공
방주는 미친 듯이 황무지를 질주했다.
[우오오오!!]
방주 최하층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주민이 울부짖었다. 그 울음소리에 고통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아주 무거운 바위를 들 때처럼 전력을 다한 기합이었다.
[우워어어어어!!!]
그에 맞추어 수많은 기합이 방주를 뒤흔들었다.
이제껏 마지못해 생명을 연장해왔던 주민들은, 마침내 자신의 불꽃을 태울 길을 찾고서 장렬하게 불타올랐다. 아주 오랫동안 쌓인 저수지의 둑을 허문 것처럼 그들의 정열이 모조리 토해져 나왔다.
해서 방주는 정말 미친 것처럼 황무지를 내달렸다.
거의 모든 주민이 자발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오히려 방주의 마력회로가 터지는 걸 걱정할 정도로 많은 주민이 힘을 보탰다.
그 중심에는 메이르가 있었다. 레인에게 탈탈 털리고 주민들에게 공개 수치 플레이를 당한 메이르는 미련 없이 동력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한 마음으로 방주에 힘을 불어넣었다.
메이르의 바람처럼 방주는 급속도로 엘리아스 숲과 가까워졌다.
레인은 무기와 방어구에 힘을 불어넣는 작업을 끝내고서 선두에 서 있었다. 그녀는 메이르가 입던 검은 갑옷을 입고 투구까지 쓴 상태였다. 그리고 허리에는 도끼까지 찼다.
메이르의 말 때문이었다.
“갑옷을 입으십시오.”
“싫어. 거추장스러워.”
“레인님은 마법이 발린 무기에 약합니다. 추측하건데 아마 마법에도 영향을 받을 겁니다. 제 갑옷을 입으십시오. 세계수가 아닌 이상 갑옷을 뚫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투구는 너무 갑갑해. 잘 보이지도 않고. 투구만 안 쓰면 안 돼?”
“레인님의 외모는 저희와 다릅니다. 저희를 생각하신다면 써주십시오.”
“왜? 내 모습이 너희가 옛날에 잃은 모습하고 비슷해서 그래? 내 얼굴을 보고 오히려 잃어버린 걸 상기해서 더 사기가 올라가지 않을까?”
“그렇습니다만, 그건 저희의 분노입니다. 당신이 저희의 친구로 있기를 원하신다면, 저희의 분노마저 이용하지 마십시오.”
“……미안. 내 생각이 짧았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 도끼를 사용하십시오.”
“웬 도끼야?”
“이 도끼는 유일하게 세계수에게 상처를 입힌 무기입니다. 제가 마법으로 지른 불에 녹지 않았고, 황무지로 변한 땅에서도 멀쩡했습니다. 아마도 세계수를 베며 그 힘을 흡수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무튼 이 도끼라면 세계수를 해칠 수 있을 겁니다.”
메이르의 말을 상기하며 레인은 도끼를 꺼내 들었다. 생긴 것만 봐서는 진짜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낡고 허접한 도끼였다.
“이렇게 낡은 도끼가 진짜 효과가 있을까? 위력만 있다면 쓰긴 하겠지만…… 보긴 좀 그렇네.”
검은 갑옷은 그래도 멋져 보였는데 도끼는 영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레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도끼에 그녀의 힘이 잔뜩 모여서 휘감았다.
“인사 대신이다.”
레인은 그대로 도끼를 내려찍었다.
긴 황무지의 끝을 알리는 푸르디 푸른 숲이 펼쳐졌다. 그 숲을 희끄무레한 보호막이 감싸고 있었다. 레인의 도끼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정확하게 그 보호막을 갈랐다.
차앙!
보호막은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얇은 유리가 깨지듯 산산이 조각났다. 그 틈을 방주가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했다.
“이야하-!!!”
숲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갑자기 몸에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생명이 가득한 세계수의 기운이 그들에게 스며들었다.
덩달아 방주도 폭주했다. 마력회로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질주했다. 달려 나갔다. 드디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큼 가까워진 그들의 부모를 향해. 거대한 세계수를 향해서.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메이르의 부하 중 부대장을 하던 주민이 명령했다. 방주의 주민들은 저마다 안전한 곳으로 피해서 꽉 붙잡았다.
레인은 여전히 선두에 서 있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방주에 보호막을 펼쳤다. 그녀라면 몰라도 방주가 충돌하는 충격에 다른 주민들이 무사하진 않을 테니까.
삐이이익-!
시뻘겋게 변한 마력회로가 거센 비명을 토했다. 질주하는 방주의 굉음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방주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커졌다.
그 소리가 이미 방주와 동화된, 메이르 그 자체의 환희처럼 들렸다.
“좋은데? 한 방 먹여!”
레인의 감상평을 마무리 삼아, 방주가 그대로 거대한 세계수의 몸체에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앙----!!!!!!!
※ 카페에 게재되는소설 재연재는 금주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지금까지 소설 더 트릭컬을 감상해주신 교주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리며,
트릭컬 Re:vive의 사전예약과 새로운 소식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트릭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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