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의 계약과 뉴 라이프
“아아아악!”
공중에서 추락한 늑대가 울부짖었다. 떨어진 충격보다 안구의 고통이 심한지 두 손으로 눈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소년은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역시 사람은 밝게 살아야 해~ 어때, 대낮처럼 밝지? ”
“시각 차단이라… 머리 좀 굴렸다만, 고작 이 정도로 날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상준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청각과 후각 만으로도 널 찢어 죽이기엔 충분해!”
“응, 그럴 것 같더라.”
-퍽
차갑다. 딱딱하다기엔 무르고 물렁하다기엔 단단한 감촉.
‘이건… 눈덩이?’
그가 입은 피해라곤 콧등이 조금 차가워진 것 뿐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공격에 대해 신경을 끈 팀은 발톱을 드러냈다. 강철 단검보다도 예리해 보이는 발톱엔 눈길도 주지 않고 상준은 손가락을 튕겼다.
-콰드득!
살을 찌르고 뼈를 부수는 소리가
“이… 새끼….”
팀의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콧잔등에 남아있던 눈이 말뚝으로 변해 그의 턱을 뚫어버린 것이다. 위아래 턱이 말뚝에 관통 당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큰 타격은 코가 망가진 것이었다. 감각이 망가진 틈을 노린 상준의 일격은 날카로웠다.
“청각과 후각 만으로도 찢어 죽일 수 있댔지? 그럼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는 어때? 아, 미안. 그 상태론 말하기 힘들겠네.”
“죽… 어!”
옆구리를 찔린 팀이 팔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 자리에 상준은 없었다.
“소리 만으로 캐치 하는 거 엄청 어렵지? 근데 하다 보면 늘더라. 너도 이번 기회에 연습해 봐.”
웨어울프는 청각도 인간보단 뛰어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각과 후각 만큼은 아니라서 기습을 피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10개나 박아놨는데도 서있네. 너도 어지간히 독종이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날선 마력 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다.
“그래그래, 그럼 진짜 끝장을 보자고.”
너덜너덜해진 그에게 마지막 일격이 될 한 자루가 상준의 손을 떠났다. 온몸을 찔려도 버틴다 한들 머리에 꽂히고도 버틸 수 있을까. 이마에 결정타를 맞은 팀이 쓰러진다. 그것이 베스트 시나리오일 테지만….
-콰직!
파열음과 함께 팀의 몸에 박혀있던 얼음 칼날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 순간, 적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그는 기다렸다.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온몸의 근육을 파열 시킬 기세로 뛰쳐나가는 팀.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인간 탄환이었다. 강철도 찢는 발톱이 상준의 심장을 노렸다.
“빙설의 말뚝은 전류와 공명한다.”
“커헉!”
-쿵!
팀은 무게 중심을 잃고 흐트러졌다. 그 속도 그대로 목표를 비껴나가 얼음 기둥에 처박혔다. 그가 의식을 잃은 걸 확인한 상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기술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 했네.”
[그러게. 역시 얼음 단일보단 전기, 얼음 타입이 낫지~]
“사람을 포켓몬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래그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 팀을 끝장내고 주리도 마무리 해야지.”
[참고로 업화의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를 죽인다고 해약 되진 않는다고?]
“걱정 마. 다 생각이 있…!”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마력의 기척. 상준은 고개를 돌렸다.
[저걸 어떻게 할 방법도 있길 바랄게.]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전에 없던 거대한 마력과 그 이상의 존재감은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라이트 마법을 없애고 눈을 뜨자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주리가 보였다. 마력보다도 살기가 그득 차 있는 눈동자가 훨씬 무서웠다.
‘냉정하게 생각하자… 분위기에 압도 되면 될 일도 안 돼. 난 분명히 척수를 공격했고, 주리는 무력화 됐어.’
“… 그런데 어떻게 다시 일어난 거지?”
여러 가설을 떠올려 보지만 정보가 부족하다. 당장 알 수 없는 건 제쳐두고 그 다음을 생각했다.
‘왜 기습하지 않았을까. 저만한 마력을 공격에 쏟아부었으면 난 막기 급급했을 거야.’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면?’
“허구한 날 티격대더니 그래도 동료는 동료인가 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미끼를 자처하다니.”
“…….”
“말도 못할 상태면서 버티고 서 있단 말이지…. 사실 동료 이상의 관계였다 든가?”
주리는 움찔 했으나 인간의 시력으론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다.
“뭐, 사정이 어떻든 내 알 바 아니지. 어차피 팀 다음은 댁이었으니, 원하는 대로 먼저 끝내 드릴게.”
[부추겨 놓고 이런 말하긴 뭣하긴 한데, 너 악역 같아.]
‘그런 거 신경 안 써!’
상준이 주문을 읊조리자 그의 주변에 스무 개 가량의 얼음 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손끝이 가리킨 곳을 향해 일제히 쏘아졌다. 동시에 소년도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이 순간 주리의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흐릿한 시선 끝에 걸려있는 건 자신을 노리는 날카로운 창끝이나, 달려오는 적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몸 상태가 최악이야.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가? 모르겠어. 온몸이 깨질 듯이 아프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어. 혼자였다면 이렇지 않았을텐데…. 이건 다 그 녀석 탓이야.’
5년 전, 팀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여느 도깨비들과는 달리 나는 흥이 없는 성격이었다. 음주가무는 물론이고 누군가와 어울리는 일에 흥미를 못 느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고향을 떠났다. 발길 닿는대로 방랑하다 이 사막까지 오게 됐다. 타인과 거의 엮이지 않는 조용한 자급자족의 삶이었다. 웬 웨어울프 한 마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거기 도깨비 누님! 힘 깨나 쓰시네요. 전 팀 버캣이라고 합니다. 저랑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보지 않을래요?”
“… 개소리 말고 꺼져.”
“개소리라니~ 저는 키 크고 다부진 여성이 취향인 점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걸요.”
여느 때처럼 도적들을 박살 내고 상인에게 성의를 받아내던 중 그 녀석은 뜬금없이 내 앞에 등장했다. 귀찮게 들러붙는 걸 두들겨 패서 쫓아냈지만, 녀석은 매일같이 나타났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면 된다는 거죠? 이래 봬도 저 제법 세다고요.”
너무 끈질기길래 아무 말이나 지어냈는데, 아예 덤비라며 자세를 잡는 게 아닌가. 유들유들한 겉모습과는 달리 녀석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결국 내가 이겼지만.
“이야~ 실력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이거 부끄럽네요.”
“… 생각 외로 좀 하네. 애먹었어.”
“애를 먹는 건 좀 그렇고, 제 애를 배주지 않으실래요?”
“… 죽어.”
팀과 알게 된지 1년 좀 넘었을 즈음 그는 함께 술을 마시던 중 물었다.
“누님은 대체 취향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동성이 좋다 든가?”
“팍 씨! 못하는 말이 없어. 네가 수준 미달인 걸 왜 나한테 이유를 찾아.”
“아니, 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얼굴도 이만하면 괜찮고, 근육질에 재치 있고, 싸움도 잘하잖수!”
“마빡에 손바닥 만한 흉터가 있고, 근육은 내가 더 크지. 그리고 네 입에서 나오는 건 재치가 아니라 깐족거림이고 싸움도 나한테 지잖아.”
자기가 모자란 게 아니라 내가 너무 고스펙이라 성토하는 그에게 나는 말했다.
“하다못해 나보다 세지면 다시 생각해보지.”
술기운에 아무 말이나 한 거였는데, 팀은 그 날 이후 실력 향상에 힘쓰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나를 이기려는 것인지 해가 갈수록 실력이 좋아졌다. 뭐,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실력도 많이 늘었고 요즘엔 남자다운 맛도 생겨서 나름 볼만해졌는데….’
주리는 흐릿한 실루엣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하냐….”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삼키며 주리는 손뼉을 모았다.
[저거 저거 움직인다! 마무리가 너무 어설펐던 거 아니야~?]
‘급소를 공격 당했는데 다시 일어서는 쪽이 이상한 거라고!’
[도깨비는 보통 신체를 맞부딪쳐 마법을 쓰지. 저거 안 막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알고 있어!”
발바닥 부근에서 냉기가 터져 나왔다. 한층 더 가속하는 상준. 날다시피 뛰어간 그는 먼저 날아간 창을 따라잡았고, 스트라이커가 공을 차듯 그는 발등으로 창의 밑동을 걷어찼다.
-콰직!
날카로운 일격이 주리의 명치를 꿰뚫었다.
“후~ 진짜 힘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찾는 상준. 계약자의 부름에 나타난 양피지는 팔랑팔랑 떨어지더니 그의 손의 딱 들어왔다.
[그런데 네가 끌고 온 도적들을 다 합쳐도 100명을 못 채우지 않아?]
“그걸 메꾸기 위한 주리와 팀이잖아.”
말뜻을 알아차린 아리오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계약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도적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거야? 자기네 말로는 의적이라고 했잖아.]
“의적의 정의는 의로운 일을 하는 도적이잖아. 도적질의 대상이 다를 뿐 결국 도적이란 거지.”
[말장난인 것 같은데~]
“쟤네도 100명 잡아오면 풀어준다더니 방해하면 안된다는 규정이 없다고 대놓고 견제 했잖아. 꼬우면 계약서에 적어놨어야지.”
상준은 의기양양하게 양피지를 펼쳤다. 그가 잡은 도적의 수는 99명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어라? 방금 주리까지 처리 했는데 왜 100명이 아니지?”
-짝!
온 살림살이를 땔감 삼아 타오르던 불마저 꺼지고, 고요해진 사막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염파(炎波).”
“화마를 막는 빙하의 장벽!”
피할 길 없는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상준을 덮쳤다. 방어 마법을 시전 했지만, 불판 위 얼음처럼 실시간으로 녹아내렸다. 말 그대로 통구이가 될 위기에 놓인 소년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아리오나!”
[계약의 주문을 읊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주리의 눈에는 화염 속에서 불쑥 누군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모조리 태워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상해….”
계속해서 화력을 올리고 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다. 단순히 생존해 있는 걸 넘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화염을 꺼트린 주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자를 확인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곧 죽을 양반이 알아서 뭐하게.”
날개와 뿔이 생기고 머리카락 끝이 붉게 물든 상준, 그는 이번에야 말로 구질구질한 악연을 끊기 위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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